[박양춘 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코리아 사장] 소득 뻔한 월급쟁이지만 매달 300만원 기부
- [박양춘 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코리아 사장] 소득 뻔한 월급쟁이지만 매달 300만원 기부

“기부가 좋은 일이라는 건 다 압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다들 기부를 하고 싶어 하죠. 저는 월급쟁이지만 운 좋게 그 계기를 잡았습니다.”박양춘(54) 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코리아 사장은 “경쟁사 사장으로 영전하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 교육비가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인 지금이 기부의 적기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비즈니스도, 기부도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사장은 5개월 전까지 티센크루프의 경쟁사인 오티스 엘리베이터코리아의 부사장으로 있었다. 오티스 중국법인 CEO로 있다가 티센크루프 CEO로 스카우트됐다.중국법인에 2년 근무하는 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회사를 옮기면서 귀국해 식구들과 합치게 된 것도 그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새삼 행복감을 느꼈다. 어느 새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놈), 친구들 중에는 집에들어앉은 사람도 많다. 형편이 어려워 그에게 10만~20만원을 부쳐달라는 친구도 있었다.
그는 지난 6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월 300만원씩 3년 동안 기부를 하기로 약정했다. 그러면 기부 총액이 1억800만원이 된다. 아너소사이어티는 1억원 이상 나눔(약정자 포함)을 실천한 개인 기부자들의 모임이다.“실은 돈 좀 있는 저의 친구들에게 자극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주변의 착하고 돈 잘 쓰는 사람들도 가만히 보면 베푸는 대상이 자기가 아는 사람들입니다. 좀처럼 모르는 사람들로 확장이 안 됩니다.”
기부도 타이밍 놓치지 말아야막상 결심을 하려니 16년 전 세상을 떠난 큰 형 자녀들이 마음에 걸렸다. 27년째 고교 교사로 근무하는 아내와도 상의를 해야 했다. 봉급쟁이 28년 차에 사장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목동에 있는 한 동 짜리 ‘나홀로 아파트’ 34평형에 산다. 그는 아이들이 고교에 진학하면서 아내에게 직장을 그만두라고 한 일이 있다고 털어놓았다.“집사람에게 ‘당신이 그때 내 말 안 듣고 그만두지 않았으니 이 기부금은 당신이 당신 월급으로 기부하는 것’이라고 둘러댔습니다. 내가 설마 3년 동안 그거 못 내겠느냐고 했죠. 썩 마음이 내키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선선히 동의를 해줬습니다.
그 전에도 제가 100만원, 200만원씩 여기 저기 NGO에 기부를 했거든요. 친척 중에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자립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는 기부활동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도 “아빠 이런 사람”이라고 넌지시 흘린다. 그리고 “너희들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인다.
박 사장은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제천에서 자랐다. 이북 출신으로 연희전문 국문과를 나온 그의 아버지는 국어교사로 일했다. 월급이 적어 6남매를 키우기도 빠듯했는데 아버지는 그 돈마저 술값으로 날리기 일쑤였다. 그의 두 형과 두 누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취직을 한 두 누나가 학비를 대 그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게 됐다. 담임선생님이 일정과 준비물에 대해 설명했다. 숙소는 송죽여관이었다. 친구들과 “송아지가 죽은 여관”이라고 웃고 떠들었다.
그러나 반 친구 60명 중 그를 포함해 열 명 남짓은 송죽여관을 구경할 수 없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수학여행비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 다음에 커서 돈을 잘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훗날 초등학교 동창들과 만났을 때 송죽여관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 여관에 묵은 친구들조차 여관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서울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밟았다. 그 시절 단돈 5원이면 볼 수 있는 단체관람 영화를 번번이 놓친 것도 서글펐다. 영화관은 공교롭게도 바로 집 앞이었다.
때로는 현실세계와 담을 쌓고 술로 소일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아버지로서는 그 학벌에 시골에서 썩는 게 한이 되신것 같습니다. 평생 장발 스타일에 풍류를 즐기느라 가정은 소홀히 하셨죠. 그러다 평교사로 정년퇴임을 하셨어요. 퇴임식 날 나는 아버지처럼 되지는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말단사원으로 시작해 사장이 됐으니 이만하면 촌놈이 출세한 거죠.”
스펙은 좋았지만 평생 비주류로 사신 아버지를 전략적으로 자신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은 셈이다.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는 어떤 자리를 맡더라도 조직에 꼭 필요한 사람, 최고의 성과를 내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늘 남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했다.티센크루프의 국내 엘리베이터 시장 점유율은 약 20%이다. 오티스와 2위 싸움을 하고 있다. 1위는 현대엘리베이터. 이익 면에서는 그러나 오티스가 1위다. 티센크루프의 ‘최종 병기’는 트윈 엘리베이터다. 하나의 통로에서 두대의 승강기가 움직이는 이 독보적인 기술은 세계적으로 티센크루프만 보유하고 있다.
사장 부임 후 고용 보장 선언티센크루프에 부임한 후 그는 구성원들에게 고용을 보장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일반적으로 고용 보장에 소극적인 다국적기업 CEO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가 상시적으로 구조조정을 하는 미국계 오티스 출신이라 경계를 했던 직원들은 반신반의했다. 굴러온 돌인 그가 박힌 돌을 뽑아내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프로야구 감독론을 폈다. 선동렬 같은 감독은 선수 시절 어느 팀에서 뛰었든 소속팀의 우승을 위해 매진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긍정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차장 시절까지는 동료들보다 승진이 뒤졌다. 아버지의 경로를 밟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다국적 기업 소속이 되면서 일이 잘 풀렸다. 아이디어가 풍부한 그는 자원하다시피 해서 여러 부서를 돌며 경력을 쌓았다. 연고주의로부터 자유롭고 성과주의가 체화 된 기업문화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저는 말하자면 입학사정관제형 전형으로 발탁됐습니다. 외국계 회사가 아니었다면 사장이 되는 일은 없었을지 모릅니다.”티센크루프 부임 직후 그는 900명에 이르는 직원들과 대부분 직접 만났다. 전국의 지점을 돌았는데 몇몇 지점에서는 CEO의 방문이 처음이라고 했다. 과거 11월까지 끌던 단체협상도 두 달 만에 마쳤다. 들어줄 건 들어주고 수용할 수 없는 요구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임원들은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반겼다.“기부도 그렇지만 ‘선언의 효과’라는 게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업계에 오래 몸담아 어떻게 해야 회사가 성장하는지, 어떻게 해야 경쟁사를 이길 수 있는지 안다고 자부합니다. 소신껏 일하다 뜻대로 안 되면 그만두면 되죠. 오티스에 있는 동안 계속 이익을 내면서도 구조조정을 하는 게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게 이직에도 영향을 미쳤죠. 티센크루프에서는 내가 능력을 발휘하면 내 방식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용 없는 성장이 화두인 시대입니다. 고용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체격이 건장한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어려서는 특히 축구를 좋아했다. 그 시절 빵과 날계란을 얻어먹으려 그는 축구부에 들어갔다. 싸움은 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건달 친구도 많고 그 중 다수가 폭력 전과자들이라고 그는 귀뜀했다.“여러 번 잘못된 길로 빠질 수도 있었는데 액운이 저를 피해갔습니다. 고등학교 때 몇 번 잘릴 뻔했고, 사회에 나와서도 오만방자한 옆 자리 상사에게 주먹을 휘두른 적이 있어요. 희한하게 그러고도 무사히 넘어갔어요. 감사한 일이죠. 어려서 원망도 했지만 교직에 계시던 아버지가 그때마다 울타리가 되어주신 것 같습니다. 일탈을 했다가도 돌아왔으니까요.”그는 돈 버는 일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라고 했다. 재테크에 대한 욕구도 있다. 그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정당하게 돈 버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소득 재분배가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어렵게 자란 사람은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악착같이 벌어 자린고비처럼 안 쓰는 사람, 다른 하나는 어렵게 자랐으니 좀 쓰고 살아야겠다는 사람이죠. 저는 후자에 속합니다. 생긴 대로 살아가는 거죠.”
박양춘 사장의 기부 철학•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알아야 한다
•기부는 자녀교육에도 좋다
• CEO의 기부는 기업에도 이익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1998년 설립된 전문 모금 및 배분기관이다. 공동모금 한 기부금을 아동·청소년, 장애인, 노인, 다문화 여성, 해외 기부금 수요자 등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한다. 세 개의 빨간 열매로 이루어진 ‘사랑의 열매’로 잘 알려져있다. 월급에서 일정액을 매달 기부하는 직장인 나눔 캠페인, 인터넷 댓글과 나눔을 실천하는 소셜 네트워킹 셰어, 가게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착한 가게 캠페인, 1억원 이상 기부자들의 모임 아너소사이어티 등의 나눔 프로그램을 만들어 함께하는 사회, 나누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설립 첫 해 214억 원이었던 공동모금액은 지난해 3692억원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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