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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황과 불황 사이에 낀 세대

호황과 불황 사이에 낀 세대

한국의 88만원 세대는 윤택한 성장기를 보냈지만 성인이 되면서 불황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재벌을 비난하면서도 대기업 취업을 희망하고 중도적인 정치 성향을 보인다.



취업난보다 인력난이 심하던 때가 있었다. 한국경제가 호황이었던 1970~80년대 이야기다. 1977년 한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이공계와 상경계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은 90~100%에 달하고, ‘취업이 힘들다’는 인문계 대졸자의 취업률도 70%를 넘을 정도였다. 1970~90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70배 가까이 늘어났고, 연평균 10% 안팎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시기의 경제 발전의 혜택은 6·25전쟁 이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1955년~63년생)가 누렸다.

1997년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도래하면서 2000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4~5%대로 떨어졌다. 2009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가세해 0.3%까지 추락했다.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다. 에코부머(1979~1985년생)라고도 불리는 이들 세대는 부모 밑에서 풍요를 누리며 자랐지만, 사회 진출 시기에는 경제난의 여파로 생활고에 시달린다. 이들이 대학생이던 2007년에는 ‘88만원 세대’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대부분이 계약직, 인턴 등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비정규직 평균임금 119만원에 20대의 평균소득비율 74%를 곱한 88만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88만원 세대가 가장 먼저 부딪히는 현실의 벽은 취업난이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는 졸업 연기자의 급격한 증가다. 지난 7월 한 일간지 조사에 따르면 서울 시내 15개 대학의 2012년 1학기 졸업 연기자의 수는 지난해 졸업생의 약 40% 수준이다. 졸업 연기자가 가장 많은 서울대의 경우는 1852명으로 졸업생의 49%에 이른다. 이들이 학교 도서관 이용이나 취업강연 등 재학생에게 주어지는 각종 혜택을 계속 누리려고 졸업을 연기하는 이유도 있지만, 섣불리 졸업했다가 취직에 실패한 ‘취업재수생’ 딱지가 붙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2년 반 동안 휴학하고 지난 8월 대학을 수료했다는 윤수진(가명, 26) 씨는 “졸업을 하지 않아야 취업에 유리할 듯해 졸업이 아닌 수료를 택했다”고 말했다. “많은 기업이 졸업예정자를 선호한다. 수료 상태면 이력서에 졸업예정자라고 기입할 수 있다.” 윤 씨의 꼼수 아닌 꼼수는 일리가 있다. 지난 2월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424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4.5%의 기업이 취업 재수생을 꺼린다고 알려졌다. 22.4%의 기업은 채용 요건에 ‘직전학기 졸업자’ ‘작년 8월 졸업자’ 등을 자격 조건으로 내세웠다. 졸업 이후 취업이 늦어질수록 불리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졸업을 연기한다고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는다. 지난해 1월 취업포털 사람인의 조사에서는 기업 인사담당자 339명 중 45.1%가 ‘휴학 및 졸업연기 경험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 두 조사에 따르면 많은 기업이 휴학이나 졸업 연기없이 졸업 후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인재를 선호한다.

졸업과 취업이 늦어지게 되면 결혼과 출산도 덩달아 미뤄지게 마련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11년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이 31.9세, 여성이 29.1세로 나타났다. 이는 1990년에 비해 5년 가까이 높아졌다. 또 지난 20년간 25~29세 출산율은 저하된 반면 30~34세 출산율은 꾸준히 상승했다. 취업을 하지 못해 30세가 넘도록 부모의 경제력에 기대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나이가 차도록 일자리를 찾지 못한 88만원 세대들은 아예 취업을 포기하고 부모에게 기대 산다.

현대경제연구소는 ‘에코부머의 3대 경제난’ 보고서에서 학생도 직장인도 아니면서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 무리를 일컫는 ‘니트족’(NEET: Not in Employment, Education or Trainning)에서 에코부머군(27~33세)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분석했다. 수입이 없을 뿐 아니라 빚까지 진 경우도 적지 않다.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18만 명가량이던 학자금대출 학생수가 2011년에는 136만 명을 넘어섰다. 한국장학재단은 학자금 대출에 따른 신용 유의자 수를 2012년 8월 기준 3만7431명으로 집계했다.

5년 전인 2007년보다 10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새누리당 민병주 의원은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잘 안 되니까 (대출금 상환을) 연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올해 초부터 공무원으로 일하는 문미란(28, 가명) 씨는 “졸업하고 3년 뒤에야 취직을 해 아직 학자금 대출금을 다 갚지 못했다”며 “신용등급마저 낮아져 신용카드 발급도 거절당했다”고 푸념했다.

부모와 대학의 품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이가 많지만 이들 젊은 세대의 소비패턴은 매우 적극적이고 과시적인 성향을 띤다. 소개팅 서비스업체 ‘이음’이 지난 4월 미혼남녀 1029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남성의 64%, 여성의 50%가 ‘1~2개의 명품을 소지하고 있다’고 답했다. “명품 브랜드가 2~3개 있다”는 직장인 이성신(28) 씨는 “튼튼하고 오래 쓸 수 있어서 효율적일 뿐 아니라남들에게 보여주기도 좋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비싸지 않은 제품을 세일 기간이나 면세점 등을 이용해 가능한 한 저렴하게 구입한다.”

LG경제연구소의 보고서 ‘2011년 대한 민국 20대의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에 따르면 ‘자신을 꾸미는 데 쓰는 돈은 아깝지 않다’는 문항에 20대의 46%, 30대의 34%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 ‘다른 지출을 줄여서라도 여가나 취미에 돈을 쓰겠다’는 비율은 20대에서 52%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20대가 “쇼핑을 즐기며 명품을 선호하고 신제품이 나오면 신속히 구매”하는 편으로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자란 20대들이 과시적 소비성향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직업 선택에서는 안정성을 추구하고 소비에는 적극성을 보이는 88만원 세대의 성향은 정치 분야에서도 또렷하게 드러난다. 최근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진행된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20~30대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야권 후보를 지지한다고 나타났다. 지난 4월 총선 당시 KBS·MBC·SBS 등 방송 3사의 출구조사에서도 20대 투표자들의 민주당 지지율은 47.9%, 30대의 경우는 53.5%로 나타났다. 여론조사기관 모노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12월 대선에서 야권 단일후보를 지지하겠다는 비율도 20대가 56%, 30대 역시 56.2%로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동아시아연구원 여론분석센터의 정한울부소장은 이런 경향이 20대와 30대 세대에 내면화된 “탈권위주의적-자유주의적 성향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한다. 그는 또 “냉전적 대북관, 권위주의적 통치 습성을 야당에 비해 강하게 드러내는 새누리당(전신인 한나라당 포함)은 젊은 층의 성향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가 진보 세력을 지지하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4·19혁명, 6월 민주항쟁 등 한국근대사의 굵직한 민주화운동은 대부분 젊은 세대로부터 촉발됐다. 70년대와 80년대 대학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로 하루가 멀다 하고 수업이 중단됐다. 이런 현상은 2002년 16대 대선까지도 이어졌다. 2002년 MBC와 코리아리서치의 공동 여론조사에서는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20대의 지지가 59%, 30대는 59.3%로 나타났다.

그러나 88만원 세대가 20대에 진입해 본격적으로 선거에 참여하기 시작한 2007년 17대 대선에서는 판세가 달라졌다. 20대의 45.8%가 한나라당의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한 반면 당시 민주당의 정동영 후보는 21.3%를 얻는 데 그쳤다. 30대에서도 41.4%가 이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정 후보의 지지율은 28.3%로 20대에 비해 양 후보간 격차가 훨씬 줄었다. 정 부소장은 “2007년 대선부터 진보층의 한나라당 지지가 급증하면서 기존의 이념적 일관성에서 벗어난 중도층 유권자들이 다수 등장했다”며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중도층은 20대에 가장 많다”고 분석했다.

88만원 세대는 대선주자들의 ‘경제민주화’ 주장에도 찬성하는 기류가 높다. 그들은 경제민주화의 쟁점 중의 하나인 재벌개혁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그들이 재벌기업으로 칭하는 대기업 취업을 희망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올해 하반기 삼성그룹 대졸 신입사원 공채는 4500명 채용에 총 8만 명의 지원자가 몰려 역대 최고 경쟁률인 17대 1을 기록했다. 삼성전자는 취업포털 인크루트의 대학생 선호기업 조사에서 9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대학생들의 선호기업 조사에서는 삼성 이외에 CJ, LG 등 대기업들의 이름이 올랐다.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는 ‘언론고시생’들도 근무 여건이 좋은 보수언론사의 입사를 지원하는 이들이 많다. 언론사 취업을 준비하는 서현욱(가명, 27)씨는 “보수언론의 인식이 부정적이긴 하지만 이들 언론사의 취재방식이나 글쓰기 등에 배울 점이 많다”고 말했다.

무엇이 88만원 세대의 내면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그들이 눈앞에 마주한 현실은 그동안 살아온 환경과 매우 다르다. 이들은 부모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무리 없이 고등교육을 마쳤다. 그래서 어느 세대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일자리에 따른 호불호가 강하다. 그러나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취업난이라는 현실의 벽에 직접 부딪히면서 그들은 눈높이를 낮춰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다.

대학 졸업 후 홍보대행사에서 일하는 허혜영(26, 가명) 씨는 “대기업 공채에 응시했다가 연달아 떨어져 경력이라도 쌓을 겸 이 회사에 입사했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 원했던 직종이긴 하지만 회사 규모가 작다”며 “일을 하면서 틈틈이 대기업 공채를 준비한다”고 덧붙였다.

이들 젊은 세대가 학교에서 공부하던 1990~2000년대 초반에는 취업난이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외환위기를 맞은 1990년대 후반에는 20대 실업률이 10%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내 안정됐다. 극심한 취업난을 치렀던 2002년에도 20대 실업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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