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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이 잠에서 깨어날 때

거인이 잠에서 깨어날 때

10년만의 신작이다. 소설가 이시구로 가즈오가 지난 3월 신저 ‘땅에 묻힌 거인’을 출간했다. 이시구로는 이름과 달리 영국인이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 때 영국으로 건너간 이래 그곳에서 성장했다. 1982년 첫 작품 ‘창백한 언덕 풍경’을 시작으로 ‘우리가 고아였을 때’ 등의 소설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989년에 ‘남아 있는 나날’로 맨부커상을 수상하고, 2005년 ‘나를 보내지 마’로 또 한 번 맨부커상 후보에 오르는 등 영국 문학계에선 잘 알려진 이름이다.

오랜 공백을 깨고 나온 ‘땅에 묻힌 거인’은 또 평단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판타지 소설이기 때문이다. 시대적인 배경은 고대 영국, 아서 왕이 영국에서 색슨족을 물리친 직후다. 역사적인 배경을 차용했지만 역사에 충실하진 않다. 그 대신 괴물, 요정, 용 등 판타지 요소를 가미했다. 주인공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모험을 떠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모험 도중 동료들을 하나둘씩 만난다는 점에서도 이 소설은 기존 판타지 소설의 구도를 성실하게 따른다.

장르 문학의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은 이시구로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다. 탐정소설의 틀을 빌린 ‘우리가 고아였을 때’나 SF적 요소를 가미한 ‘나를 보내지 마’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이시구로의 작품이 장르 문학으로 분류되지 않는 이유는 작중의 장르 문학적 요소가 대부분 시늉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땅에 묻힌 거인’ 역시 마찬가지다. 괴물, 요정 등이 종종 언급되지만 실제로 등장하거나 등장인물에게 영향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 용은 이 소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모습을 드러내는 부분은 몇 쪽에 지나지 않는다. 제목에도 등장하는 거인은 실제 거인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대한 은유임이 후반부에 밝혀진다.

보다 중요한 요소는 따로 있다. 이 소설 속 모든 인물은 원인 모를 집단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언제 시작됐는지, 기억이 돌아오기는 할지 기약은 없다. “이 공동체는 과거를 거의 입밖에 내지 않는다. 금기는 아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과거가 늪지대에 짙게 드리운 안개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는 얘기다. 마을 사람들의 머리 속엔 과거의 일 자체가 아예 떠오르지 않는다. 심지어 아주 가까운 과거조차도 그렇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판타지의 탈을 쓴 재난물에 가깝다. 어느날 시력을 잃게 된 인류를 다룬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나 갑작스런 안개로 세상이 혼돈에 휩싸이는 스티븐 킹의 ‘미스트’와 흡사한 구조다.

모든 사람이 기억 상실에 빠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시구로는 주인공으로 브리튼족 노부부 액슬과 베아트리체를 내세워 기억 상실의 세계를 탐험한다. 마을에서 남들처럼 평범한 나날을 보내던 이 늙은 부부는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아들을 찾기 위해 어느날 돌연 마을을 떠난다. 문제는 이 부부의 기억 역시 거의 백지 상태라는 점이다. 찾겠다고 나선 아들이 왜 자신들과 떨어져 있는지, 심지어 그 아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이들은 확신하지 못한다.

기억 상실을 다룬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이 소설도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일부 갖추고 있다. 사람들은 왜 기억을 잃어버렸을까? 모두가 기억을 잃기 전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나? 모험 도중 만나는 색슨족 전사와 가웨인 경(맞다, 원탁의 기사 가웨인이다)은 액슬을 알아보는 듯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떠올리지 못한다. 기억 상실의 진상을 알고 있는 듯한 수도승들은 비밀스러운 의식을 행하면서 주인공 일행을 해하려 한다. 이처럼 드러날 듯 말 듯한 진상과의 술래잡기는 이 소설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중심 소재는 액슬과 베아트리체의 사랑이다. 늙은 부부 간의 사랑은 기억과 망각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려는 이시구로의 의도에 딱 맞는 소재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왔음에도 아무런 추억도 공유하지 않는 이들의 사랑은 끈끈한 듯 위태롭다. 액슬은 베아트리체를 ‘공주님’이라 부르며 아끼고, 베아트리체는 틈이 날 때마다 액슬의 어깨에 기대는 등 이 부부는 모험 도중 끊임없이 서로의 애정을 과시한다. 그러면서도 “함께 나눈 추억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서로의 사랑을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 것만으로도 베아트리체는 남편과의 사랑이 덧없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이 시점부터 두 부부의 모험은 ‘아들 찾기’에서 ‘기억 찾기’로 바뀐다. 액슬과 베아트리체에게 ‘기억 찾기’는 궁극적으로 ‘사랑 찾기’다.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찾아야 비로소 그 사랑이 확고한 것으로 남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베아트리체는 말한다. “우리의 사랑은 비가 그쳤는데도 젖은 잎사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것은 아닐까? 기억이 없다면 우리의 사랑도 점차 옅어지다가 사라지고 말지도 몰라.”

‘땅에 묻힌 거인’은 일반적인 재난물과도 다르다. ‘눈 먼 자들의 도시’나 ‘미스트’에서 집단 재난 사태가 말 그대로 재앙인 반면 ‘땅에 묻힌 거인’에선 기억상실이 과연 재난인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기억 상실의 진상을 아는 한 수도승은 기억을 찾으려 애쓰는 베아트리체에게 이렇게 묻는다. “부인은 정말로 이 안개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까? 차라리 잊어버리는 편이 나을 기억도 있지 않을까요?” 그의 말대로 베아트리체는 기억이 조금씩 돌아올수록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마침내 드러난 진실 앞에서, 액슬과 베아트리체는 서로의 사랑이 아름다운 기억이 아닌 망각에 힘입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망각 덕분에 삶을 되찾은 건 액슬과 베아트리체뿐만이 아니다. 소설 전체에 걸쳐서 액슬과 베아트리체의 사랑은 브리튼족과 색슨족 사이의 평화와 대비를 이룬다. 전쟁으로 큰 상처를 입은 브리튼족과 색슨족 역시 망각 덕분에 증오의 역사를 잊고 뒤섞여 살아가는 것이다. 대지를 뒤덮은 망각의 안개는 그들에게 약이었을까, 독이었을까? 이야기는 마침내 안개가 걷히고 “땅에 묻힌 거인이 깨어났을 때” 벌어질 참극을 예고하며 막을 내린다.

여기서 이시구로에게 한 가지 혐의가 발생한다. 액슬과 베아트리체의 사랑, 브리튼족과 색슨족의 평화는 망각 덕분에 가능했다. 망각에서 깨어나자 곧장 속절없이 무너질 처지다. 이시구로는 망각을 옹호하는 것인가? 색슨족 전사 위스턴은 후반부에 망각의 원천을 소멸시키고 그 땅에 혼돈과 파괴를 재차 불러 일으킨다. 순전히 브리튼족을 향한 증오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위스턴은 이 행동으로 인해 자기 자신 역시 복수의 대상이 되는 처지에 놓이고 만다. 어떻게 생각해도 위스턴에 대한 시각이 그리 고와 보이진 않는다.

망각은 문제를 푸는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다. 망각 속으로 사라진 문제는 언제든지 다시 발생한다. 이시구로는 “유고슬라비아 해체, 르완다 대학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 등 현대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이 작품의 영감을 얻었으며 이 소설은 그 사건들에 대한 “비유”라고 NPR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 소설의 무대가 5~6세기 영국에 빗댄 현대적 세계라면 망각이 사랑과 평화의 근원이라는 식의 묘사는 한층 위험하다. 한때 피 흘리는 전쟁을 겪었던 이들이 오늘날 평화롭게 지내는 이유는 망각 때문이 아니라 철저한 기억과 사죄, 반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럼에도 이시구로는 망각에서 풀려난 이후의 세계를 비참하고 끔찍한 파괴의 현장 이상으로는 묘사하지 않는다. 망각 속에서 그토록 끈끈했던 액슬과 베아트리체의 사랑 역시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위기에 처한다.

그렇다면 망각 속에 머무르는 것이 해답이었단 말인가? 소설 속에서 망각을 수호하는 한 기사는 이렇게 호소한다. “제발 옛 상처가 아물기까지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이 나라가 망각 속에서 안식을 찾도록 내버려 두시란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이시구로 자신의 것처럼 들렸다면 나의 과민한 반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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