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ERPRENEURS | YOON, BYUNG-CHUL - “금융계가 격변했지만 나는 아직 서른 살 청년”
ENTERPRENEURS | YOON, BYUNG-CHUL - “금융계가 격변했지만 나는 아직 서른 살 청년”
여느 때보다 눈매가 날카로워 보인다 했더니 안경을 쓰지 않았단다. “백내장 수술을 한 뒤로 시력이 좋아져 그냥도 잘 보여요.” 2월 11일 서울 도화동 한국FP협회에서 만난 윤병철 한국FP협회장은 희수(喜壽)의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는 1960년 농업은행에 입사해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개발금융, 한국장기신용은행을 거쳐 단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을 하나은행으로 전환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우리금융지주의 초대 회장도 지냈다.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은 ‘사람’이다. 한국 금융의 산증인으로 살아오기까지 많은 사람과 인연이 있었다.
여러 사람 가운데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제일 잘했다고 여기는 일이 김 전 회장에게 하나은행장을 맡기고 스스로 물러난 것입니다. 김 전 회장같은 걸출한 후임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많고 일을 참 잘하는 친구였어요. 물러날 때 무책임하다는 질책도 받았지만 퇴임 2년 전부터 후임자를 물색했고, 김 전 회장이 하나금융을 잘 키워 결과적으로 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윤 회장은 1997년 은행장 3연임을 앞두고 스스로 회장으로 물러나 주변을 놀라게 했다. 당시 ‘하늘에 해는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회장의 역할을 문서로 만들어 권한 남용을 막았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요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마음이 바뀔 수 있으니까요. 물러날 마음을 굳혔다 해도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가족의 기대와 바람을 저버리는 일도 어려웠고요. 다행히 퇴임 2년 전부터 아내에게 뜻을 밝혔는데, 고맙게도 ‘멋진 결정’이라고 격려해줬어요. 번복하지 않고 퇴임을 기정사실화하려면 ‘다음 임기가 돌아올 때 그만둘 거라고 공표하라’고 조언도 해줬습니다.
김 전 회장 역시 2012년 3월 퇴임 전까지 경영승계에 공을 들였다. 2005년 은행장에서 물러날 때 후임자가 독립적으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집무실을 서울 을지로 하나은행 본사에서 여의도 하나대투증권으로 옮겼다. 2011년 2월에는 CEO를 포함한 등기이사의 연령을 만 70세로 제한하는 지배구조 규준을 정립했다.
승계 문제에 대해 김 전 회장과 생각을 나눈 적이 있습니까.
회장·행장 시절 승계 문제를 자주 논의했습니다. 내가 은행장, 김 전 회장이 전무일 때부터 함께 정부 고위 관계자와 언론사 임원들을 만나곤 했어요. 은행의 1·2인자인 행장과 전무는 경쟁관계라 좀체 같이 다니지 않는데 말이죠.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우리 관계가 정말 좋아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경영승계는 권한이 아닌 문화와 정신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행장 만년필’ 역시 정신을 잘 전하기 위한 매개체로 만들었어요.
행장 만년필이란 윤 회장이 김 전 회장에게 물려준 몽블랑 만년필로 중요한 사안에 사인할 때 사용한다. 역대 하나은행장들의 손을 거쳐 현 김종준 행장에게 전해졌다.
지주회사 회장과 은행장은 어떤 관계여야 합니까.
우리나라 지주회사 제도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회장이 권한은 있는데 책임을 지는 구조가 아니지요. 그래서 비판을 받고 분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는 지주회사 회장이 곧 그룹 CEO예요. 결단을 내리고 책임을 집니다. 미국의 제도가 옳다고 보지만 감독 조직을 비롯한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을 겁니다. 현 상황에서는 회장이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행장이 실적을 올리면서 한 목표를 향해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금융계 인사가 있을 때마다 잡음이 불거지는 이유가 뭘까요.
후유, 참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금융인들도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해요. 일반 사업조직에서는 회장이 결정을 잘못하면 본인에게 가장 큰 손실로 돌아오지요. 주인이니까. 주인이 없는 금융조직은 더 공정해야 하는데 내부에서 이견이 생기거나 외부 영향을 받아 조금이라도 일 처리를 잘못하면 말이 나옵니다.
윤 회장은 김 전 회장이 퇴임 후에도 회사경영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대해 답답함을 표했다. 김 전 회장은 중국 민생은행 고문을 맡아 1월에 중국으로 떠났다. “조직을 도우려고 한 것을 외부에서는 안 좋게 해석할 수 있겠지요. 중국에 가기 전 ‘모든 열정을 다 바쳤는데 억울하다’고 하더군요. 분명 조직의 자율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과거 은행장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 역시 ‘사(私)’보다 ‘공(公)’을 중시한 결과라고 했다. 이런 결정에 영향을 준 사람이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고(故) 김진형 한국개발금융 사장이다. 1967년 초대 사장에 오른 김 사장은 회사가 변화기를 맞은 1978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퇴진을 선언했다. 윤 회장은 “자연인은 유한하지만 자연인이 모여 만든 조직이 무한히 발전하려면 아무리 회사에 기여한 공이 커도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김 사장은 윤 회장에게 경영을 가르쳐준 직장 상사이자 멘토였다.
김진형 사장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평소 자율과 절제를 강조했습니다. 한국개발금융이 출범하고 얼마 후 김 사장이 청와대를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했는데, 박 대통령이 김학렬 당시 경제수석에게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라고 지시했어요. 김 수석이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느냐’고 묻자 김 사장이 웃으며 ‘우리가 하는 대로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 돕는 길’이라고 답했습니다.
1970년대 정부의 지원을 마다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아요. 하지만 김 사장은 정부 지원을 받으면 경영의 자주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또 한국개발금융의 주주인 한국경제인협회의 대기업 사장들이 배당금이 적다고 불만을 토로하며 참다 못해 ‘그럼 고생한 직원들 월급이라도 많이 주라’고 하자 ‘회사의 이익금을 방만하게 운영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절제를 보여줬습니다.
한국경제인협회에서 경험은 금융인으로 성장하는데 어떤 영향을 줬습니까.
금융회사에서 주로 경영을 했다면 경제인협회에서는 사회생활을 배웠습니다.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다듬어진 곳이기도 하고요. 30대 초반의 저는 ‘모난 돌’이었어요. 둘러 말하지 못하고 상사 앞이라도 할 말을 다 해야 했지요. 전경련 상근부회장을 지낸 김입삼 당시 경제인협회 사무국장이 내 말을 불쾌하게 받아들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면 사회생활이 순탄치 않았을 겁니다.
몇 해 전 식사 자리에서 ‘윤병철이 상당히 탐구적이었지’라고 하더군요. 상사로서 부하직원의 단점보다 장점을 찾으려 애쓴 마음에 또 한번 감탄했습니다. 또 김안재 경제인협회 부사장은 ‘미스터 윤, 좋은 권투선수는 잘 치는 사람이겠지만 잘 막는 것도 중요해’라며 경청의 중요성을 알려줬습니다.
자율적으로 일하는 법을 배운 윤 회장은 하나은행장에 올라서도 임원들에게 할 말이 있으면 다 하라고 주문했다.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다 보니 회의 때 임원들끼리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아 비서실에 늘 긴장이 맴돌았다고 한다. 그는 경제인협회에서 기업인들과 인연을 쌓았다. 고(故) 최태섭 한국유리 명예회장과 홍재선 금성방직 사장 등이 특히 윤 회장을 아꼈다. 홍 사장은 눈을 감기 직전까지 윤 회장을 곁에 두고 “가족들을 부탁한다”며 믿음을 보였다고 한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과는 요즘도 가끔 만나 의견을 나눈다.
후배들과 인연도 소중히 했다. 우리금융지주 시절 부회장으로 곁을 지켜준 전광우 연세대 석좌교수, 민유성 나무코프 회장과는 2개월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다. 전 교수가 미국 유학 전 한국투자금융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왔을 때 시작된 관계다.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는 추억이 됐지만 윤 회장은 금융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로 2001년 우리금융지주 설립을 꼽았다.
“회장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하나은행 직원들은 경쟁은행으로 간 나를 배신자라고 불렀습니다. 전 세대로서 금융계 종사자 열 명 중 네 명의 목이 달아난 상황에 책임을 느끼고 도움이 돼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무려 12조7000억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된 평화·한빛·경남·광주은행의 조직 합병 과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콱 막힌다고 했다. 윤 회장의 노력은 3년 만에 빛을 봤다. 우리금융지주는 1조3000억원의 순이익을 올리고 2003년 뉴욕 증시에 상장하는 성과를 거뒀다.
우리금융지주 민영화가 한창입니다. 초대 회장으로서 어떻게 보십니까.
힘들게 합친 조직을 다시 공중분해하는 것 같아 많이 안타깝습니다. 회장을 맡을 때 진념 당시 경제 부총리를 만나 공장을 잘 운영하려면 충분한 투자가 필요하다며 추가로 돈이 필요하면 더 지원해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진 부총리는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때 좀 더 충분히 투자했더라면…. 공적 자금 회수를 위해 서둘러 매각하는 것은 결국 손해입니다. 지역성이 강한 경남·광주은행은 별도로 매각하되, 나머지 남은 조직들은 분리하지 말고 한 조직으로 매각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윤 회장은 ‘민영화와 관련해 자문을 구해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우리나라는 현직이 최우선이고 전 세대 사람이 어떤 정신으로 조직을 세웠나 고려하지 않는다”며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경영은 살아 있는 말(馬)과 같습니다. 말의 혈통, 장단점을 고려해 내 아들, 손자까지 잘 탈 수 있게 해야 하는데 내가 탈 때만 잘 달리면 되고 나중에 폐 말이 되더라도 신경 쓰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이제는 끝까지 남는 놈이 최고다라는 인식을 버려야 해요.”
한국 금융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죠.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교육을 투자가 아닌 비용이라고 생각한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체계적인 인재 양성 교육은 여전히 부족해요. 조직에 뿌리를 박아야 하는 사람,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IB(투자은행)를 발전시키려고 외국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주고 사람을 데려와도 조직과 맞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지요. 구성원을 유능한 인재로 기르면 조직은 자율적으로 가장 높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관치 금융이라고 하지만 금융인 스스로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정부의 간섭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은행들의 방만한 경영에도 쓴소리를 했다. “요즘 은행들은 이익을 많이 내려고 별별 수단을 다 씁니다. 우리가 벌었으니까 마음대로 쓰겠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사회공헌을 하더라도 분수에 맞게 적정선에서 해야지요. 이윤 추구에만 열을 올리고 그 돈을 생색내듯 쓰면 안됩니다.”
금융계 원로로서 한국 금융이 앞으로 갈 길을 제시한다면요.
민영화와 글로벌화지요. 규모가 큰 국내 은행에서 실력 있는 지도자가 나와 경영의 자율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은행장이 바뀌는 관행은 사라져야 해요. 신한·하나·KB국민은행 같은 그룹이 중소은행을 사들여 해외로 나가고, 산업은행도 민영화해야 합니다.
금융산업에 전문으로 투자하는 펀드를 만들어 사심 없고 능력있는 경영자가 나서 민영화를 추진하면 자율성을 지키면서 조직의 역량을 키울 수 있어요. 정부를 설득하고 정치권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세력이 나서야 합니다. 보험회사가 연합해 추진할 수도 있고요. 대형 금융그룹 4개 정도가 서로 경쟁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윤 회장은 격동의 시기에 금융인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뎌 한국 금융의 변곡점마다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한국개발금융 때부터 들고 다닌 낡은 갈색 서류가방이 그의 치열했던 도전을 보여준다. 매 순간 능력껏 일했기에 “아쉬움은 없다”는 그는 스스로 서른 살 청년이라며 새뮤얼 울만의 시 ‘청춘’을 읊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이라네./ 장밋빛 뺨,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이 아니라/ 늠름한 의지, 빼어난 상상력, 불타는 정열,/ 삶의 깊은 데서 솟아나는 샘물의 신선함이라네./ (중략)/ 나이를 먹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서 늙어간다네.
“50대 들어서부터 매일 아침 호흡운동을 합니다. 지속하는 힘보다 강한 건 없어요. 또 스무 살 넘게 어린 ‘친구’들과 늘 새로운 주제로 대화를 나눕니다. 젊게 사는 비법이지요. 중·고등학교 은사인 무원 김기호 선생님이 고등학교 졸업식 때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라는 글을 써줬어요.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린 글의 한 구절인데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으로 모든 일에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하라’고 덧붙였습니다. 다가올 금융 겸업화 시대를 준비해 금융전문가를 양성하며 계속해서 도전할 계획입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에클스턴 전 F1 회장 내놓은 69대 경주차 매물 ‘8866억 원’ 추산
2세계 전기차 업계 한파 매섭다…잇단 공장 폐쇄·직원 감축
3'삼성동 집 경매' 정준하..."24% 지연손해금 상식적으로 말 안 돼"
4‘연구원 3명 사망’ 현대차 울산공장·남양연구소 11시간 압수수색
57조 대어 LG CNS, 상장 예심 통과…“내년 초 상장 목표”
6윤 대통령 “백종원 같은 민간 상권기획자 1000명 육성할 것”
7삼성전자, 반도체 위기론 커지더니…핫 하다는 ETF 시장서도 외면
8롯데 뒤흔든 ‘위기설 지라시’…작성·유포자 잡힐까
9박서진, 병역 면제 논란…우울·수면 장애에 가정사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