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periscope PERSONS OF INTEREST - 뉴스위크 화제의 인물

periscope PERSONS OF INTEREST - 뉴스위크 화제의 인물



‘큰 호랑이’ 우리에 갇히다 -

중국 전 중앙정치국 위원 보시라이, 부패와 권력남용죄 등으로 무기징역 선고 받아중국 법원은 한 달 동안의 숙고 끝에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충칭시 당서기였던 보시라이의 변론 대부분을 기각하고 그에게 부패, 횡령, 권력남용죄로 무기징역과 정치권리 종신박탈, 전 재산몰수형을 선고했다. 선고가 내려진 법원 주변은 무장 경찰 수백 명이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재판정에서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던 보시라이는 선고가 내려진 뒤 수갑을 차고 교도소로 향했다. 이번 선고로 그는 아내 구카이라이의 전철을 밟게 됐다. 구카이라이는 지난해 경제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영국인 사업가를 독살한 죄로 사형유예를 선고 받았다. 보시라이는 아내의 범행을 은폐한 혐의도 받았다.

얼마 전 해외 중국어 웹사이트에 보시라이의 선고 예정일을 누설한 한 소식통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보시라이 선고를 앞두고 합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전했다. “중국 고위 지도부가 극심한 국론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정치 스캔들에 종지부를 찍고 인민의 신뢰를 되찾으려고 애썼지만 이번 선고는 분열의 골을 더 넓혔놓았을 뿐이다.”

보시라이 재판과 관련된 정치적 분열은 최근 관영 언론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정부가 운영하는 신문과 웹사이트는 보시라이를 “증거가 넘쳐나는데도 자신의 죄를 교활하게 부인하는 부패분자”로 부르며 맹비난했다. 반면 공산당 이념지 치우시는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당의 노력을 찬양하는 논평을 실었다.

‘공동 번영’은 보시라이가 당서기로서 충칭시에서 추진한 포퓰리스트적 사회정책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구호다. 그 논평을 쓴 인물은 보시라이를 “용감한 국가 영웅”이라고까지 불렀다. 앞으로 공산당 선전부가 이번 선고를 지지하는 언론 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이번 선고는 보시라이 반대파의 승리로 간주됐다. 그들은 보시라이가 충칭시 당서기로 재직하는 동안 범죄 퇴치라는 명분으로 수천 명의 관리와 사업가들을 박해했으며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재했다고 지적하며 그를 “큰 호랑이” 또는 “무자비한 기회주의자”로 불렀다. 그들은 보시라이에게 사형유예 선고가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지난 8월 재판 과정에서 보시라이가 비협조적이고 재판부에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더 가혹한 형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보시라이는 재판 과정에서 이전의 자백을 번복하며 모든 혐의를 격렬히 부인했다. 또 그는 공산당 반부패기구의 자백강요와 협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번 선고로 보시라이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더 늘어날 뿐 아니라 그의 기존 지지자들로부터 더 큰 반발도 예상된다. 그의 지지자 중 다수는 태자당이다. 고위 당간부의 유복한 아들로 보시라이의 마오쩌둥식 사회복지정책으로 많은 혜택을 입은 인물들을 가리킨다. 일부는 그의 석방이나 15년 이내의 징역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들은 보시라이가 정치 권력투쟁의 희생자이며 그를 실각시킨 사람들이 더 부패했다고 믿는다. 보시라이를 지지하는 한 충칭 시민은 BBC 방송에 “관리 중 깨끗한 인물이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모두가 부패했다. 그런데 보시라이만 처벌하는 게 옳으냐?”

뉴욕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법률학자 천샤오핑은 이번 선고로 보시라이의 재기 기회가 영원히 사라졌으며 앞으로 법정에서 기소에 불복하며 저항하는 관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보시라이 지지자들은 그가 사형을 면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고 2~3년 안에 치료 목적의 가석방을 받을 것으로 예측한다고 천은 말했다. “보시라이는 비록 정치무대에서 쫓겨났지만 반체제 인사로 정치적 상징이 될 것이다. 그의 지지자들이 그를 떠받치고 새 지도부의 정책에 계속 저항할 것이다.”

또 천은 보시라이의 유산이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새 지도부는 지난 9개월 동안 정치적으로 좌익 성향과 더 엄격한 정책을 선호하며, 보시라이가 주창한 것과 비슷한 마오쩌둥식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대중은 비공개로 진행되는 속결 재판에서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당에 사과하는 TV 장면을 보는 데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에게 법원의 마이크로블로그로 일부가 생중계된 보시라이의 5일간 재판은 눈이 뻔쩍 뜨이는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중국 인민대의 허지아홍 교수는 국영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재판 절차를 중계하기로 한 법원의 결정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투명한 재판을 추구하려는 의사결정권자의 결단과 보시라이 사건을 독자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법원의 자신감이 반영된 결과다.”

그러나 재판 과정이 편집되고 선별적인 장면만 중계됐기 때문에 생중계라는 개념에 의문을 표한 사람이 많았다. 법원은 보시라이를 향한 동정심을 유발하고 고위 지도부에 불리할 수 있는 세부사항을 제외시켰다. 예를 들어 심문과정에서 당의 반부패 기구로부터 자백을 강요 받았고 위협당했다는 보시라이의 진술은 공식 기록에서 빠졌다.

뉴욕 시립대 퀸스 칼리지의 교수 순얀은 이렇게 말했다. “부분적인 생중계는 여론을 조종하고 재판부의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의도다. 대중이 처음부터 그 재판의 기본 전제에 의문을 가졌기 때문이다. 당 지도부가 법원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정적의 숙청을 정당화하려고 부패 혐의를 씌운다고 믿는 중국인들이 많다.”

베이징의 한 언론인은 전화 인터뷰에서 언론이 보시라이의 진술에서 전후 관계를 무시하고 일부만 발췌해 보도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자신의 아내와 왕리쥔 전 충칭시 공안국장이 불륜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한 보시라이의 언급이 대표적인 예다. “그 언급은 정치 스캔들을 부패와 불륜의 코미디로 바꿔 놓았다.”

중국 정부는 법원의 마이크로블로그 생중계를 사법 투명성을 지향하는 긍정적인 발전으로 치켜세우면서 반대 견해를 억누르기 위해 온라인 ‘소문 퍼뜨리기’의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고 있다. 얼마 전 중국 최고법원은 5000명 이상이 열람하고 500차례 이상 재전송된 소문을 게시하는 블로거는 기소대상이라고 선언했다. 최근 중국 북서부 간쑤성의 공안당국은 한 청소년을 ‘사회질서를 혼란시킨’ 혐의로 구금했다. 그 청소년은 마이크로블로그에서 자신이 사는 도시에서 일어난 의문사 문제를 제기했다.

한편 중국 지도부는 보시라이의 측근인 고위 관리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수년 동안 국영 석유회사를 운영해온 장제민도 뇌물수수 등의 비리 혐의로 조사 받고 있다. 장제민은 중국 석유방(석유산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정치세력)의 거물로 국유자산감독 관리위원회 주임이었다. 최근에는 중국의 정보를 총괄하는 정법위원회 서기를 맡았고 보시라이의 오른팔인 저우융캉의 자녀가 부패척결의 일환으로 구금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현재로선 보시라이가 수감생활을 잘 해낼 각오가 돼 있는 듯하다. 충추절 직전 보시라이가 친척들에게 쓴 편지가 해외 언론에 보도됐다. 그 편지에서 보시라이는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썼으며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썼다. “그동안 나는 감옥에서 조용히 지내겠다. 부친도 수 차례 투옥됐다. 나도 부친이 걸은 길을 간다. 어떤 어려움도 견뎌내겠다. 모친의 사진을 침대 머리 맡에 붙여 놓았다. 내 곁에 어머니가 계시니 난 외롭지 않다.”

보시라이의 부친은 지난 2007년 99세로 사망한 보이보 전 부총리다. 17세 때 공산당에 가입한 보이보는 베이징대에 입학하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의 길로 뛰어들었다. 1931년 그는 다른 60명의 공산당원과 함께 체포되어 8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수감됐다. 부자(父子)의 인생유전일까?

— WENGUANG HUANG , PIN HO



수수께끼의 미소 -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그는 과연 무엇을 원할까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뒤 이란에서 국제사회에 희망을 주는 인물이 두 번 등장했다. 첫 인물은 1997년 대통령에 선출된 개혁주의자 무함마드 하타미였다. 그는 8년 동안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늘 미소를 띠고 개혁을 추진하며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두 번째 인물은 하산 로하니다. 그는 2013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로하니도 하타미처럼 늘 미소를 짓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의 전임자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고약한 성미에다 내키는 대로 말을 쏟아냈다. 그의 뒤를 이은 로하니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종교학자 출신인 로하니는 국왕의 통치에 반대했다. 그는 이슬람 혁명을 이끈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추종자였다. 1960년 셈난 수도원에서 종교학을 공부했고, 1972년 테헤란대에서 법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6년 뒤 30세의 나이로 런던에 가서 영어를 배웠다. 당시 이란에선 사회적 소요가 극심했고 1년 뒤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회고록에 따르면 로하니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공부하려했지만 이란 내부 상황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그는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글래스고 칼레도니안대 대학원에 다녔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이란의 현실에서 이슬람 율법 샤리아가 갖는 융통성’이었다.

1980년대에 로하니를 처음 만난 이란 외교관 아볼파즐 메라바디는 “그는 아주 진지하고 근면했다”고 말했다. 이란 성직자나 관리들은 서방이 부패했다고 생각했지만 로하니의 시각은 달랐다. 메라바디는 “로하니는 서방을 잘 이해했고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했다”고 말했다. “올해 대선후보자 토론에서 로하니가 민주주의 원칙을 이야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개혁을 염원하는 이란인들에게는 좋은 조짐이다. 최근 로하니는 개인적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엄단하는 최정예이란혁명수비대(IRGC)에 정치개입을 자제하라고 촉구했다.

로하니를 잘 아는 온건개혁파 지도자 골람후세인 카르바시 전 테헤란 시장은 “로하니는 이란의 정치세력 중에서 극단주의를 제어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카르바시는 “절제력, 합리성, 설득력”이라는 세 단어로 로하니를 규정한다.

“또 외관을 중시한다”고 카르바시는 말했다. 언변도 탁월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로하니는 농담과 유머로 상대방을 압도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논리적으로 말한다.” 정책과 분석에 정통한 로하니는 이란 국정조정위원회가 설치한 전략국제연구소 위원으로 발탁됐다.

그 조직에서 로하니와 함께 일했던 마수드 사피리는 그가 늘 정중했고 회의 중 욕설을 삼갔다고 말했다. TV 편성과 관련된 한 회의에서 로하니는 종교적인 원칙보다는 통계와 조사 자료를 제시했다. “다수가 동의하면 나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그가 말했다.” 사피리는 로하니가 서방과의 긴장 완화를 이야기할 때 실용적이었다고 돌이켰다.

러트거스대 교수로 미국 이란위원회 대표인 후샹 아미라마디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관점에서 그는 온건 우파다. 그는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선호한다. 예를 들어 미국과 중국 중에서 한 나라를 선택하라면 그는 미국을 택한다.”

아미라마디는 로하니가 대통령에 선출됐다는 것은 이란의 변화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이젠 이슬람 혁명이 시들해졌고 과거의 혁명 게임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은 로하니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아미라마디는 말했다. “그는 늘 그림자 속에서 움직였다.”

로하니는 겉보기에 늘 상냥하고 예의 바르지만 속은 다를 수 있다고 전 이란 내무부 관리 자한바크시 칸자니가 말했다. “로하니에게는 숨겨진 내면이 있다.” 그가 무엇을 중시하고 원하는지 예측하기가 더 어렵다는 뜻이다.

— OMID MEMARIAN



엄마표 리더십의 위력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실용과 통합 추구하는 노선으로 3선에 성공9월 22일 실시된 독일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기민당(CDU)-기사당(CSU)이 압승을 거두면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59)의 3선 연임이 확정됐다. 옛 동독 출신으로 2005년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최연소 총리에 올랐던 메르켈은 2017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할 경우 유럽에서 최장수 여성 총리(12년 재임)가 된다. 지금까지 유럽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여성 최고위 지도자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11년 재임)다.

이번 독일 총선은 ‘엄마 정치인’ 메르켈에 대한 신임투표였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그녀의 신중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정치를 말한다. 메르켈의 선거운동은 TV 토론에서 그녀가 말한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었다. “걱정 마세요,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어요.”

메르켈은 기민당의 쇠락을 역전시켰다. 기민당의 득표율은 2005년 35.2%, 2009년 33.8%로 점차 낮아졌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기민당은 42%의 득표율을 올려 연정을 지배하게 됐다. 사실 메르켈은 기민당을 권력 기반의 보호벽으로 간주할 뿐이다. 전임자 헬무트 콜과는 상당히 다른 접근법이다. 콜은 기민당을 거의 가족의 연장으로 간주했다.

메르켈은 할리우드 글래머 같은 매력을 갖진 않았다. 그런 연기를 할 생각도 없다. 독일의 재통일을 이룬 콜과 달리 메르켈은 정치를 역사적인 대단한 운동으로 보지 않는다. 성장 배경부터 정치적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린 시절 메르켈은 동독의 공식이념과 실상 사이의 격차를 잘 알았다. 또 1989년 사회주의 국가 동독의 내부적 붕괴도 경험했다.

동독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 중요한 생존 전략이었다. 지능 높은 자연과 학자인 메르켈은 그런 능력을 활용해 진보파 도전자들을 물리치고 정치인이 됐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과소평가했다.

메르켈의 정치관은 자유주의적 보수파 사상가인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의 생각과 유사하다. 기업과 사회의 원활한 작동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라면 원대한 비전을 강요해 안 된다는 생각이다. 메르켈은 다양한 제도와 단체, 그리고 변화하는 세력, 의도치 않은 결과와 새로운 사건들이 혼합된 세계와 씨름을 하는 것을 정치로 간주한다.

견제와 균형이 철저한 독일 정치에서 메르켈은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정책을 수립했다. 연합을 구축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말한다. 반대파가 메르켈에겐 비전이 없다고 주장할 정도다. 최근 작고한 전기작가 게르트 랑구트에 따르면 메르켈의 내면 나침반은 특정한 연정의 지속을 겨냥했다.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의 대연합을 말한다. 이제 그것이 새로운 연정의 행태가 될지 세계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메르켈은 사민당 총리였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추진한 가혹한 개혁의 덕을 많이 봤다. 독일의 중소기업과 ‘히든 챔피언(강소기업)들의 혁신이 독일 경제의 실질적인 견인차였다. 그러나 지금 유럽은 독일의 시대다. 독일 정치인들의 행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번 총선은 모든 사람이 문제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이슈를 회피했다. 유럽연합(EU)의 미래를 말한다. 독일 유권자들은 그 문제를 메르켈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다고 믿고 맡긴 셈이다.

앙겔라 메르켈이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여부가 역사에서 그녀의 입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메르켈이 원대한 비전을 따를 가능성은 없다. 동독 브란덴부르크의 시골 마을 템플린 출신인 기독교 신자 메르켈은 자신 앞에 놓인 복잡한 정글 같은 정치판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권력 기반을 유지하면서 하나씩 차례로 문제를 다뤄나가는 방식이다. 때로는 그런 과정에서 역사가 만들

어진다.

— DR. HEINRICH MATTHEE



중앙은행을 호령할 여제? -

재닛 옐런 FRB 부의장, 차기 의장 유력 후보로 떠올라래리 서머스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경제학자다. 하버드대 총장, 재무장관, 백악관 보좌관, 만능 천재 등…. 그런 그가 9월 23일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후보에서 공식 사퇴했다. 상원의 공화당과 민주당이 전부 반대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서머스는 “인준 청문회에서 격한 험담이 오가게 되는 상황”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사퇴의 변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FRB 의장 후보로 가장 유력시됐던 그가 사퇴하면서 이제 재닛 옐런이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사실 FRB 의장직은 세계에서 가장 힘만 들고 생색이 나지않는 자리 중 하나다.

옐런이 FRB 의장 후보군에서 선두주자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진보파와 월스트리트 둘 다를 만족시킬 만하다.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킨 경우는 역사적으로 아주 드물었다. 서머스가 사퇴하고 옐런이 떠오른다는 소식에 주식시장이 반등했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옐런을 FRB 의장에 지명하라고 촉구하는 편지에 서명한 400여 명의 경제 전문가들(대부분 중도 좌파)은 반색했다.

옐런은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스타 경제학자가 아니다. 그녀는 앨런 그린스펀(이념가이자 정치적 조정자)이나 폴 볼커(허세가많은 금융가이 정부 관리) 같은 전임자보다는 늘 조용하고 신중한 학자인 버냉키 현 FRB 의장에 더 가깝다.

하지만 옐런에겐 좌익이 매력을 느낄 만한 측면이 많다. 1967년 브라운대를 졸업했고 1971년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하버드와 캘리포니아대(버클리)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남편 조지 애컬로프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진보파 거물이다. 그들은 함께 노동시장에 관한 논문을 집필했다.

옐런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잠시 FRB 이사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2004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 총재로 지명됐고, 2010년에는 워싱턴으로가서 FRB 부의장을 맡아 버냉키 의장을 보좌했다.

근년 들어 FRB는 시장에 개입하고 채권을 대규모로 매입함으로써 미국 경제를 파국에서 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양극화를 초래하는 정치세력으로 떠올랐다. 보수파는 돈을 찍어내는 FRB의 양적완화 정책을 질색한다. 반면 진보파는 FRB가 고용에는 신경 쓰지 않고 인플레이션 잡기에만 매달린다고 멘소리를 낸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금융사들은 채권 매입으로 경기를 부양하려는 FRB의 노력을 환영했다. 기업들로선 금리 억제가 재였다. 그들은 거의 무이자로 융자를 받을 수 있다. 채권을 샀지만 수익성이 너무 떨어져 좌절한 투자자들은 현금을 주식에 투자했다. 월스트리트의 관점에선 옐런이 서머스보다 그런 경기부양책을 지속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월스트리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나 중도파도 옐런의 부상을 좋아할지 모른다. 중앙은행 책임자를 맡는 인물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만 지금까지 전임자들에게서 보기 드물었던 선견지명이 그녀에게는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경제위기는 규모와 강도에서도 전례가 드물었을 뿐 아니라 그린스펀이나 버냉키 등 전임 FRB 의장들이 예견하지도 못한 재앙이었다. 반면 옐런은 일찍이 2005년에 부동산 거품을 경고했다. 그녀의 지지자들은 그런 점을 높이 산다.

— DANIEL GROSS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업무효율 저하 부담에…대기업 10곳 중 3곳만 60세 이상 고용

2尹대통령 내외 사리반환 기념식 참석…"한미관계 가까워져 해결 실마리"

3 대통령실, 의료계에 "전제조건 없이 대화 위한 만남 제안한다"

4이복현 금감원장 "6월 중 공매도 일부 재개할 계획"

5정부 "80개 품목 해외직구 전면차단 아니다…혼선 빚어 죄송"

6 정부 'KC 미인증 해외직구' 금지, 사흘 만에 사실상 철회

7"전세금 못 돌려줘" 전세보증사고 올해만 2조원 육박

8한강 경치 품는다...서울 한강대교에 세계 첫 '교량 호텔' 탄생

9서울 뺑소니 연평균 800건, 강남 일대서 자주 발생한다

실시간 뉴스

1업무효율 저하 부담에…대기업 10곳 중 3곳만 60세 이상 고용

2尹대통령 내외 사리반환 기념식 참석…"한미관계 가까워져 해결 실마리"

3 대통령실, 의료계에 "전제조건 없이 대화 위한 만남 제안한다"

4이복현 금감원장 "6월 중 공매도 일부 재개할 계획"

5정부 "80개 품목 해외직구 전면차단 아니다…혼선 빚어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