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VER STORY - 볼리바르 혁명은 끝났나
2012년이 저물어갔다. ‘사령관’ 우고 차베스는 A319 에어버스에 올랐다. 트랩 맨 위에 서서 부하들에게 작별의 손을 흔든 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를 떠나 쿠바 아바나로 향했다.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이 여행을 수없이 했다. 1994년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에서 그를 따뜻이 맞았을 때가 처음이었다.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교도소에서 출감한 직후였다. 쿠데타에 실패하면서 2년을 교도소에서 보냈지만 그 일로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 무대에 우뚝 섰다.
그 익숙한 2000㎞ 여행의 기억은 너무도 좋았다. 그래서 그는 카리브해를 “행복의 바다”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여행은 지난 18년 동안 늘 해오던 것과 달랐다. 배웅 나온 각료와 측근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듯하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차베스가 암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베스는 지난달 귀국했다. 물론 대중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빈자리와 건강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소문이 꼬리를 물면서 베네수엘라는 정치적으로 분열됐다. 이 양극화된 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전전긍긍하며 극심한 불안에 빠졌다. 지난 3월 5일 차베스는 카라카스 육군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2011년 6월 암이 발견된 이래 네 차례의 수술과 여러 차례의 방사선, 화학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암에 지고 말았다.
차베스는 국수주의자이자 포퓰리스트 지도자로서 악마로 간주되는 동시에 영웅으로 숭배받았다. 그의 정부는 혼성 정권이었다. 완전한 민주주의도 노골적인 압제체제도 아니었다. 사법부 장악과 선거 조작을 바탕으로 독재권력을 계속 집중시키면서 주기적으로 선거를 실시했다. 차베스는 14년 동안 베네수엘라를 통치했다. 석유로 벌어들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면서 여러 차례 선거에서 이겼지만 동시에 국민을 서로 반목하게 만들었다. 그는 ‘볼리바르 혁명’이라는 운동을 이끌며 ‘21세기 사회주의’라는 모호한 이념으로 포장했다.
차베스는 강한 카리스마, 오만불손한 성격,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서 해방된 세계라는 혁명적인 비전 덕분에 막강한 국제적 영향력을 쌓았다. 미국 정부가 늘 만만한 표적이었다. 그는 쿠바, 러시아, 이란 같은 국가들과 맺은 동맹을 통해 워싱턴의 지시에 순종하는 전통적인 라틴아메리카 외교정책에 도전했다.
지난해 7월 차베스는 병이 완치됐다고 발표했다. 사실 그해 1월 첫날에도 똑같은 발표를 했다. 그러나 암은 계속 재발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그의 연설은 죽음을 향한 비애감과 반추로 가득했다. 여러 차례 그는 죽음을 초월했다고 선언하며 시몬 볼리바르에 견주었다. 볼리바르는 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5개국을 해방시킨 베네수엘라 영웅이다.
차베스는 초등학교 교사 부부의 둘째 아들로 카라카스에서 약 515㎞ 떨어진 바리나스주 서부 평원에 위치한 사바네타에서 태어났다. 6형제였던 차베스는 집안이 가난해 할머니 로사 이네스의 집에서 살았다. 할머니는 자주 그에게 증조부 페드로 페레즈 델가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이산타로 불렸던 그는 산적 두목인 동시에 영웅으로, 20세기 초반 대통령들과 독재자들에게 맞서 여러 차례 반란에 가담했다.
차베스는 어린 시절 읍내 축제에서 연설재능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 시절 그는 야구를 더 좋아했다. 메이저리그 선수가 될 까 생각했지만 결국 육군사관학교를 선택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더 확실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군에서 그는 지도자로서, 또 음모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또 동료들과 ‘볼리바르 혁명운동(MBR200)’을 결성한 뒤 10년 이상 베네수엘라 정권을 잡을 음모를 꾸몄다.
무엇을 남겼나차베스는 모순투성이였다. 베네수엘라 사회를 분열시켰으면서도 대선 3차례, 국민소환 투표 1차례, 대통령직 정당화 투표 1차례 등 출마한 모든 선거에서 승리했다. 더구나 차베스는 라틴아메리카 정치인들이 거의못하던 일을 해냈다. 2002년 그는 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지만 곧바로 재기했다.
그 쿠데타는 민영 미디어의 지원을 받은 재계와 일부 장성들이 미국의 암묵적인 지지 아래 일으켰다. 그 후 차베스는 그를 타도하려는 막강한 국영 석유기업 PDVSA와 자본부문의 전면 파업을 진압했다. 이 같은 승리를 통해 지도력을 강화하면서 카스트로에 필적하는 무적의 지도자로서 신화적 이미지를 다졌다.
차베스는 그런 경험 때문에 신흥재벌을 불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재벌의 재산을 몰수하는 싸움을 벌였다. 2003년부터는 사회 최빈민층을 돕는 사회 프로그램 ‘미션’을 실시했다. 그 전략은 효과가 컸다. ‘차비스모(Chávismo)’로 알려진 그 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빈곤에서 벗어났고 생활수준도 높아졌다. 아울러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한 복수자로 이미지를 굳히면서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었다. 빈민들은 차베스에게 헌신했다. 그의 정부가 아무리 무능하고 부패가 만연해도 빈민들에게 차베스는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이었다.
차베스는 1992년 2월 4일 짧은 TV 출연으로 정치 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쿠데타에 실패한 뒤 수감되기 직전 허용된 그 방송에서 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즈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다가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TV 카메라 앞에 선 그 61초가 그를 혁명 단역 배우에서 베네수엘라 정치사의 주인공으로 바꿔 놓았다. 또 그의 상징이 된 TV 정치의 씨앗이 됐다.
자기중심적이고 고압적인 성격을 가진 차베스는 자신의 이미지가 갖는 힘을 잘 알았다. 라틴아메리카 지도자로서 그만큼 TV를 적극 활용한 인물은 없다. 그의 역할모델인 카스트로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14년 동안 통치하면서 차베스가 TV에 등장한 시간을 합하면 7개월 이상에 이른다.
TV 카메라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에 반대하는 그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2006년 TV로 세계에 방영된 유엔 총회 연설에서 차베스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뼈아픈 농담으로 조롱했다.“어제 바로 이곳에 악마가 다녀간 게 분명하네요. 지금도 유황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 재담에 세계의 외교관들과 시청자들이 박수를 쳤다.
모든 국제 정상회의에서 ‘우두머리 수컷’노릇을 한 그의 연설은 외교 의전의 모든 규칙을 깼다. 막말로 저지를 받은 적은 단 한차례뿐이었다. 2007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이베로-아메리칸 정상회의 때였다. 차베스는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전 스페인 총리를 “파시스트”라 부르며 연설을 연거푸 방해했다. 참다 못한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국왕은 그에게 “입 닥쳐”라고 외쳤다. 청중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돌출 행동에도 불구하고 차베스는 남미국가연합(UNASUR), ‘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 중남미·카리브해 국가동체(CELAC) 같은 기구를 결성해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적·정치적 독립에크게 기여했다. 전체 통합은 이루지 못했지만 10년 전보다 더 잘 뭉치고 있다.
차베스는 1990년대의 신자유주의 물결과 싸운 일로도 기억된다. 그는 좌익화를 이끌어 빈곤, 사회 불평등과 싸우는 정부들 을 지원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네스토르 크리스티나 데 키르치네르, 볼리비아에서 에보 모랄레스, 에콰도르에서 라파엘 코레아, 우루과이에서 호세 무히카, 페루에서 올란타 후말라의 정권 장악을 적극 지지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그의 지지 때문에 정권 잃은 지도자도 있다. 멕시코의 좌파 지도자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즈 오브 라도르는 유권자들이 ‘차베스 효과’를 거부했기 때문에 2006년 대선에서 패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차베스 효과가 대단했다. 10년 전 피델 카스트로와 차베스는 ‘바리오 아덴트로 미션’ 협정을 맺었다. 베네수엘라는 쿠바에 석유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쿠바는 베네수엘라의 1차 의료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의사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내용이었다.
그 이후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협력은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 베네수엘라는 쿠바 경제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호흡 보조장치가 됐다. 그 덕분에 쿠바는 옛 소련의 재정지원이 끊어지고 미국의 경제 봉쇄가 반 세기 이상 지속됐지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석유는 쿠바만이 아니라 다른 카리브해 국가들에게도 제공되고 심지어 미국 보스턴과 브롱크스 빈민가에도 전달됐다.
차베스는 카스트로 형제가 이끈 쿠바 사회주의 정권과 정서적·정치적으로 깊은 유대 관계를 유지했다. 차베스에겐 쿠바가 제2의 조국이다. 그곳에서는 안전하게 보호받는다고 느꼈다. 1994년 차베스의 아바나 방문 후 카스트로는 그를 후배로 감싸 안았다. 폭발하기 쉬운 차베스의 성격을 다독거릴수 있는 아버지 역할을 자임했다.
알바로 우리베가 이끄는 콜롬비아 정부가 에콰도르에서 좌익 FARC 반군의 기지를 공습한 후 차베스는 콜롬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우리베가 베네수엘라에서 군사행동을 시도할 경우 전투기로 맞설 준비가 돼 있다고 선언했다. 무조건 미국 편을 드는 우리베는 차베스의 숙적이었다. 양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자 우리베는 전쟁을 막으려고 카스트로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베네수엘라와 미국의 관계가 불편했다는 사실은 당연할지 모른다. 차베스는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지만 그 보답은 받지 못했다. 차베스는 국가 수반으로 백악관에 초청 받은 적이 없다. 조지 W부시 정부와의 관계는 양쪽 모두에서 호전적인 말싸움으로 점철됐다. 차베스는 미국에 석유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계속 협박했다. 그러나 실천하지는 않았다.
미국에 버락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후로 차베스는 콜롬비아에 미군 기지 추가 건설을 반대했고, 주미 베네수엘라 대사를 소환했으며, 주 베네수엘라 미국 대사 지명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나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진 않았지만 매우 걸끄럽고 긴장이 높으며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차베스 이후차베스는 카리스마와 이목을 끄는 언변으로 국제 지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몇몇 지도자와 독재자만이 아니라 영화 감독 올리버 스톤, 모델 나오미 캠벨, 배우 대니 글로버스와 숀 펜 같은 유명인사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유산은 전혀 화려하지 않다.
차베스가 1999년 정권을 잡았을 때 유가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는 파산 직전이었다. 차베스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부활을 도모해 세력을 다졌고, 베네수엘라의 다국적 석유기업들에게 계약 협상을 강요했다. 신흥시장의 원유 수요가 늘어나면서 그런 조치는 베네수엘라 역사에서 최대 규모의 석유 횡재로 이어졌다. 차베스가 집권한 14년 동안 베네수엘라의 GDP가 세 배로 늘었다. 그로 인해 차베스는 사회 프로그램과 현금 지원을 바탕으로 수월하게 정치 조직에 자금을 댈 수 있었다.
얄궂게도 차베스의 성공과 국민 생활수준 개선은 그의 장기 비전에 역행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물가상승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거의 전적으로 석유에 의존하며 비능률, 낭비, 부패에 시달린다. 지난해 2월 베네수엘라 정부는 통화의 32% 평가절하를 발표했다. 10년 동안 네 번째였다.
경제학자 앙헬 알라욘은 “차베스가 소중한 베네수엘라 자원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했는가?”라고 물었다. “차베스는 석유가 배럴 당 100달러인 시점에 적자가 GDP의 16%인 나라를 남겨 놓았다. 석유가 없었다면 차베스가 어떻게 됐을까? 민간부문과 손잡고 부를 창출해야 했을 것이다. 그가 남긴 경제 모델은 실행 불가능하다.”
차베스의 도덕적 유산은 더 불투명하다. 그는 자극적인 연설로 국민의 분노를 선동했고, 반목을 이용했다. 그 결과 그가 없으면 이제 그런 적대감이 제어할 수 없는 악마로 변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는 완전히 분열된 두 개의 정치 블록으로 나뉘었다. 범죄율이 계속 높아져 세계에서 가장 폭력이 심한 국가에 속한다. 사회적 격변과 충돌을 빚어내기 쉬운 조합이다.
지난해 9월 베네수엘라 부통령을 지냈고 차베스 측근 중 한 명이던 호세 비센테 랑헬은 한 TV 프로그램에서 차베스를 인터뷰했다. 비애감이 가득한 인터뷰였다. 랑헬은 먼저 차베스에게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고 물었다. “체제전복주의자”라고 차베스가 대답했다. 그 다음 랑헬은 셰익스피어 비극 ‘줄리어스 시저’에서 마크 앤터니(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대사 “사람이 저지르는 죄악은 그들이 죽은 뒤에도 남지만, 선행은 그들의 뼈와 함께 묻혀 버리는 경우가 많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차베스는 곰곰히 생각한 뒤 “할 수 있을 때 선행을 베풀면 무언가는 남는다”고 대답했다. 그런 다음 그는 국민을 위해 죽음에 저항하는 이야기를 했다. 랑헬이 권력의 의미를 묻자 차베스는 니체의 말을 빌려 권력의 정수는 살아남으려는 의지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내가 비록 병에 걸렸지만 국가에 계속 봉사하기 위해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차베스는 ‘살아남으려는’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이런 아리송한 대화가 이어지다가 랑헬이 10월 실시되는 대선에서 이긴다면 무슨일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차베스는 군사적 은유를 동원해 이렇게 대답했다. “후위의 문에 빗장을 질러 후퇴를 막겠다.” 그가 권력을 잡기 전으로 돌아가는 사태를 막겠다는 뜻이었다. “후퇴는 끔찍한 일이다.”
후계자로 지명된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은 차베스의 유훈을 이행할 권한을 부여 받았다. 베네수엘라에 사회주의가 뿌리 내리도록 혁명에 박차를 가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이상향이 차베스가 휘두른 철권 통치 없이 번창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쿠바에서는 이미 시들해지고 있지 않은가?
지난해 12월 아바나로 떠나기 전 차베스는 TV로 방영된 메시지에서 마두로에게 대통령직을 맡긴다고 선포했다. 또 지지자들에게 자신이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면 헌법에 따른 선거에서 마두로를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메시지를 전한 후 차베스는 다시는 공개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고 마지막 정치 유언이나 증언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도 않았다.
차베스의 죽음과 세 달에 걸친 치열한 미디어 전쟁의 여파로 지금 베네수엘라는 혼란에 빠졌다. 차베스가 네 번째 임기에 취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는 마두로는 나라를 통치할 명확한 권한을 위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국경너머의 상황은 다르다.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도자들이 차베스의 혁명 감투를 빼앗을 태세다. 에콰도르의 사회주의 지도자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우리 각자는 모두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지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은 없다”고 코레아는 아바나에서 차베스를 문병한 직후 말했다. “병이 위중해서 그가 계속 키를 잡을 수 없다고 해도 혁명은 계속 돼야 한다.” 차베스가 없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까?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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