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트라우마 입은 푸틴
심리적 트라우마 입은 푸틴
“러시아에 영광이 있으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선언에 이어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감동에 찬 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 다음 푸틴 대통령은 자리에 앉아 미소를 머금으며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덕담을 나눴다. 2005년 5월 9일 맑은 날 오후였다. 두 사람 뒤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지도자들이 보였다. 그들 모두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옛 소련권에선 ‘위대한 애국전쟁’으로 부른다) 승리 6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려고 모스크바에 모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지난 5월 9일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 70주년 기념행사는 60주년 때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의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듯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를 제외하곤 서방 지도자가 단 1명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포함해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옛 소련권 독재자들이 단촐하게 참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그들과 함께 붉은광장에서 웅장한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도 참석하기로 했지만 막판에 취소했다. 그러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행사 당일을 피해 그 다음날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또 메르켈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리 70주년 기념식의 일환으로 진행된 무명용사묘 헌화식에 참석했다.
모스크바 소재 싱크탱크인 러시아 외교국방정책위원회의 표도르 루캬노프 회장은 “서방의 불참으로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와 서방이 돌이킬 수 없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반면 중국 국가주석의 참석은 러시아의 새로운 외교 방향을 보여준다.”
나치군의 872일간 포위를 견뎌낸 소련 도시 레닌그라드(현 지명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인 푸틴 대통령은 서방 보이콧의 의미를 축소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모욕감을 감추진 못했다. 지난 4월 연례 국민과의 대화에서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동맹국 수반들의 러시아 승전 행사 참석을 “금지한다”고 비난했다.
러시아 관리들은 훨씬 강한 표현을 사용했다. 블라디미르 치조프 유럽연합(EU) 주재 러시아 대사는 서방의 보이콧이 “나치와 싸우다 숨진 소련 장병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매우 중시한다. 그 전쟁으로 소련군과 민간인 2000만 명 이상이 숨졌고 많은 지역이 폐허가 됐다. 1945년 5월 마침내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환호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행복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지난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승전일을 “가장 중요하고 경건한 기념일”이라고 불렀다. 올해의 승전 기념일 직전 모스크바 중심부는 전시 영웅의 초상화들로 장식됐고, 스탈린그라드(현 지명 볼고그라드) 전투에서 숨진 소련군 100만 명 이상을 기리는 거대한 기념관은 대규모 보수 공사로 새 단장했다.
그러나 러시아 승전 기념일은 전몰자의 넋을 기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크라이나군과 동부 친러시아 반군의 휴전이 물거품이 될 지경으로 치닫는 가운데 러시아는 붉은광장 퍼레이드에서 군사적 위용을 자랑했다. 장병 1만5000명과 아르마타 T-14 탱크, 전투기 150대 등 최신예 무기가 동원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반군 지원에 맞서 서방이 엄격한 제재를 가하고, 나토가 러시아 턱밑까지 확장되고, 미군 공수부대와 영국 군사고문단이 우크라이나군의 훈련을 위해 파견되자 크렘린은 러시아가 또 다시 적에게 포위됐다고 주장한다. 지난 4월 말 아나톨리 시도로프 러시아 서부군 사령관은 미국이 세계 지배를 노리고 러시아를 상대로 ‘하이브리드 전쟁’을 벌인다고 비난했다. 전면전 대신 정보전과 사이버전, 경제적 압박 등 비군사적 방법을 이용해 상대국을 뒤흔드는 전술을 가리킨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반서방 감정도 거세지고 있다. 최근 러시아에서 득세한 공격적인 국수주의 단체 국가해방운동(NOD)의 회원인 콘스탄틴 돌기레프는 “러시아인이 서방은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 건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같은 NOD 회원인 다니일 레빈스키는 “이웃을 초청했는데 그들이 집 밖에 앉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총을 겨눈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관영 미디어는 반서방 감정을 부추기는 동시에 서방 비방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친다. 그 결과 러시아인 대다수는 지난해 마이단 시위 후 정권을 잡은 우크라이나 현 정부가 ‘파시스트 군사정부’라고 믿는다. 최근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의회에 진출한 극우 정당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처럼 크렘린은 파시즘 망령을 불러일으키면서 끔찍한 전시 기억을 상기시키려고 애쓴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하야시킨 마이단 봉기를 ‘신나치주의’ 쿠데타라고 불렀다. 반면 크렘린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반군은 지금의 내전을 제2차 세계대전의 연장전으로 생각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예브게니 로고프(90)는 지난 4월 전쟁 기념 행사에서 “미국은 과거 우리의 전시 우방이었지만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파시스트 정부를 돕고 있다”고 말했다. 역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장교로 참전한 블라디미르(93, 성은 밝히지 않았다)는 “미국이 러시아를 파괴하려 한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크렘린은 그 전쟁의 역사적 재해석도 금지한다. 지난해 푸틴 대통령이 서명한 법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붉은군대)이나 소련 지도자의 역할을 ‘왜곡’하는 것은 범죄행위로 최고 징역 5년 형 감이다.
예를 들어 나치 독일과 소련이 동유럽을 분할 지배하기로 합의한 1939년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밀약(Molotov–Ribbentrop Pact)’이나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진군할 때 자행한 집단 성폭행을 거론하는 것조차 위험하다는 뜻이다.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전시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금지됐다. 근년 들어 러시아는 스탈린의 명예 회복을 추진했다. 또 푸틴 대통령은 1961년 개명된 볼고그라드를 다시 스탈린그라드로 바꾸는 안을 지지한다.
크렘린 대변인에서 러시아 정부 비판자로 변신한 스타니슬라프 벨코프스키는 “푸틴 대통령은 스탈린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국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그가 굴라그(강제노동수용소)를 부활시킬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국제 무대에선 큰 문제를 해결할 위치에 있는 자신이 스탈린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따라서 러시아 승전 기념행사에 서방 지도자들이 참석을 거부한 것은 푸틴 대통령으로선 매우 불쾌한 경험이다. 서방의 보이콧은 그 자신의 이미지를 손상시킨 심리적 트라우마가 됐다.”
벨코프스키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로 인해 우크라이나 상황에 중대한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런 모욕을 잊거나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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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지난 5월 9일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 70주년 기념행사는 60주년 때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의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듯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를 제외하곤 서방 지도자가 단 1명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포함해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옛 소련권 독재자들이 단촐하게 참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그들과 함께 붉은광장에서 웅장한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도 참석하기로 했지만 막판에 취소했다. 그러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행사 당일을 피해 그 다음날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또 메르켈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리 70주년 기념식의 일환으로 진행된 무명용사묘 헌화식에 참석했다.
모스크바 소재 싱크탱크인 러시아 외교국방정책위원회의 표도르 루캬노프 회장은 “서방의 불참으로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와 서방이 돌이킬 수 없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반면 중국 국가주석의 참석은 러시아의 새로운 외교 방향을 보여준다.”
나치군의 872일간 포위를 견뎌낸 소련 도시 레닌그라드(현 지명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인 푸틴 대통령은 서방 보이콧의 의미를 축소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모욕감을 감추진 못했다. 지난 4월 연례 국민과의 대화에서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동맹국 수반들의 러시아 승전 행사 참석을 “금지한다”고 비난했다.
러시아 관리들은 훨씬 강한 표현을 사용했다. 블라디미르 치조프 유럽연합(EU) 주재 러시아 대사는 서방의 보이콧이 “나치와 싸우다 숨진 소련 장병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매우 중시한다. 그 전쟁으로 소련군과 민간인 2000만 명 이상이 숨졌고 많은 지역이 폐허가 됐다. 1945년 5월 마침내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환호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행복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지난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승전일을 “가장 중요하고 경건한 기념일”이라고 불렀다. 올해의 승전 기념일 직전 모스크바 중심부는 전시 영웅의 초상화들로 장식됐고, 스탈린그라드(현 지명 볼고그라드) 전투에서 숨진 소련군 100만 명 이상을 기리는 거대한 기념관은 대규모 보수 공사로 새 단장했다.
그러나 러시아 승전 기념일은 전몰자의 넋을 기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크라이나군과 동부 친러시아 반군의 휴전이 물거품이 될 지경으로 치닫는 가운데 러시아는 붉은광장 퍼레이드에서 군사적 위용을 자랑했다. 장병 1만5000명과 아르마타 T-14 탱크, 전투기 150대 등 최신예 무기가 동원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반군 지원에 맞서 서방이 엄격한 제재를 가하고, 나토가 러시아 턱밑까지 확장되고, 미군 공수부대와 영국 군사고문단이 우크라이나군의 훈련을 위해 파견되자 크렘린은 러시아가 또 다시 적에게 포위됐다고 주장한다. 지난 4월 말 아나톨리 시도로프 러시아 서부군 사령관은 미국이 세계 지배를 노리고 러시아를 상대로 ‘하이브리드 전쟁’을 벌인다고 비난했다. 전면전 대신 정보전과 사이버전, 경제적 압박 등 비군사적 방법을 이용해 상대국을 뒤흔드는 전술을 가리킨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반서방 감정도 거세지고 있다. 최근 러시아에서 득세한 공격적인 국수주의 단체 국가해방운동(NOD)의 회원인 콘스탄틴 돌기레프는 “러시아인이 서방은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 건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같은 NOD 회원인 다니일 레빈스키는 “이웃을 초청했는데 그들이 집 밖에 앉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총을 겨눈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관영 미디어는 반서방 감정을 부추기는 동시에 서방 비방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친다. 그 결과 러시아인 대다수는 지난해 마이단 시위 후 정권을 잡은 우크라이나 현 정부가 ‘파시스트 군사정부’라고 믿는다. 최근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의회에 진출한 극우 정당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처럼 크렘린은 파시즘 망령을 불러일으키면서 끔찍한 전시 기억을 상기시키려고 애쓴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하야시킨 마이단 봉기를 ‘신나치주의’ 쿠데타라고 불렀다. 반면 크렘린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반군은 지금의 내전을 제2차 세계대전의 연장전으로 생각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예브게니 로고프(90)는 지난 4월 전쟁 기념 행사에서 “미국은 과거 우리의 전시 우방이었지만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파시스트 정부를 돕고 있다”고 말했다. 역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장교로 참전한 블라디미르(93, 성은 밝히지 않았다)는 “미국이 러시아를 파괴하려 한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크렘린은 그 전쟁의 역사적 재해석도 금지한다. 지난해 푸틴 대통령이 서명한 법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붉은군대)이나 소련 지도자의 역할을 ‘왜곡’하는 것은 범죄행위로 최고 징역 5년 형 감이다.
예를 들어 나치 독일과 소련이 동유럽을 분할 지배하기로 합의한 1939년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밀약(Molotov–Ribbentrop Pact)’이나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진군할 때 자행한 집단 성폭행을 거론하는 것조차 위험하다는 뜻이다.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전시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금지됐다. 근년 들어 러시아는 스탈린의 명예 회복을 추진했다. 또 푸틴 대통령은 1961년 개명된 볼고그라드를 다시 스탈린그라드로 바꾸는 안을 지지한다.
크렘린 대변인에서 러시아 정부 비판자로 변신한 스타니슬라프 벨코프스키는 “푸틴 대통령은 스탈린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국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그가 굴라그(강제노동수용소)를 부활시킬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국제 무대에선 큰 문제를 해결할 위치에 있는 자신이 스탈린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따라서 러시아 승전 기념행사에 서방 지도자들이 참석을 거부한 것은 푸틴 대통령으로선 매우 불쾌한 경험이다. 서방의 보이콧은 그 자신의 이미지를 손상시킨 심리적 트라우마가 됐다.”
벨코프스키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로 인해 우크라이나 상황에 중대한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런 모욕을 잊거나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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