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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 reporter at large - 키부츠 시대의 종말

NB reporter at large - 키부츠 시대의 종말

이스라엘 정신의 바탕을 이뤘던 공동체가 퇴조하고 민족주의와 자본주의가 부상한다


압샬롬 빌란의 이력을 보면 옛날 이스라엘 엘리트의 전형이다(once exemplified the Israeli elite). 이스라엘 생활공동체 키부츠에서 태어나 군에서는 최고 정예 대(對)테러 부대 사이렛 매트칼(Sayeret Matkal)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상 진전을 위해서도 힘썼다. 따라서 1999년 좌파 성향 메레츠 당 소속으로 총선에 첫 출마했을 때 무난히 당선됐으며 재선에도 성공했다.

그해 메레츠 소속 의원 10명 중 3명이 키상징적인 생활공동체 키부츠 구성원들이 이스라엘 정치의 밑바탕을 이루던 시절이 끝나간다. 부츠 출신이었다. 키부츠는 한 세기 전에 시작된 시온주의 운동의 밑바탕을 이루는 상징적인 공동체 마을이다. 1999년 전체 의원 120명 중 키부츠 출신이 8명에 달했다. 인구 전체 비중에 비해 3배 이상 많았다.

61세의 빌란은 카우보이 영화 등장인물처럼 거칠고 억센 외모를 가졌다(has the rugged good looks). 다음 주 새 의회를 선출하는 이스라엘 총선에 다시 입후보한다(will be on the ballot). 하지만 이번에는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 실제로 이스라엘인들이 법을 제정하고 권력을 나눠 갖는 예루살렘 의회 건물에 키부츠 출신은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희망은 버리지 않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하다.” 그가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스라엘이 많이 변했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이스라엘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변화는 거의 불가해 한 일이다. 수십 년 동안 키부츠 출신들이 군부와 정계 등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기관들을 좌지우지했다. 그때도 전체 인구 중 그들의 비율은 결코 6%를 넘지 않았었다. 다비드 벤구리온 초대 총리와 전쟁영웅 모셰다얀으로부터 이스라엘 대표 작가 아모스오즈와 에후드 바라크 국방장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위인(towering figures) 중 다수가 키부츠 태생이거나 성인이 되어 그 공동체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스라엘 정계 퇴장(their disappearance from the political scene)은 지금까지 그 나라에서 한동안 전개돼온 더 광범위한 추세의 정점을 이룬다. 기존 엘리트로부터 새로운 엘리트로의 권력이동이다. 1월 말 마지막 키부츠니크(kibbutzniks, 키부츠 출신)가 의회를 떠날 때 요르단강 서안 정착촌 출신의 초선 또는 재선 의원(either as newly minted lawmakers or returning ones) 최대 16명이 의회건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은 1967년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공동체 건설에 착수했다.

그 이후 가장 많은 숫자의 의원이 정착촌 주민을 대변하게 되는 셈이다(That’s a larger representation for the settlers). “키부츠 운동의 중요성이 감소하면서 더 민족주의적이고 종교적인 또 다른 그룹이 부상한다.” 바르-일란 대학의 BESA 전략연구센터를 운영하는 정치학자 에프라임 인바르의 말이다. “그들이 새로운 귀족계급이다(are the new aristocracy).”

이념적으로 두 그룹은 더 없이 다르다(couldn’t be more different). 키부츠니크 대다수는 대단히 세속적이며 정치적 온건파다. 대부분 노동당과 메레츠당 같은 중도 및 좌파 정당을 지지한다. 이들 정당은 팔레스타인 측과 평화협상을 지지했다. 반면 정착민들은 정치지형의 오른쪽에 치우친 정당들에 표를 주는 경향을 띤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리쿠드당을 비롯한 의회 내 종교 정파들이다. 여론조사가 정확하고 네타냐후가 차기 정부를 구성한다면 집권연합의 최대 25%가 정착민으로 구성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칠 소지가 있다. 이스라엘은 올해 건국 65주년을 맞는다. 국가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핵심 문제 중 다수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요르단강 서안의 지위다. 팔레스타인 측은 자신들이 앞으로 수립하는 국가의 일부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요즘 이스라엘 정계에선 합병을 공개 거론하는 주류 인사가 갈수록 늘어난다. 정교 분리 문제도 그에 못지않게 시급하다. 이를 둘러싸고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 종종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다. 요즘엔 이스라엘의 기본이념으로서 민주주의의 위상조차(Even the preeminence of democracy as the country’s guiding principle) 논쟁의 대상이 되는 듯하다.

적어도 이스라엘이 향후 10년 사이 이 같은 문제 중 일부를 결정짓기 시작할 가능성은 다분하다. 그 기간은 정착민의 시대가 되리라고 내다보는 분석가가 갈수록 늘어난다. 정착민들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동질적인 그룹은 아니다. 요르단강 서안으로 이주한 이스라엘인 중 다수는 집을 싸게 얻기 위해서였지 반드시 우파 이념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지도자들은 모든 이슈에 관해 대단히 뚜렷한 정견을 보이는 편이다(tend to have sharply delineated ideas on all the issues). 키부츠니크는 거의 또는 전혀 발언권을 얻지 못할 듯하다.

그렇다면 키부츠니크들이 어떻게 영향력을 잃게 됐을까? 수십 년 전까지 키부츠는 그 젊은 유대국가의 가장 흥미롭고 화제가 됐던 실험 중 하나였다. 이 농촌 공동체에서 통상 200~300명이 공동작업을 하고 소득을 공유하며 준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생활해 왔다. 구성원들은 (그 운동의 표현을 빌리자면)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것을 얻었다(give what they could and get what they needed).”

이민자와 난민들의 나라에서 키부츠니크는 모델 집단(the status group)이었다. 오픈 칼라 셔츠, 카키색 바지, 성서에 등장하는 트윈 스트랩 샌들 차림을 한 이들은 금방 눈에 띄었다. “우리는 자칭 시온주의 사회주의자였다(called ourselves Zionist socialists)”고 아하론 야들린이 말했다. 1946년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의 모래밭 위에 키부츠 하체림을 세운 인물이다. “모두가 우리처럼 되고 싶어했다.”

86세의 야들린은 그 시대 키부츠 리더십의 표본이다. 국가수립 전 팔마크(Palmach)로 알려진 최정예 군사조직의 전투원이었다. 그 뒤 19년 동안 의원생활을 했다(1949년 이스라엘의 첫 민선 의회에서 키부츠니크는 모두 26명이었다). 그리고 3년 동안 이스라엘 교육장관을 역임했다.

최근 야들린의 안내를 받아 키부츠를 둘러봤다. 그는 1946년 하룻밤 새 지어 올린 최초의 막사들을 가리켰다. 예정된 팔레스타인 분할 때 네게브를 유대인들에게 배정하도록 유엔 현장조사단을 설득하기 위한 벼락공사의 일환이었다(part of a construction blitz designed to help persuade U.N. fact finders).

벽면에 책이 가득한 그의 집은 작고 소박하다. 그는 매달 8000달러가량의 의원연금을 받는다고 한다. 이스라엘 기준으로 상당한 액수다. 그 돈이 고스란히 키부츠로 들어간다. 그리고 훨씬 적은 봉급이 그를 비롯한 다른 구성원들에게 똑같이 분배된다.

야들린은 키부츠의 위상이 실추된 주된 이유가 나라의 이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재산공유(shared wealth)와 사회평등을 강조하던 이스라엘이 1970년대 언젠가부터 서방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큰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됐다. 1980년대 경제위기로 키부츠 다수가 파산위기에 몰렸을 때 구성원들조차 공동체 시스템의 자생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레이건 경제학과 대처리즘의 시대였다”고 다니 자미르가 말했다. 키부츠 운동을 연구하는 하이파 대학 사회학자다. “따라서 이들 대단히 우세한 자유시장 이론이 키부츠까지 파고 들었다.”

몇 년 안돼 대다수 키부츠는 집산주의의 핵심 강령을 포기했다(had jettisoned the main tenets of collectivism). 대신 더 자본주의적인 구조를 택했다(하지만 하체림은 변함없이 원래 모델을 고수한다). 공동식당, 의도적으로 격식을 없앤 복장규정(the deliberately unceremonious dress code) 등 키부츠의 상징들도 사라져 갔다(went out of fashion). 2007년에는 의회에서 샌들 착용도 금지됐다. 더 큰 추세전환을 상징하는 작은 변화 중 하나였다. 벤구리온이 알았다면 분명 격노했을 조치였다.

그러나 그건 변화의 일부에 불과했다. 키부츠니크 쇠퇴의 또 다른 원인은 90년대 말에 있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의 평화진영과 동격으로 간주돼 왔다. 1990년대 팔레스타인 측과 오슬로 협정(the Oslo accords,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와 이스라엘의 평화 공존을 모색)을 체결하고 계속해 후속 협약들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대규모 폭력사태로 합의가 무산되자 협정의 산파역을 맡았던 평화진영과 노동당의 신뢰가 크게 실추됐다.

노동당은 한때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정당이다. 그리고 키부츠 운동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주로 노동당 편에 섰다. 하지만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 19년 사이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건 단 한번뿐이었다. “키부츠는 두 가지, 평등주의와 평화 이슈를 상징했다”고 정치학자 인바르가 말했다. “이스라엘인들은 두 문제 모두에 흥미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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