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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본 가상현실의 역사] 과거의 순간 반복하고 꿈 속의 꿈으로 이끌고
- [영화로 본 가상현실의 역사] 과거의 순간 반복하고 꿈 속의 꿈으로 이끌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본 기억 가질 수 있어
가상현실은 비교적 오래 전 고안된 개념이다. ‘Virtual Reality’라는 단어는 프랑스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가 1938년 쓴 책에서 극장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처음 나왔다. ‘극장=가상현실’이라 비유했다. 현대적 의미의 VR은 ‘인공 현실(artificial reality)’이라는 단어로 처음 명명됐다. 미국의 컴퓨터 예술가 마이런 크루거(Myron Krueger)가 1970년대 정립했다. 1980년대 들어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재런 래니어(Jaron Lanier)가 현재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가상현실’이란 단어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원론적인 의미로 보면 모든 창조적인 콘텐트는 가상현실의 효과를 낸다. 소설은 상상력으로, 라디오는 청각을 통해, 연극이나 영화는 시청각으로 다른 삶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무서운 영화에 집중한 뒤 잠에 들면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 악몽을 꾸는 것과 같다. 다만 극에 얼마나 몰입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 무심코 켜놓은 영화로는 주인공의 이야기에 공감해 새로운 인생을 겪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상현실을 ‘몰입형 멀티미디어’라고 부른다.
1980년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무료한 일상과 달리 흥분되고 새로운 경험을, 그것도 집안에서 편안히 누워서 체험한다, 이 매혹적인 개념은 곧 사람들 사이에서 급속히 번지기 시작했다. 공학자들을 중심으로 연구가 시작됐지만 곧 철학·사회학·심리학 등에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후 가상현실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했다. 가상현실을 현실화 할 수 있는 공학적 연구(기계), 그리고 가상현실이 개발되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철학적 전망(영화)으로 나뉜다.
가상현실이 알려진 직후 수많은 공학자가 장비 개발에 뛰어 들었다. 개념을 만들고 난 뒤 불과 10년도 안돼 관련 기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컴퓨터 영상기술이 발전하면서 가상현실은 손 앞에 잡힐 것처럼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가상현실=컴퓨터-모의 생활’이다. 특히 물체의 수직·좌우 움직임을 측정할 수 있는 자이로센서와 좌우 이어폰의 소리를 다르게 만들어 입체감을 주는 스테레오가 개발되면서 가상현실 기기는 큰 도약을 이뤘다. 머리의 움직임을 감지해 그에 따라 컴퓨터 그래픽과 사운드를 맞춰주는 HMD(Head Mounted Display)가 나왔다. 머리를 움직이는 방향으로 화면 밖 영상을 보여주는 기기다. 이 기기를 쓰면 시각과 청각만으로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착각을 줄 수 있다. 흔히 가상현실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다. 가상현실 기기의 상징으로 여전히 개발 중인 기계다.
1990년대 초 개발된 초창기 HMD는 소형 브라운관 2개로 만들어져 너무 무거웠다. 기계공학 학생들 사이에선 “가상현실을 체험하려면 목디스크를 각오해야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후 LCD·LED 등 소형화된 디스플레이 패널이 개발되면서 HMD는 가벼워졌다. 영상해상도도 크게 개선돼 실제를 보는 것만큼이나 정밀한 영상을 체험할 수 있게 됐다. 이젠 일반인도 살 수 있을 만큼 가격도 저렴해져 각종 게임기기에 접목돼 있다.
2000년대 들어 개발된 것은 가상현실 촉각이다. 데이터 장갑(data glove), 데이터 슈트(data suit) 등으로 구현되고 있다. 평평한 천에 촘촘하게 압력를 주는 돌기를 심어 만든다. HMD 상에 원형으로 된 물건을 손으로 짚으면 돌기들이 그 형태를 감안해 피부에 압력을 주는 식이다. 정말로 그런 압력이 느껴질까 싶겠지만 최근 개발된 제품을 써보면 놀라울 정도다. 손이나 몸의 위치나 움직임에 따라 압력을 보정해 바닷물에 몸을 담궜을 때 느끼는 압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지나가는 해파리를 손으로 건드리면 물컹한 느낌까지 전달할 수 있다. 다만, 후각과 미각은 아직 뒤처져있다. 감각을 디지털화하려면 뚜렷하게 구분돼야 한다. 감각을 디지털화하려면 중간 어느 정도 사이에 있는 어떤 느낌을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후각이나 미각은 아날로그적인 요소가 강해 개발이 어려운 편이다.
기계가 반걸음 나갈 때 영화는 열걸음 앞서

“빨간약을 먹으면 당신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가상현실에서 벗어나 진짜 삶을 살 수 있고, 파란약을 먹으면 아무런 고민없이 가상현실에 남을 수 있다.” 참신한 아이디어로 유명한 위쇼스키 남매도 가상현실에 천착했다. [매트릭스]는 ‘가상현실의 역전’을 주장했다. 거창하고 멋지게 꾸며진 세계는 사실 가상현실에 불과하다는 설정이다. 실제 인간은 어두컴컴한 레지스탕스 아지트에 누워 디지털 신호를통해 가상현실에 뛰어든다. 네트워크를 상징하는 전화기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들어간다. 위쇼스키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사실은 가상현실일 수 있다는 사고의 전복을 꾀한다. ‘나비가 되는 꿈을 꾸고 있으니 내가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장자의 설화가 모티브가 된 영화다.
재패니메이션 [공각기동대]는 ‘가상현실의 범죄’를 떠올렸다. 일본 수상 직속의 대테러 부대 공안9과는 정체불명의 해커 ‘인 형사’를 발견한다. 사회 전 부문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대에 네크워크에 침투한 해커다. 인형사는 주가 조작, 정보 수집, 정치 공작과 테러 등 각종 범죄를 일으킨다. 불특정 다수의 인간의 기억을 해킹해 인간을 지배한다. 가상현실을 통하면 기억이나 신념, 주의, 주장 등을 바꿀 수 있단 이야기다. 이런 일이 가능해지면 뜨개질을 하던 할머니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고 IS대원이 찬송가를 부를 수도 있다. 영화는 가상현실이 인간의 행동도 변화시킬 수 있는데, 네트워크를 통하면 인간의 행동까지 해킹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인셉션]은 ‘가상현실의 이식’을 말한다. 수면 중에 꾸는 꿈을 가상현실로 조작해 기억이나 고유한 사고방식을 뒤틀어 놓는다는 이야기다. 가상현실 업계가 [인셉션]을 보다 유심히 살펴보는 이유가 있다. 바로 림보 상태와 꿈 속의 꿈이다. 림보는 잠에 들기 직전,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상태를 말한다. 약간 몽롱한 정도인데, 이 때 꿈이나 기억을 이식한다는 설정이다. 실제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를 의미하는데, 학계에선 이런 반최면 상태에 겪은 기억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다고 본다. 또 하나 꿈 속의 꿈은 가상현실 속 가상현실을 의미한다. 다층적인 기억 조작이 이어지면 본래 현실로 빠져 나오기 어려운 사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다. ‘현실’이라고 하는 어떤 기준점이 있어야 하는데 다층적인 가상현실에 빠져있으면 어디를 현실로 둬야 할지 길을 잃는다는 의미다. 길을 읽으면 자아를 잃게되고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된다는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주장이다.
나비 꿈을 꾸는 나는 나비인가, 인간인가
과학영화가 그린 가상현실은 상당히 먼 미래에나 가능하다. 하지만 보고 있자면 훨씬 더 말이 되지 않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수백명이 익사하고 한 사람이 수백명에게 병균을 퍼뜨리는데, 정부는 멍하니 뒷짐지고 서있는 모습. 현실이 오히려 가상현실 같긴 하다. 누군가 빨간약과 파란약을 꺼내놓는다면, 지금같은 때라면 빨간약을 먹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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