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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가 만나고 싶은 명사 30인(4) 승효상 - 땅이 하는 소리를 잘 듣는 사람

CEO가 만나고 싶은 명사 30인(4) 승효상 - 땅이 하는 소리를 잘 듣는 사람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건축가 승효상은 23년째 ‘빈자의 미학’이라는 건축 철학을 지켜오고 있다. 그는 빈자의 미학의 맥은 그대로지만 시야가 점점 트이고 있다고 말한다. 정재희 포드코리아 대표는 대량생산을 일컫는 ‘포디즘(Fordism)’의 근원지 포드에서 23년째 일하고 있다. 그는 승효상의 철학에 큰 호기심을 보였다.
건축가 승효상 이로재 대표(좌)와 정재희 포드코리아 대표가 만났다. 수입차와 ‘빈자의 미학’ 사이에는 묘한 연결고리가 있었다.
CEO와 명사의 만남이 이뤄진 것은 2월 2일, 서울 동숭동 건축사무소 이로재(履露齋)에서다. 2층 사무실에서 다시 좁은 계단을 내려가자 승효상(63) 이로재 대표가 일하고 생각하는 ‘공간’이 나왔다. 이곳은 또 다른 지상 1층과 연결된다. 승 대표와 정재희(55) 포드코리아 대표는 처음 만나는 사이다. 차의 따뜻한 김만이 어색한 기운을 채우고 있었다. 정 대표가 “얼마 전 충남 공주의 마곡사에 다녀왔다”며 말문을 열었다. 말 없이 정 대표를 응시하던 승 대표가 이내 소탈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정재희
절이 겉에서 보면 단순하지만 안에 들어가니 바람의 동선, 마루의 질감 이런 것들이 다 살아 있어 무척 아늑하다고 느꼈습니다. 아내가 추천한 곳인데 나중에 보니 승 대표께서 설계하셨더군요.



승효상
고맙습니다. 사실 건너편 산에 숲이나 절 가운데 시설을 계획하고선 실행을 못해서 미완의 건물로 남아있습니다.

정 대표는 올 초 머스탱의 6세대 모델인 ‘올 뉴 머스탱’이 출시됐다고 소개하며 승 대표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냈다.



나온 지 50년 된 차입니다. 예전 디자인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 그 느낌을 이어가면서 변화를 줬어요. 전통을 유지하며 새로움을 더해간다는 말씀에서 건축이 자동차와 통하는 면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포드 하면 대량생산 방식인 ‘포디즘(Fordism)’이 떠오릅니다. 제가 포디즘에 반(反)하는 생각이 많은데, 하하하.



몇몇 부자들만 타던 자동차를 대중화한 주인공이 포드 창업자인 헨리 포드입니다. 대표님이 말씀하신 건축의 공공성과 완전히 다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웃음).



포디즘이 그 시대 대단히 혁명적인 생각이었지요. 오래 지나다 보니 포디즘을 극복하는 것이 또 다른 시대적 과제가 되기도 했지만요.



어떤 자동차를 타시나요?



17년째 재규어를 타고 있습니다. 재규어만 세 대째입니다.



1989년에 포드가 재규어를 인수해 20년 가량 운영했습니다. 재규어를 선호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차가 섹시합니다. 동물 재규어 그대로 차에서 군살을 빼고 본질적인 것만 살렸어요. 몸에 착 붙는 스키니 옷을 입은 여성 같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신형 재규어의 디자인은 글쎄…



자동차 디자인은 호불호가 갈립니다. 모든 의견을 반영하기 어렵지요. 대표님께서 디자인은 독재적이어야 한다고 하셨더군요.
 디자인은 독재적이어야 한다


디자인이 한 가지라면 독재적이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디자인은 싫으면 다른 걸 선택할 수 있어요. 특정 디자인에 대해서는 한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디자인이 독재적이지 않으면 누구도 책임지지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 건축가는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 도시가 엉망인 것은 책임을 지지 않아서예요. 우리나라 도시는 건축, 인테리어, 시설물들이 파편적으로 설계돼 누구 하나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최근 서울시 총괄건축가를 맡으셨지요.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화 사업에 대해 찬반논란이 뜨겁더군요.



그게 말이 많은데 앞뒤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서울의 세빛둥둥섬이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같은 개별적인 건축물은 스펙터클하지만 서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걷고 싶어도 도로가 끊어져서 못 걷습니다. 연속성이 없다는 얘기지요. 전체를 엮는 네트워크(연결) 작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네트워크는 현대 도시에서 매우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그 일환으로 공원화 사업이 나온 겁니다. 품질이 불량해 고가를 철거할 계획이었어요. 어차피 철거할 거라면 걸을 수 있게 만들자는 거였지요.



직접 아이디어를 내셨나요.



아니오. 철학적 배경만 제시했습니다. 아현 고가도로를 철거하기 전에 걷게 하니 사람들이 좋아하더라는 거죠. 거기에서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서울역 고가도로를 공원화하면 서울역의 동서를 이을 수 있어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보행화하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냈지요.



확실히 고가를 철거하니 시야가 넓어진다든지 생각지 못한 좋은 점들이 있더군요.



서울역 고가는 아현고가와는 또 다른 효과를 누릴 수 있어요. 고가가 서울역 광장과 이어지고 주변 건물들의 중층부를 지표면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남대문 시장, 남산길, 성곽길과도 이어지고요. 현재 서울의 성곽길 복원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게 다 이어지면 걸어서 서울 전역을 활보할 수 있게 됩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뒤 성곽길 말씀이지요.



다 포함되지요. 한양도성 성곽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계획입니다. 끊어진 길을 옛날처럼 복원하진 못하겠지만 그 길을 인식하고 그 둘레를 살려보자는 취지입니다. 600년 역사를 가진 도시라면 어디든 올드 시티(old city)와 뉴 시티(new city)가 구분됩니다. 서울은 구분할 수 없게끔 개발돼 왔는데 지금이라도 영역을 알게 하자는 것이지요.
 ‘메가시티’ 아닌 ‘메타시티’ 추구
자동차와 보행. 언뜻 생각하기에 서로 반하는 개념이다. 정 대표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자동차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자동차는 20세기 문명을 이끈 굉장히 중요한 기기입니다. 가장 큰 변화가 속도를 높여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속도 때문에 잃어버린 게 많아요. 그렇다고 속도를 줄이고 옛날식으로 퇴보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속도가 필요한 곳과 필요하지 않은 곳을 구분하자는 얘기지요. 올드 시티 영역은 자동차 없는 보행구역으로 만들어도 좋다고 봅니다. 물론 대중교통은 다녀야겠지요. 그 외 지역에서는 속도를 내고요. 뉴욕, 도쿄 역시 도심 내부에서 차를 타고 다니기 어렵습니다.



시대마다 자동차가 할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메가시티(거대도시)에 맞는 자동차의 역할이 뭘까 사업의 방향성을 고민하고 있어요. 자동차 사업이 도시에서 연결성을 지니고 지속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울시 총괄건축가로 부임하면서 메가시티라는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대신 메타시티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그대로 해석하면 기존의 도시를 뛰어넘는 초(超)도시 정도인데 공유하고 연결하는 ‘성찰적 도시’라고 합니다. 도시의 거대화가 우리 삶을 낫게 한다고 보지 않거든요. 주어진 영역 안에서 내적 성장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발보다는 재생, 랜드마크보다는 네트워크가 중요하다는 거지요. 그런 시대에 자동차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자동차는 아직 원시적인 기계입니다. 오감을 동원하고 온 몸의 기관을 다 써야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21세기에 이런 기계가 어디 있습니까. 아직 진화하지 못한 겁니다. 사람들이 자동차에서 보내는 시간을 생각하면 거주기능이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저 움직이는 이동수단이 아니라 제2의 주거지로서 기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어쩌면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그 시간을 대부분 소모한다고 여기거든요. 소모하지 않고 뭔가 얻을 수 있는 시간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자동차를 탈 때마다 느낍니다.



가끔 고객들에게 큰 돈을 들여 자동차를 구입하는 이유를 물으면 또 다른 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투자하는 것이 아깝지 않다고 답합니다. 자동차를 기계적인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본다는 면에서 자동차가 발전해나갈 방향을 다시 생각해봐야겠습니다. 10년 안에 자동차의 모습이 많이 바뀔 겁니다. 자율주행차(무인차)들이 도시를 다니게 되면 자동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지겠지요. 물론 현재와 같은 내연기관의 자동차에서 이런 변화가 가능할지, 전기차로 바뀌어야 할지 그에 대한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요.



자동차를 모바일 스페이스(mobile space)로 정의하는 때가 곧 올 거라 봅니다.
 새로운 자동차의 역할 고민
자동차가 집과 같은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둘의 대화는 더 풍성해졌다.



신형 링컨이 출시됐는데 디자인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인 디자이너 강수영씨가 포드 본사에서 인테리어를 총괄하고 있어요. 강 디자이너에게 어디서 영감을 얻느냐고 물어보니 건축물이라고 답하더군요. 자동차와 건축은 확실히 연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자동차도 어쨌든 삶을 보내는 공간이니까 건축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자동차의 차체가 외부환경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대표님은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시나요.



늘 땅에서 받습니다. 건축물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어요. 언젠가는 다 무너집니다. 중력 때문에 무너지고, 요즘은 경제적 이유로 무너지더군요. 건축 자체나 인공구조물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거기에 살았다는, 그 진실이지요. 그것이 땅에 새겨집니다. 어떤 땅이든 다 기록이 남습니다. 어떤 것은 희미하게 남고 잘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땅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그래서 건물을 설계할 때 먼저 땅에 있는 기록을 들춰내야 합니다. 이게 바로 터의 무늬, 터 무늬입니다. ‘터무니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여기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터에 새겨진 무늬를 다 지우고 짓는 집이 아파트입니다. 이건 터무니없는 집인 셈이지요. 터무니 있는 삶을 살려면 땅의 기록을 다 밝혀내야 합니다. 땅이 어떤 집이 되고 싶다고 요구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건축가입니다. 땅을 보지 않으면 어떤 설계도 할 수 없습니다. 현장에 가보고 땅과 관련한 지도, 책 같은 기록을 다 찾아서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면 땅이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땅이 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때 고통스러워요.



어떤 곳에서 땅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까.



평평한 땅은 설계하기가 제일 쉬울 것 같지만 제일 어렵습니다. 까다로워 보이는 땅이 오히려 사연이 많아 기록을 찾기가 쉬워요. 아주 잘 생긴 땅은 설계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주택단지를 만든다고 축대를 다 세워놓으면 무슨 집을 지어야 할지 모른다는 거죠. 택지 조성 이전을 밝혀내야 하는데 이건 완전 증거 인멸입니다.



땅이 굉장히 중요하군요. 그렇게 힘들게 지은 집이면 편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집이 불편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뭘까 궁금했어요. 자동차는 실용성이 무척 중요하거든요.



자동차는 불편하면 안 됩니다. 차와 건축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건축은 땅을 점거하지만 자동차는 땅을 점거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집이 기능적이라고 해봐야 그 안에서 얼마나 차이가 날까요. 아무리 기능적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그게 그겁니다. 가장 기능적인 집이 아파트지요. 집을 붙여놓으니 사생활을 지키려고 판으로 다 가려놨어요. 방에 들어가면 아들, 딸이 뭘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옆 집에서 누가 죽어도 모르지요. 주차장에서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앞에까지 가니 공동체가 뭔지 알 수 없어요. 여기서 가족, 공동체가 다 무너집니다. 이건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붙어 사는 겁니다.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생각 없는 삶이지요. 생각은 불편함에서 비롯됩니다. 방과 방을 가로질러 가면서, 문을 두드리고 열어주면서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생깁니다. 누군가 ‘기분 좋은 불편함’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서양의 주택은 본능적인 것을 해결하는 공간, 일하는 공간 둘뿐이지만 우리나라 옛집은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랑방, 정자처럼 생각하는 공간들입니다. 이 공간을 되찾아야 합니다.



땅 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을 하면서 시내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언젠가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아야지 생각만 하고 있어요.



이미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는 공간이 바뀌면 삶이 달라지고 세계가 달라집니다.
한 시간여의 인터뷰는 집과 자동차가 단순히 소유물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결정 짓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려줬다.
 건축가는 일종의 성직(聖職)
승 대표는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부터 11년 동안 한국 건축계의 대부라 불리는 고(故) 김수근의 공간 연구소에서 일했다. 이 때 국립중앙박물관, 과천 서울대공원, 서울 차병원, 주미한국대사관저, 경동교회, 서울 법원 청사 등의 건축에 참여했다. 김수근 사후 독자적인 건축 철학을 고민하다 1989년 이로재를 세우고 수졸당, 수백당, 웰콤시티,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등을 설계해 한국건축 문화대상 등을 수상하며 명성을 떨쳤다. 정 대표는 한국 수입차 업계 1세대로 1992년 포드와 인연을 맺어 2001년부터 포드코리아를 맡고 있다.



건축설계를 하신지 참 오래됐습니다.



대학 졸업하기 전부터 김수근 선생님 회사에서 일했으니 오래됐지요. 그때가 1974년 말이었어요. 그럼에도 건축에 대해 계속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저도 아직 자동차를 잘 모르겠습니다. 건축계에서는 70대가 돼야 전성기를 맞는다고 하던데요.



그 나이에 걸작을 내놓은 건축가들이 많지요. 브라질의 행정수도 브라질리아를 설계한 브라질 건축가 오스카르 니마이어는 104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99세에 새로 결혼을 하기도 했습니다(웃음).



공간 연구소에 원해서 간 게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교수님 소개로 일하게 됐는데 김수근 선생님이 워낙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라. 당시 군부에 시달렸잖아요. 직장에서까지 눌려 살긴 싫었거든요. 그런데 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가만 보면 1970년대 학번이 가장 억압받은 세대 같아요. 학생운동을 많이 했지만 낀 세대라 두각을 나타나지 못했지요. 영화 ‘국제시장’을 봤는데 이북에서 내려온 제 아버지도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그 시절이 눈에 생생했습니다. 우리 세대는 그 세대처럼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기억나는 건 새로운 시험 제도가 많이 생겨 안 본 시험이 없었다는 겁니다.



제가 그 시험들의 마지막을 치른 세대입니다. 부모님 바람대로 공대에 진학했지만 언제나 건축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건축을 하려면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정해진 틀에서 일하다 보니 되돌아보면 그런 능력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꿈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원래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로 신학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건축이 신학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축으로 사람이 바뀌니까요. 부부가 살다 보면 닮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 공간에 살기 때문이에요. 건축물을 부동산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건축을 폄하하고 우리가 사는 공간을 욕망의 도구로 만들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건축하는 사람들은 소심해요. 이렇게 선을 그으면 이 사람이 이렇게 살게 되기 때문에 함부로 선을 못 긋습니다. 이 선을 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정을 못하다 날밤을 새우곤 해요. 남의 귀중한 삶을 좌지우지 하기 때문에 굉장히 소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건축가를 일종의 성직(聖職)이라고 보는 거지요. 그림을 잘 그리거나 수학을 잘한다고 될 수 있는 직업이 아닙니다.
 “ 시대가 나를 대들게 만들어”


건축이 집 주인의 삶을 바꿀 뿐 아니라 또 다른 공적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하셨지요. 자동차는 공공의 영역에 영향을 많이 끼치지만 집은 온전히 사적인 소유물 아닌가요?



집 주인에게 사용권이 있는 것이지 소유권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10층 건물 옆에 100층 건물을 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설계를 맡을 때 건축주에게 말해요. ‘이건 당신 집이 아닙니다’라고. 여기에 동의해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기업은 특히 그렇고요. 기업은 개인 소유가 아니니 공공적 가치가 필요하지요. 우리나라 기업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문제입니다. 그래서 기업 관련 일을 많이 못하는 것 같아요(웃음).



대표님을 얘기할 때 ‘빈자의 미학’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한 미학입니다. 가졌음에도 나누고 절제할 줄 아는 것이지요. 높일 수 있지만 낮추고, 채울 수 있지만 비우고 그러면서 나눔과 쓰임, 비움의 중요성을 알아가는 겁니다.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과 메타시티 역시 빈자의 미학과 통합니다. 1992년에 금호동 달동네에서 공동마당, 우물 같은 것을 보고 처음 그 말을 썼어요. 그때 모든 걸 다 알고 만든 건 아닙니다. 어떤 것은 아주 막연했어요.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선배 한 분이 ‘정말 아름다운 얘기니까 지킬 수 있게 노력하라’고 당부하더군요. 당시 ‘두고 보십시오. 반드시 지킬 겁니다’라고 답했는데 건축을 할수록 이 말이 가진 가치를 알 것 같아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추구하는 방향은 그대로지요?



기본 맥은 바뀌지 않습니다. 다만 더 깊어지고 넓어졌어요. 나를 가두기 위해,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배수진을 치고 한계를 설정한 겁니다. 밖에 나가면 불안하니까. 안에 있으면 자유롭습니다. 나에게는 빈자의 미학이 건축에서 진리입니다. 그 외연이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지는 거지요.



스스로 어떤 건축가라고 생각하십니까.



건축은 시대를 추종하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시대에 저항하기도 합니다. 시대에 추종해 휘황찬란하게 사는 건축가도 많지만 나는 저항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시대에 저항하는 사람은 배부를 수 없지요. 주류가 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비주류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물을 설계한 적이 없어요.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라는 얘기를 듣는 것이 희한할 정도지요.



원래 반항하는 성향이 있었나요.



흠, 그렇지 않으려고 하는데 시대가 나를 대들게 만듭니다.



70대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오래 살아야지요.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수하지 않는 건축을 한번은 만들어야 하니까요. 이제까지는 실수투성이였어요.



자신에게 너무 박한 것 아닙니까.



후할 수가 없습니다. 모자란 것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습니다.

- 글 최은경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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