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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어긋난 모험 - 기자의 눈으로 본 이라크전

미국의 어긋난 모험 - 기자의 눈으로 본 이라크전

뉴스위크 편집부의 시점에서 10년 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회고한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기 며칠 전 국방부에 불려갔다. 미국의 다른 주요 뉴스매체 선임 편집자들과 함께 소환됐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대변인 빅토리아 클라크의 메시지는 엄격하고 명확했다. 바그다드 폭격이 곧 시작되니 현지에 파견된 특파원들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회의장을 나서면서 정부에 조종당하는 느낌과 불확실한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현장에 기자들이 있는 걸 국방부가 원치 않는데는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반면 워싱턴과 뉴욕의 사무실에 앉아서 진짜 위험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무리 중요한 스토리라고 해도 우리 기자 중 한 명의 목숨과 맞바꿀 만큼 가치가 있겠는가?

뉴스위크의 경우엔 바로 멜린다 류 기자가 그 당사자였다. 우리 잡지에서 가장 경험 많은 해외 특파원으로 손꼽혔다. 멜린다는 세계 각지의 분쟁과 쿠데타를 취재했으며 마닐라에선 취재 중 총상을 입기도 했다. 전쟁전에 다른 특파원을 철수시켰지만 멜린다는 그냥 버텨보도록 허용했었다. 하지만 이제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뉴스위크 워싱턴 지국장이었던 나는 국방부의 메시지를 멜린다에게 전달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남겠다고 완강히 버텼다. 팔레스타인 호텔은 충분히 안전하다고 여겼다. 미국의 주요 공격목표인 정부 부처와 주요 군사시설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라크 철수 명령은 더 높은 곳에서 내려왔다.

당시 뉴스위크 소유주였던 워싱턴 포스트사의 CEO 도널드 그레이엄이 전화를 걸어 멜린다를 철수시키기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명령을 하달하는 책임이 리처드 스미스 뉴스위크 회장 겸 편집국장에게 떨어졌다. 멜린다는 펄펄 뛰었다. 그녀가 왜 지난 두 달 동안 세계에서 가장 극악무도하기로 손꼽히는 정권 아래서 지냈는가? 전쟁 취재를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결국 철수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사직서를 제출하겠다고 덧붙였다.

결국 그런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다. 멜린다는 전쟁의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 정보부로부터 출국 비자를 받지 못했다. 증빙서류없이 육상으로 이라크를 빠져 나오려는 시도는 너무 위험했다. 남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 본사에선 모두 멜린다의 안전을 걱정했다. 한편으론 그런 크고 중요한 스토리를 프로인 멜린다가 맡게 되어 안심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바그다드에 남은 유일한 시사잡지 특파원이던 멜린다는 사직하는 대신 취재에 착수했다.

다음 날 저녁 폭탄이 투하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호텔 발코니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지켜봤다. 아이맥스 상영관의 제일 앞

줄에 앉아 전쟁 영화를 관람하는 격이었다. 그녀는 뉴스위크에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진홍색 불덩어리와 이라크의 예광탄 불빛으로 밤하늘이 고동쳤다. 충격으로 호텔 천장의 벽토가 떨어졌다. 2층에서 지켜보는 동안 강변의 정부 건물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그날 밤 멜린다는 짤막하게 나눠 집중적으로 기사 파일을 작성해 보냈다. 호텔이 폭격을 받거나 전력공급이 중단될 경우의 예방조치였다. 뉴욕에선 편집자들이 그녀의 취재파일들을 훌륭한 일기로 엮어냈다. 후세인 생애 마지막 날들의 극적인 단면들뿐 아니라 전쟁이 도시를 뒤덮으면서 확산되는 무질서와 공포를 생생하게 포착했다.

전쟁은 기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극단적인 환경이다. 득 또는 실이 너무 크기 때문에 특히 어려운 선택을 던져준다. 기자들은 자신의 안전(그리고 정보원의 안전)과 중대한 사건 취재의 필요성 간에 균형점을 찾아야한다. 가장 긴장된 상황과 진실을 종잡기 어려운 시점에서 한편으로 정부에 조종당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국 국민으로서의 책임감과 진실을 모색하는 기자로서의 사명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전혀 명확하지 않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기자들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는 미군이 쿠웨이트에서 북쪽으로 진격할 동안 지상작전을 어떻게 취재하느냐였다. 대다수 기자는 미군 부대에 배속됐다. 로드 노들랜드는 뉴스위크의 전쟁지역 취재를 총괄했다. 그는 기자들이 부대와 함께 이동하면 그만큼 시야가 좁아진다는 점을 우려했다(1차 걸프전 때 뉴스위크의 레이 윌킨슨은 사막 야영지에서 3개월 동안 미군 부대와 함께 발이 묶여 있었다).

그래서 스캇 존슨을 어떤 부대에도 배속되지 않은 독립취재기자(unilateral)로 내보냈다. 물론 뉴욕편집자들의 허락을 받았다. 스캇과 프랑스인 사진기자 루크 델라하예는 사막지대의 국경에 숨어 있다가 3월 21일 이라크로 건너갔다. 파제로 SUV를 몰고 제3해병원정여단과 나란히 이동했다. 해병대가 돌아가라고 했지만 그들은 그 명령을 무시했다. 대신 오프로드로 사막을 가로질러 바그다드로 전진하는 제3보병사단을 만났다. 일단 대규모 미군 행렬을 따라잡자 그들은 미지의 이라크 땅으로 달려나가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뉴스위크 뉴욕 본사 뉴스 데스크에 한 미군 병사가 전화를 걸어 왔다. 스캇의 파손된 SUV와 그의 위성 휴대전화가 미군에 발견됐다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스캇의 흔적은 없었다. 마크 휘태커 뉴스위크 편집장은 자신의 기자 생활 중 가장 어려웠던 순간 중 하나로 회고했다.

스캇이 이라크군에 생포되거나 살해됐을까? 그날 아침 늦게 델라하예와 연락이 닿았다. 스캇이 아직 실종 상태라고 했다. 마침내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연인즉 차를 몰고 달려가다가 매복 중이던 이라크 병력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속력을 높여 달아나려다가 자동차가 뒤집어지면서 가로등을 들이받았다. 결국에는 지나가던 미군 수송대에 구조됐다.

다음날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저편에서 빅토리아 클라크가 노발대발했다. 군대가 정한 언론취재 규칙을 스캇이 묵살했다고 그녀는 격노했다. 우리 특파원 중 한 명을 거의 죽일 뻔했을 뿐 아니라 작전을 중단하고 스캇을 구해야 했던 미군 병사들도 위험에 빠뜨렸다고 나를 나무랐다.

국방부가 또 다시 언론의 고삐를 조이려 하는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뉴스위크에서 가장 현장 경험이 많은 특파원인 노들랜드도 스캇과 델라하예에 화를 냈다. 그들은 어리석게 자신들이 취재하는 부대를 앞서 가는 실수를 범했다. 그래서 이라크 병력과 맞닥뜨리게 됐다고 노들랜드는 지적했다. 그 때문에 독립 취재기자들이 욕 먹게 될 판이었다.

한편 군 당국은 전쟁 역사상 가장 정교하다고 손꼽히는 배속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언론이 이번 전쟁을 더 실감나게 취재할 기회라고 국방부는 선전했다. 기자들이 군인의 관점에서 전쟁을 보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많은 기자들(미디어 비평가는 물론) 이 그 저의를 의심했다. 군부가 언론보도를 통제하는 한 방편이 아닌가 우려했다.

전략적 커뮤니케이션(군대 용어로 Stratcom)이 국방부의 주요 중점과제가 됐기 때문이다. 군대 내에서 언론 탓에 전쟁에서 “졌다”고 여기는 베트남전의 잔재였다. 이라크 주둔군에 배속되는 건 여느 출입처 취재와 다름없었다. 정보를 차단당하지 않기 위해 (의식적이든 아니든) 유혹을 받거나 기사내용을 미묘하게 바꿀 위험이 항상 따랐다.

그러나 노련한 기자들은 그런 혜택을 이용해 위축되지 않고 보도했다. 케빈 페라이노는 제3보병사단의 찰리록 중대에 배속됐다. 바그다드 국제공항 장악 임무를 맡은 부대였다. 페라이노의 흥미진진한 취재 파일은 전쟁의 인간적이면서 때로는 진부한 측면을 포착했다. 무료함, 더러움, 고약한 냄새, 그리고 간헐적인 실수뿐 아니라 영웅주의와 개성의 표출 등. 전쟁터에선 남성 호르몬 넘치는 젊은 남성들이 전투 태세를 갖추고 긴장한 상태로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다.

페라이노는 때때로 벌어지는 장난기와 기강해이를 기록하기도 했다. 한 번은 찰리록 중대의 몇몇 사병이 활주로에 세워진 비행기를 장난 삼아 폭파했다. 페라이노가 그 일과 관련된 취재 파일을 보냈다. 그들은 그 기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여전히 부대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어색한 상황이 됐다. 장교 중 토드 켈리 대위가 그의 등을 두드리며 그 기사를 칭찬해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진실은 냉혹하다”고 켈리가 말했다. 상무장관을 지낸 애버럴 해리먼이 언젠가 로버트 F 케네디 대통령에 관해 한 말이었다.

하지만 기자와 군인 사이가 항상 긴장관계는 아니었다. 전쟁에는 기본적으로 종종그들을 하나가 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다. 해머를 손에 든 이라크인들이 미군들의 도움으로 후세인 동상을 넘어뜨리던 날 멜린다도 피르도스 광장에 있었다. 그 장면은 전세계로 전송돼 부시 정부를 기쁘게 했다(훗날 그 에피소드는 논란의 대상이 됐다. 군부가 PR 효과를 노려 연출한 이벤트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멜린다는 어둠이 깔릴 무렵 일단의 해병대원들을 만났다. 그들이 바라는 건 오로지 고국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전화 통화뿐이었다. 특히 가족에게 급한 일이 생긴 병사도 있었다. 그들을 자신의 호텔로 초대해 위성전화를 빌려줬다. 통화가 끝난 뒤 멜린다는 그들에게 참치 캔과 보드카를 권했다(그들은 그것을 승리의 건배로 불렀다). 알고 보니 그들은 후세인 조각상을 파괴하려던 이라크인들에게 해머와 로프를 건네준 해병대원들이었다.



전쟁의 시각적인 기록은 또 다른 딜레마를 안겨줬다. 사진은 시사지들이 경쟁 매체에 비해 여전히 우위를 점하는 한 영역이었다. 뉴스위크는 여러 차례 충격적이고 때로는 소름 끼치는 사진을 게재하기로 했다. 전쟁의 인간적 비극을 실감케 하는 이미지들이었다. 특히 사진기자 크리스 혼드로스(그 뒤 리비아에서 숨졌다)가 찍은 사진 한 장은 특히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2005년 1월 18일 땅거미가 질 무렵 혼드로스는 저항 세력의 거점인 텔 아파르에 있었다. 자동차 한 대가 미군 검문소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신경이 곤두선 군인들의 정지 명령을 일순의 혼란 속에서 운전자가 듣지 못했다. 군인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일가족 8명이 차 안에 있었다. 부모는 즉사하고 여러 명의 아이가 끔찍한 부상을 입었다. 뉴스위크에는 다섯살배기 사마르 하산의 사진이 실렸다. 엄마와 아빠의 피로 범벅이 된 채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대는 모습이었다.

기자들에게 가장 중대한 선택 일부는 전쟁 전에 이뤄졌다. 원칙적으로 언론은 회의적인 시각에서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2002년과 2003년 초 언론이 그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는 비판은 대체로 타당하다. 특히 후세인이 과연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느냐는 문제뿐 아니라 불안정한 지역의 주요 국가를 침략해 점령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이냐는 문제와 관련해 비판적인 시각이 적었다.

팔은 안으로 기우는 법이지만 나는 뉴스위크가 대다수 다른 매체보다 나았다는 판단이다. 중동 담당 편집자이자 파리 지국장인 크리스토퍼 디키는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다. 9·11 이후 몇 일 몇 주 동안 미국 정부가 이라크를 향해 무력시위를 시작하는 거의 그 순간부터였다. 그는 공격 개시 몇 주 전 ‘승리의 위험(The Perils of Victory)’이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 침공 이후 이라크는 반짝이는 귀감이 되기는커녕 입실은 할 수 있어도 퇴실은 하지 못하는 바퀴벌레 모텔(살충제)과 더 비슷해질 전망이다.”

부시 정부는 후세인 정권이 알카에다와 깊이 연계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탐사보도 기자 마이클 이시코프는 그 주장의 허구성을 드러냈다. 일련의 기사를 통해 9·11 비행기 납치범 모하메드 아타와 프라하 주재 이라크 요원이 만났다는 주장을 철저히 해부했다. 다른 기사에서는 부시 정부가 내세우는 첩보의 허점을 파헤쳤다.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WMD)를 보유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첩보였다. 마크 호센볼과 에반 토마스의 기사는 아메드 찰라비를 “엉터리 약장수(snake-oil salesman)”로 묘사했다. 이라크 망명자인 그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총아이자 부시 정부의 주요 정보원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과실이 없지는 않았다. 그 중 한 가지는 특히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훌륭한 특종을 손에 쥐고도 가볍게 다뤘기 때문이다. 전쟁 한 달 전 국방부 출입기자 존 배리가 돌이켜 생각컨대 대어를 낚아올렸다. 1995년 후세인 카멜 알-마지드가 요르단으로 망명했다. 후세인의 사위 중 한 명이자 이라크의 WMD 병기고를 감독하는 군사 위원회 책임자였다. 망명 후 서방 정보기관과 유엔 무기 감독관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정보를 불었다.

1차 걸프전 이후 이라크가 보유하던 WMD를 모두 파괴했다고 카멜이 수사관들에게 말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한 달 전 배리 기자가 그 정보를 입수했다. 뉴스위크는 그 정보를 잡지 앞쪽 부근에 모호한 제목을 달아 단신으로 처리했다. 거의 반응이 없었다(CIA의 한 대변인이 당시 그 보도를 “부정확하고 날조되고 틀렸으며 사실이 아니다”며 격렬하게 반박했다).

언론의 WMD 보도가 왜 미흡했을까? 우선 부정명제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에반 토마스는 회의적인 관점의 결여 원인으로 또 다른 이론을 제시했다. 자신을 비롯한 워싱턴의 기자들이 가벼운 전쟁 열병에 걸렸었다는 설명이다. 기자들도 인간이며 9·11은 그들이 취재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많은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거의 본능적인 복수심이 일었다. 애국심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물론 공정하면서도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도했다면 더 애국적이었겠지만 말이다). 이 같은 심리가 기사의 내용은 아니더라도 논조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이 지루하게 진행될 동안에도 뉴스위크는 취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워싱턴에서는 전쟁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부시 정부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왜곡된 정보를 밀어붙였는지 취재했다. 이라크에선 특파원들이 2007년까지 맹렬히 전개됐던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저항을 기록했다. 뉴스위크는 바그다드 지국 유지비로 1년에 무려 100만 달러를 지출했다. 언제나 폭력사태가 미군 요원뿐 아니라 이라크인들에게 미치는 인적 피해를 중점 보도했다.

2007년 존 미챔 뉴스위크 편집장은 전쟁의 구술 기록을 제작하고자 했다. 전쟁터에서 산화한 미국인들의 편지와 이메일을 통해 그 스토리를 전하기로 했다. 그들의 서신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일은 어마어마한 작업이었다. 이브 코넌트도 다른 많은 기자들과 함께 슬픔에 젖은 가족들로부터 편지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그 가슴 아픈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 인간에게는 타고난 공감 능력이 있다. 기사 마감시한, 야근 작업, 그리고 시끄럽게 울려대는 다른 전화도 그것을 방해하지 못한다.” 전체적으로 그 ‘전사자들의 목소리(Voices of the Fallen)’ 호는 인간의 가장 광범위한 전쟁 경험을 포착했다. 세속적으로부터 비극적인 측면까지, 유머러스한 내용부터 절망적인 부분까지 모두 망라했다. 돈 그레이엄은 75년에 가까운 뉴스위크 역사상 최고의 이슈라고 평했다.

뉴스위크는 이라크에 가장 많은 취재 인력을 파견한 뉴스 매체 중 하나였다. 따라서 항상 안전이 주요 관심사였다. 대규모의 이라크인 현지 스태프를 포함해 우리 기자들의 안전을 노들랜드보다 더 부지런히 챙긴 사람은 없었다. 전쟁이 질질 끌게 되면서 갈수록 젊은 신참 기자들에게 의존하게 됐다.

노들랜드는 특히 그런 기자들에게 형님 같은 역할을 했다. 그는 젊은 기자들의 부모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뉴스위크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안심시켰다. 그는 지국을 그린존(안전지대) 안으로 이동시키는 논란 많은 결정을 내렸다. 대다수 다른 미국 매체들은 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그 지역 바깥쪽에 그대로 남았다.

결과적으로는 그린 존 안에서 유일한 미디어 구역이라는 점에서 안전 이상의 이점이 있었다. 뉴스위크 본부가 외교관, 군 관계자, 정보원들의 피난처가 됐다. 자신들의 근무지보다 더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낼(그리고 더 자유롭게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결국 노들랜드의 결정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인이든 이라크인이든 단 한 명의 뉴스위크 직원도 살해되거나 중상을 입지 않았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기록”이라고 노들랜드가 최근 카불에서 이메일로 답했다. 그는 현재 뉴욕타임스 특파원으로 일한다.

2007년 래리 카플로가 바그다드 주재 뉴스위크 특파원이 됐다(전에는 칵스 뉴스페이퍼스사 소속이었다). 이라크에서 가장 오랫동안 연속 근무한 미국인 기자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얻을 수 있는 결실의 한계를 묘사하는 표현이 미국 군인과 외교관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충분히 이라크다운(Iraqi good enough)’이라는 그 표현이 2009년 카플로의 귀에 꽂혔다. 최악의 유혈사태는 끝났지만 가까운 장래에 안정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현실적인 인식이었다.

카플로가 그 표현을 디딤돌 삼아 이라크 전쟁을 취재하던 시절의 회고 기사를 뉴스위크에 썼다. 그 기사는 시사지 저널리즘의 진수였다. 어긋난 미국의 모험을 둘러싼 대단히 슬픈 시대정신의 스토리를 전했다. 지난 3월 중순 바그다드에서 조직적인 자동차 폭탄테러가 잇따라 발생해 최소 18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 표현과 카플로의 기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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