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미술가들의 작품에 둘러싸여 잠을 자는 기분은 어떨까?
ART - 미술가들의 작품에 둘러싸여 잠을 자는 기분은 어떨까?
뉴욕 이스트 25번가에 있는 칼튼 암스 호텔. 2층 계단통에서 멋쟁이 젊은 커플이 벽에 그려진 커다란 만화 캐릭터들을 열심히 들여다 본다. 여자의 눈이 쇠창살 뒤에서 시퍼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흉악범으로부터 그 옆의 여자 목동 쪽으로 옮겨 간다. 말 위에 올라타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소리를 지르는 그 목동의 한쪽 손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들려 있다. 남자가 여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소곤거린다. “이 벽화는 뱅크시가 그린 거야.”
“설마!” 여자는 잠시 더 넋 놓고 그 그림들을 바라보다가 남자 쪽으로 돌아서서는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며 말한다. “이제 마임 보러 갈래요?”
이런 제안에 대한 답은 들어보나마나 예스다. 거기서 2층 복도를 따라가다 보니 아직도 페인트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방이 나온다. 아름다운 갈색 눈을 가진 여류 미술가가 조잡한 푸른색 나이트 가운을 입고 슬픈 피아노 반주에 맞춰 온몸을 비틀고 있다. 얼마 전 자신이 벽에 그린 인상주의 누드화를 흉내 내는 듯하다. 복도에서는 손님들이 와인을 마시며 벽을 무질서하게 뒤덮고 있는 그림들을 사진에 담는다.
요란한 색채의 붓 자국이 눈길을 끄는 그림부터 절제된 분위기의 난해한 그림까지 다양하다. 열려 있는 또 다른 문으로 들어가니 바닥부터 천장까지 다채로운 색상의 쓰레기 봉투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방이 나온다. 마네킹 하나가 음식 찌꺼기에 둘러싸여 있다. 건물 안에 사는 고양이들이 성난 울음소리를 내며 손님들의 다리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1980년대 중반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에는 지금까지 거의 200명의 예술가가 참여해 저마다 독특한 방을 꾸몄다. 대다수 객실의 그림은 처음 작품 위에 여러 차례 다시 그려졌으며 원래 그림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경우는 극소수다. 행복이 넘치는 영국 시골의 오두막 그림부터 드립 페인팅(그림물감을 흘리거나 튀겨서 그리는 액션 페인팅) 기법으로 그린 바다 풍경, 거대한 팝아트 초상화, 사진처럼 정확하고 상세하게 묘사된 일본풍의 식물화, 사람의 얼굴과 포도 나무를 결합한 포스트모던 회화까지 다양하다.
4개 층에 총 54개의 객실을 갖춘 이 호텔의 내부는 예술성이 흘러 넘친다. 골동품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로비와 버블랩(완충 작용을 하도록 기포가 들어 있는 비닐 포장재)을 붙여 놓은 천장, 들쭉날쭉한 피아노 건반이 그려진 창턱까지 곳곳에서 꾸미지 않은 창조적 불규칙성이 번득인다.
“방마다 페인트 칠이 벗겨지는 게 보인다. 그 페인트 밑으로 또 다른 겹의 페인트가 벗겨진다.” 칼튼 암스의 프런트 직원 다렉 솔라르스키가 뉴스위크에 말했다. 폴란드 출신으로 10년 전 이 호텔의 미술가 거주 프로그램에 참여한 솔라르스키는 현재 트롱프 뢰유(실물로 착각하도록 그려진 그림) 기법으로 호텔 사무실의 천장화를 그리고 있다. “우리는 이 호텔의 미술 프로젝트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고 참여 미술가 수가 많은 프로젝트로 기네스북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곤 한다”고 그가 말했다.
“실험적인 분위기의 방들이 있는가 하면 어둡거나 천박하게 느껴지는 방들도 있다. 호텔 측이 각 방의 디자인을 미술가들의 자유재량에 맡기기 때문에 예술의 질이 천차만별이다.” 독일 출신의 프런트 직원 알렉스 볼코비치가 말했다. 그녀는 2012년 이 호텔의 미술가 거주 프로그램에 참여해 재활용 유리로 된 종유석 모양의 장식물로 현대적인 방을 꾸몄다. “이곳은 미술가들에게 가족 같은 환경을 제공한다. 또 관람객은 그들의 작품을 기존 갤러리에선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감상하게 된다. 투숙객들은 미술가의 작품에 둘러싸여 잠을 잔다. 정말 친밀한 접근 방식이다.”
칼튼 암스 호텔은 뉴욕의 부유한 킵스 베이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비트족(Beat Generation, 1950년대 기성질서에 반발해 저항적인 문화와 기행을 추구한 일단의 젊은 세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이다. 현관 위에 쳐진 빨간 차양이 근처 바루크 대학에 줄지어 선 높은 건물들의 위용에 눌려 유난히 작아 보인다. 이 호텔은 뉴욕 미술계에선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술가 거주 프로그램에 참여한 인상적인 작가들 덕분에 국제적 명성을 누린다. 이런 프로그램이 더 보편적인 유럽에서는 특히 그렇다.
칼튼 암스의 미술가 거주 프로그램은 많은 미술가들로부터 독특한 작품을 이끌어냈다. 그중에는 스페인 현대 미술가 파코 시몬, 뉴욕 거리 미술의 선구자 리처드 햄블턴, 신비에 싸인 그래피티 아트의 거장 뱅크시 등 나중에 스타덤에 오른 미술가들이 꽤 있다.
뱅크시는 1999년 이 호텔에 거주하면서 객실 하나와 계단통에 그림을 남기는 등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객실에는 의인화한 사파리 동물들이 등장하는 만화를 그렸다. 요즘 그의 그림에서처럼 주인공들이 정치색을 띄진 않지만 기린 그림에 ‘R.I.P.’(Rest In Peace, ‘평화롭게 잠들다’라는 뜻으로 묘비에 주로 쓰인다)라고 쓰인 생각 풍선을 달아 지치고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칼튼의 직원들은 뱅크시의 비밀주의에 장단을 맞추기라도 하듯 당시 그가 꽤 과묵했다고만 말했다.)
“난 요즘도 아직 들어가보지 않은 방들을 구경하고 다닌다.” 현재 이 호텔에 거주하며 쓰레기 봉투 그림으로 방을 꾸민 타스마니아 출신의 미술가 롭 오코노가 말했다. “이 그림들의 다듬어지지 않은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첼시의 갤러리에서 흔히 보는 개성 없고 번지르르한 그림들과는 다르다. 이곳은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이다.”
시몬도 같은 생각이다. “칼튼 암스에서의 경험이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이곳에서 놀라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내게 다양한 영감을 줬다. 어디에도 이런 곳은 없다. 뉴욕에 갈 때마다 그곳에서 지낸다.” 시몬이 1989년 한 객실에 그린 지중해풍의 그림(햇빛에 바랜 듯한 색상과 누드 여성들이 인상적이다)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호텔 내부를 보면 조각조각 짜 맞춘 모자이크 같은 이 건물의 역사가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다. 1888년 근로 계층을 위한 호텔로 지어진 뒤 금주법이 시행된 1920년~1933년에는 주류밀매소 역할을 했으며 1950년대에는 마약중독자와 매춘부들의 소굴이 됐다. 1960년대에 이 호텔은 뉴욕시의 인가를 받은 1인거주 호텔(SRO)로 변모했다. 고령자와 노숙자 등 복지 수혜자들에게 장기 주거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당시 이곳의 분위기는 매우 불안했다. 동시에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충격적이고 슬픈 곳이었다. 여기 살던 사람들은 길 잃은 영혼들이었다.” 1980년대 초에 이 호텔을 운영하기 시작한 에디 라이언이 말했다. (현재 그는 코스타리카에 살면서 ‘라 코스타 데 파피토’라는 호텔을 운영한다.)
SRO 프로그램은 라이언이 이 호텔에 온 지 몇 년 뒤 끝났다. 호텔의 음울한 실내장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시내에 사는 미술가 친구들을 불러들여 객실의 새단장을 맡겼다. 미술가들이 이 대형 캔버스 앞으로 모여들면서 호텔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당시 새로 인쇄한 호텔 광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칼튼 암스 호텔: 이곳은 홀리데이 인 호텔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 베개 위에 놓인 것은 초콜릿이 아닙니다.”
그후로 이 호텔의 미술가 거주 프로그램은 꾸준히 계속돼 왔으며 주로 비수기인 겨울에 진행된다. 최소한의 편의시설만 갖춘 객실들은 요금이 1박에 70달러부터 시작해 맨해튼의 호텔치고는 이례적으로 싸다. 이곳은 다채로운 특징들로 넘쳐난다. 현재 이 호텔의 지배인인 존 오그렌은 “이곳엔 별난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말했다. 괴짜 예술가와 손님들이 로비에 모여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그들은 호텔 위층의 유령에 대한 소문을 한층 더 부풀리며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휘트니 미술관 독립 연구 프로그램의 커샌드라 구안은 퀸스의 스튜디오 단지 ‘플럭스 팩토리’ 등 뉴욕에는 다른 실험적인 미술가 거주 프로그램들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칼튼의 주 기능이 호텔이라는 점이 이 프로그램을 독특하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일반적으로 미술가 거주 프로그램은 (휴양지 같은 곳에서 시행되는 경우가 많아) 미술가들을 도시로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도시에서 떠나도록 만든다. 또 도시의 미술가 거주 프로그램은 미술가들에게 숙박을 제공하지 않는다.”
칼튼의 프로그램에 참여한 미술가들이 이 호텔에 강한 애착을 지니는 이유는 가족적인 분위기 때문인 듯하다. 2011년 ‘하트 체임버’ 객실을 꾸며 인기를 끈 제임스 저코 피셔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일하는 동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다. 이 프로그램은 진정한 상조 시스템이다. 20세기 초 뉴욕과 미래의 뉴욕을 이어주는 관문이다.”
현재 이 호텔의 직원인 피셔는 미술가 거주 프로그램 참가 지원자들이 온라인으로 제출한 디자인 계획을 훑어보고 있다. 호텔은 1년 내내 문을 열지만 미술가들이 꾸민 객실은 연례 객실 개방 파티 때 무료로 대중에 공개된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미술가들이 꾸민 객실을 예약해 그 안에서 직접 잠을 자보는 게 좋다. “이 호텔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념관이다.” 라이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뉴욕에 갈 때면 늘 머물 곳이 있다는 게 무엇보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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