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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CY - 혁신가들의 싱크홀로 전락한 러시아

POLICY - 혁신가들의 싱크홀로 전락한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6월 인터넷 창업 프로젝트 박람회를 방문해 인터넷 업체 대표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러시아가 지금쯤 보르시치(러시아 전통 수프) 냄새 풍기는 실리콘밸리가 될 수 있었다. 서방은 상상조차 못했던 기발한 혁신으로 세상을 이끌면서 말이다. 대신 러시아와 첨단기술이라는 두 단어가 교차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패닉에 빠져 패스워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드러나지 않은 범죄다. 러시아에서 벤처 문화가 뿌리를 내리려나 싶은 순간에 푸틴의 우크라니아 정책이 그 싹을 짓밟아버렸다. 경제력은 소프트웨어와 데이터에 집중하는 혁신 국가에게로 갈수록 집중된다. 따라서 사실상 푸틴이 향후 10~20년간 러시아를 경제적 오지로 유배를 보낸 셈이다.

“가장 최근에 세계적으로 성공한 러시아의 기술은 테트리스였다.”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투자자 데니스 아다모비치가 쓴웃음을 지으며 조크를 던졌다. 참고로 그 시점은 1984년 이었다.

“우수한 러시아 프로그래머와 과학기술자가 대단히 많다.” 런던에 기반을 둔 허미티지 캐피털 매니지먼트 CEO 빌 브로더가 말했다. 러시아에 투자하며 공개적으로 푸틴과 대립각을 세운 업체다. “단지 러시아에서보다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는 비율이 더 높을 뿐이다.”

이런 지경에 이를 까닭이 없었다. 1991년 옛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 모스크바에서 반 불법적인 소프트웨어 회사 파라그래프를 이끄는 스테판 파치코프를 찾아갔다. 당시 신생 벤처기업들의 환경이 얼마나 척박했을지 상상이 갈 법하다. 파라그래프는 직원들에게 점심과 저녁을 제공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직원들이 식량을 배급 받기 위해 하루 종일 줄을 서야 했다. 자동차 수리센터도 자체적으로 운영했다. 모스크바에선 자동차를 유지·관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파라그래프는 마치 바다 밑바닥의 뜨거운 증기를 뿜어내는 배출구에서 용케 살아가는 미생물 같았다.

옛 소련의 과학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파치코프를 비롯한 소련 엔지니어들은 당시 내게 기술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올릴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소련 컴퓨터 하드웨어는 항상 서방 하드웨어에 한참 떨어졌다. 컴퓨터는 언제나 제한된 자원이었다. 소련 프로그래머들은 적은 자원으로 많은 일을 해야 했으며 절묘한 알고리즘과 코드 작성법을 터득했다. 여건만 따라줬다면 옛 소련 체제 안에 갇혀 있던 재능이 만화경처럼 다채로운 러시아 신생 벤처들로 터져 나왔을지도 모른다.

파라그래프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준 하나의 힌트였다.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 회사는 당시 세계 최고의 필기 인식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그리고 애플의 뉴턴 휴대형 기기 용으로 라이선스 제공했다. 훗날 파라그래프의 기술은 미국 우체국에서 필기된 편지봉투 분류작업을 자동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90년대 신러시아가 무너져 내리자 파치코프는 실리콘밸리로 건너가 또 다른 회사를 차렸다. 여러분도 휴대전화에 그 회사의 앱을 깔았을지 모르겠다. 클라우드 메모 서비스 에버노트다.

러시아 기업체 일제단속, 정부 개입, 블로깅 규제법, 러시아에 방화벽을 둘러친다는 풍문까지 더하면 첨단기술계의 앞날이 깜깜해진다.
그뒤 10년 동안 러시아의 많은 인재가 파치코프의 뒤를 따라 러시아를 빠져나갔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러시아가 마침내 몇몇 흥미로운 벤처기업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검색엔진 얀덱스와 모바일 결제업체 퀴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혁신이래봤자 가장 성공한 아이디어를 베껴먹는 식이었다. 단지 러시아에서 그런 일이 이뤄졌을 뿐”이라고 아다모비치가 말했다.

2010년대 미국의 일부 희망적인 벤처자본이 러시아 벤처기업들로 몰리기 시작했다. 일정 부분 러시아 국내의 모바일 앱 시장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3년에는 러시아어가 인터넷에서 둘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가 됐다(영어에 한참 뒤졌지만 독일어에 약간 앞섰다). 패스트레인 벤처스에 따르면 2013년 245개 러시아 업체가 벤처 캐피털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미국에서 매년 벤처 투자를 받는 기업 수 3700개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지만 그래도 싹수를 보였다.

2014년초만 해도 오름세에 있었다. 2014년 전반기 러시아 인터넷 프로젝트에의 투자가 전년 동기 대비 77% 증가했다. 데이터 조사업체 CB 인사이츠의 통계다.

바로 그 시점에 푸틴이라는 돌발변수가 불거졌다. 지난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국제적인 제재를 받게 됐다. 그 뒤로 (‘오즈의 마법사’에서) 허수아비가 ‘서쪽 마녀’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만큼이나 서방 투자자들은 러시아 사업 참여를 기피해 왔다. 거기에 푸틴의 재가를 받은 러시아 기업체 일제단속, 정부 개입, 블로깅 규제법, 러시아에 방화벽을 둘러친다는 풍문까지 더하면 첨단기술계의 앞날이 깜깜해진다.

러시아 소재 다이렉트 그룹의 투자책임자 빅터 벨로구브는 이렇게 말한다. “벤처 캐피털 시장이 상당히 가라앉았다. 향후 몇 달 동안 벤처기업들의 포부와 투자 전 기업가치가 크게 쪼그라들리라는 것은 예언자가 아니라도 뻔히 보인다. 요즘 벤처기업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는 하나뿐이다. 혹시라도 본전치기를 할 수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하라!”

야심적인 벤처 기업가는 그냥 떠나버릴 것이라고 브로더가 말했다. “벤처사업이 통할 확률은 이미 낮은 편이다. 거기에 부패 리스크와 법적·정치적 리스크를 더할 경우 캘리포니아나 잉글랜드로 옮길 수 있는데도 [러시아에서] 회사를 차리는 것은 미친 짓이다.”

2000년대 초에 비해 푸틴의 3기 정부 아래서 5배나 많은 러시아인이 떠나갔다. 저명한 이주자 중에는 첨단기술 두뇌가 많았다. 파벨 두로프도 큰 화제가 됐던 사례 중 하나다. 러시아판 페이스북 브콘카크테의 정력적인 창업자이며 언론 자유 옹호자다. 반정부 발언을 중단하지 않아 결국 푸틴에게 미운 털이 박히고 말았다. 카리브해 연안의 세인트키츠네비스연방으로 떠났다. 현재 새 벤처 기업을 설립 중이며 모피 의류를 훨씬 덜 입는다.

서방 사람들에겐 러시아에 남은 일류 프로그래머들이 부정축재 정치인 무리에 합류한 것처럼 보인다. 러시아 첨단기술 두뇌들의 위력은 인터넷 개인정보 도용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범죄 영화 ‘오션스 일레븐’ 속편의 소재로 삼아도 될 만큼 철면피한 행위였다. 가장 최근의 ID 절도 사례는 10억 개가 넘는 비밀번호를 훔쳐낸 러시아 해킹 조직이었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만일 그들이 테트리스와 파라그래프의 궤도를 따라갔다면, 그래서 잘해야 짝퉁 제품을 만들고 못하면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대신 새로운 발명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활력 넘치는 러시아 첨단기술 업계가 어떤 특이한 문제들을 해결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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