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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이사직 내놓는 회장님들 - 경영은 ‘OK’ 책임은 ‘NO’

등기이사직 내놓는 회장님들 - 경영은 ‘OK’ 책임은 ‘NO’

재계 총수들 등기이사 잇단 사퇴 … 연봉 공개 부담, 책임 회피 논란
기업 총수들의 등기이사 사임이 잇따르고 있다. 왼쪽부터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주주총회 시즌이 시작됐다. 주요 상장사들은 주총 결의안을 속속 내놓고 있다. 올해 주총에는 여느 때보다 등기이사선임에 많은 관심이 쏠린다. 임원 연봉공개, 재벌 총수들의 법정이슈 등 관련 사안이 많아서다. 특히 총수들의 등기이사 선임 문제는 소유와 지배가 일치하지 않는 기형적 구조와 관련이 깊어 이에 대한 논란이 거셀 전망이다.

올해 주총에서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현대자동차·현대제철), 최태원 SK그룹 회장(SK이노베이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롯데쇼핑), 이재현 CJ그룹 회장(CJ CGV),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효성), 구본준 LG전자 부회장(LG전자),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부회장(현대모비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현대백화점),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대림산업) 등 재계 총수일가들의 등기이사 재선임 여부 결정이 예정돼 있었다. 이 가운데 신동빈 회장과 조석래 회장, 구본준 부회장, 정의선 부회장, 정지선 회장은 등기임원에 오를 예정이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도 등기이사에 재선임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 등기이사직은 유지하지만 현대제철 등기이사직에서는 물러난다. 현대제철은 3월 14일 주주총회를 열고 정 회장 대신 강학수 현대제철 부사장을 사내이사로 신규 선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 회장이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2005년 3월 이사로 취임한 이후 9년 만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임원 보수 공개를 피하기 위해 등기임원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올해부터 기업들은 연봉 5억원이 넘는 등기이사의 개인별 연봉을 사업보고서에서 공개해야 한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에 따라 이를 의무화했다. 국내 30대 그룹 가운데 등기이사 평균 연봉이 5억원 이상인 기업은 모두 117곳이다. 이 중 대주주가 등기이사에 등재돼 있는 기업은 67곳(60명)이다. 이들은 올해부터 개별 임원 보수를 공개해야 한다.



올해부터 5억원 이상 임원 연봉 공개가령 이번에 정몽구 회장이 등기이사직을 내려놓는 현대제철을 보자. 지난해 3분기까지 정 회장을 포함한 사내이사 4명에게 지급한 금액은 47억7200만원이다. 1인당 10억원이 넘는다. 그런데 여기서 등기이사의 개별 보수를 공개하면 정 회장이 현대제철에서 얼마의 보수를 받고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재벌 총수들로서는 보수 공개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이미 일부 상장사들은 지난해 등기임원 보수를 대폭 삭감하거나 총수가 등기임원을 포기하는 등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과 박정원 두산 지주부문 회장이 각각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건설 등기이사직에서 내려왔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도 신세계와 이마트 등기이사직을 사임했다. 지난해 11월에는 담철곤 오리온 회장과 부인 이화경 부회장도 비등기이사로 명함을 바꿨다. 김상헌 동서 회장은 이번 주총에서 등기임원 자리를 내놓는다.

총수들의 등기이사직 회피가 사업 관련 책임을 덜기 위한 의도라는 해석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정몽구 회장이 보수 공개보다는 현대제철에서 일어난 잦은 사고가 부담으로 작용해 등기이사에서 사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제철은 현재 잦은 안전사고 탓에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2012년 9월부터 올 1월까지 발생한 사고 건수만 총 9건이며, 13명의 근로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런 사고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등기이사직은 총수들 입장에서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다.

주식회사에서 이사회는 주주총회를 소집하고 대표이사를 선임하는 등 회사 경영의 주요 의사결정을 하는 조직이다. 그리고 이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이사가 ‘등기이사’다. 이와 달리 비등기이사는 이사회 의결권이 없다. 이 때문에 회사가 결정한 사안이 문제가 됐을 경우 등기이사는 이에 대한 법적 연대책임을 지지만 비등기이사는 책임이 없다.



총수 일가 등기이사 비중 11% 불과문제는 국내 기업의 경우 총수들이 굳이 등기이사로 선임되지 않더라도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경영은 직접 하면서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 구조다. 이렇게 되면 기업은 책임경영과 거리가 멀어진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실질적 경영자가 등기이사가 아닌 경우에는 개인이익을 위해 회사 또는 주주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더라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대기업 총수 일가의 등기이사 비중은 낮아지고 있다. 공정위에 따르면 지난해 49개 민간 대기업집단 가운데 총수가 이사로 등재된 회사는 157개로 전체의 11%에 불과하다. 삼성그룹의 경우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을 제외하고는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등이 모두 비등기이사다.

전문가들은 이런 경향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총수가 직접 나서 과감한 경영활동을 펼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커서다. 더구나 정부의 기업 대상 사정수사가 많아지고 경영활동에 대한 배임죄 처벌도 이 같은 기류의 배경으로 분석된다.

비자발적 등기이사 사임도 늘어날 전망이다. 법적인 문제에 휘말린 경우다. 김승연 한화 회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김 회장은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은 후 검찰이 대법원 재상고를 포기하면서 판결이 확정됐다. 이후 7개 계열사의 등기이사직을 사임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임원으로 있을 경우 각 계열사마다 법적으로 사업 허가가 취소되거나 업무에 제한을 받을 수 있어서다.

SK그룹의 최태원 회장 형제도 실형 확정에 따라 주주총회 이전에 계열사 등기이사 사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재 최 회장은 SK·SK이노베이션·SK하이닉스·SK C&C 등 4개 계열사의 등기이사에 올라 있다. 최 부회장도 SK네트웍스, SK E&S 등 2개 회사에 이사를 맡고 있다.

이외에도 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는 기업 총수들의 등기이사직사퇴가 줄을 이을 것으로 예상된다. 구자원 LIG그룹 총수 일가와 이재현 CJ그룹 회장,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본격적인 재판을 앞두고 있는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도 이후 대표이사직은 물론이고 등기이사에서 물러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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