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서점의 책 속에서 성장했다’
‘난 서점의 책 속에서 성장했다’
영국 런던 세인트 팬크래스 역에서 마리나 워너(69)를 만났다. 워너는 데임 작위를 받았고, 옥스퍼드대학 올솔스 칼리지의 이사이며, 신화학자로 영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맨부커상의 올해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그녀가 영국·프랑스·벨기에가 공동 운영하는 고속열차 유로스타의 영국 쪽 종착역인 거대한 붉은 벽돌 건물 안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오후 1시 15분 워너가 정확히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런던 지도를 꺼내 들며 “여기서 시작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로스타를 아주 좋아한다.” 워너가 그 열차를 처음 탄 것은 파리에서 친구 에드워드 사이드(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 석학)의 베토벤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 말엔 런던-파리 왕복이 굉장한 모험이었다.”
17세 때 영국 군인이자 아마추어 역사가 겸 서적상이던 아버지와 함께 마레 지구를 거닐 던 이래 파리는 워너의 영원한 목적지가 됐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파리의 거리와 그곳을 만들고 파괴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파리 곳곳을 걸어다녔다. 옥스퍼드대학에서도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파리에 임시거처를 만들까 생각도 했다. 그레엄(그녀의 파트너인 호주인 수학자)과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곳이 파리다. 그이는 바다보다 파리를 좋아한다.”
워너는 신화(확장하자면 종교)가 우리 일상, 특히 여성의 삶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탐구하면서 작가 경력을 쌓았다. 그녀의 탐구는 잠잠하던 호수에 풍파를 일으켰다. 동정녀 성모 마리아 숭배에 관한 워너의 연구에 한 비평가는 “보그 잡지 출신 여성이 왜 종교를 건드리나?”라고 말했다(워너는 보그지에서 잠시 일했다). 그녀는 또 다른 신성불가침 영역인 잔다르크도 가차없이 비판했다. “난 모범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워너는 말했다.
소설가이기도 한 워너는 동화 전문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그녀는 동화의 기능을 두 가지로 정의했다. “첫째는 진실을 전하는 것이다. 위선과 예의를 건너뛰고 어떻게 사건이 발생했는지 알려준다. 둘째는 활짝 웃는 괴물을 문앞에 둬 다른 괴물을 겁먹게 하는 것이다. 동화는 그런 식이다. 진실을 먼저 말함으로써 진실의 실현을 막는다.” 함께 걸으며 대화하다 보니 지금의 워너를 만든 것은 그녀의 성장 스토리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녀는 영국인 아버지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성장한 반항아였다.
“5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흑백 영화필름 두 롤을 발견했다.” 그 필름은 워너의 동화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첫째 필름엔 워너의 어머니가 1944년 당시 22세로 이탈리아 라벨로에 신혼여행을 갔을 때 팔룸보 호텔 발코니에서 오렌지를 먹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카메라를 든 남자는 워너의 아버지였다. 그는 36세의 영국 왕실근위대 중령으로 별명이 ‘플럼’이었다.
플럼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돈이 없어 정착하지 못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끝무렵 이탈리아에서 길을 잃었다. 독일군이 거리 표지판을 전부 없앴기 때문이었다. 그는 안내원을 요청했다.
안내원으로 자원한 젊은 여성이 워너의 어머니 엘리아 테르줄리였다. 그녀는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주의 고아 출신으로 매우 아름다웠지만 키가 너무 컸다. “키 178cm라면 이탈리아에선 괴물이었지만 영국인 아버지가 볼 땐 대단한 미녀였다.” 플럼은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 차가 너무 크고 그는 여자보단 항구와 교량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이탈리아 풀리아주 바리에서 군목의 주례로 결혼했다. 곧 플럼은 인도에 배치됐다. 그는 엘리아를 런던으로 보내며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워너는 지도를 살펴본 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리스트리트로 향했다. 그곳엔 고서적 서점 콜린지 앤 클라크가 있었다. 서점 앞의 선반 위에 옛 문서와 인쇄물이 든 박스가 놓여 있었다. 워너는 그 문서들을 훑어보며 “난 서점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엘리아와 결혼한 후 플럼의 일생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순간은 전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었던 서점 ‘아이시스’가 폭동으로 불탔을 때였다. 그는 사막에서 영국 육군 8사단 소속으로 싸우면서 카이로를 처음 보고는 푹 빠졌다. 1952년 1월 26일 오후 반영국 폭도가 카이로 거리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신혼여행이 담긴 필름 다음의 한 롤에는 플럼의 서점이 불타는 장면이 들어 있었다. “당시 난 여섯 살이었다. 한편의 드라마 같았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며 ‘시내에 폭동이 일어났어. 셰퍼드 호텔이 약탈당했어’라고 했다. 우리 집은 나일강이 내려다 보이는 꼭대기층 아파트였다. 아버지는 발코니로 가더니 ‘맙소사!’라고 외쳤다. 나도 달려가 보니 시내엔 거대한 연기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아버지가 소유한 스탠다드 스테이셔너리 컴퍼니 사무실과 아버지의 서점이 큰 피해를 입었다. 아버지는 나만 데리고 강 건너 그곳으로 갔다. 서점이 전소된 뒤였다. “아버지는 1959년 런던에 돌아와 케임브리지에 다시 서점을 열었다.”
플럼은 가톨릭이 딸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카이로를 떠나 벨기에로 갔다. 워너는 숲이 우거진 브뤼셀 교외에 있는 수녀원 학교에 다녔다. “우리는 교실에 줄지어 들어가며 프랑스어로 성가를 불렀다.” 워너는 길에서 갑자기 멈추고 노래를 불러 지나가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위로 최고의 성녀 잔다르크의 평온한 그림자가 떠다닌다”는 가사였다. 워너는 그때의 경험으로 잔다르크 전문가가 됐다고 믿는다. 워너는 1956년 잉글랜드 버크셔 카운티의 세인트 메리 수녀원 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성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희한하게도 남자도 되고 싶었다. “나는 아동문학가 에니드 블라이턴의 ‘페이머스 파이브’에 나오는 줄리언이 되고 싶었다. 그는 가장 나이 많고 키가 크고 건장하며 마음이 넓고 똑똑하다. 그가 나머지 4명을 이끈다.”
학교의 성탄절 연극에서 워너는 성모 마리아 역을 맡았다. 그 역할을 하려면 말과 행동, 내면의 생각 전부가 성모 마리아를 닮아야 한다는 설교를 들었다. 갑자기 교장 선생님 브리짓 수녀가 워너에게 처녀가 맞는지 캐물었다. 그녀 대부의 아들 매디 패큰햄이 보낸 편지를 수녀들이 몰래 본 것이었다.
“그 편지엔 ‘내 무릎에 널 앉히고 싶어’ 같은 글이 들어 있었다. 수녀들은 나를 탓했다. 내가 요부이며 죄의 원인이라고 꾸짖었다. 브리짓 수녀는 ‘넌 성모 마리아 역을 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회개하겠다면 고해성사를 하러 알프레드 신부에게 데려가 주겠다.’ 고해성사실에 가자 알프레드 신부는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 되풀이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아베 마리아’를 세 번 말해야 10.5했다. 가장 사소한 죄를 뉘우칠 때 하는 속죄 의식이었다. 알프레드 신부는 내가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는 브리짓 수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겐 그 일이 큰 충격이었다. 나는 나 자신과 몸이 부끄러웠고 나의 성적 성향이 두려웠다.”
다음 해 워너가 쓴 시에서 그녀가 말하는 ‘반항의 씨앗이 싹텄다. 아담과 이브에 관한 시였다. “아주 관능적인 내용이다. 이브를 뱀에 비유했다.”
그때쯤 워너는 어머니에게 애인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중에는 아버지가 집에 자주 데려오는 대학생과 교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아주 불행했고 나와 동생 로라를 시샘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침대 곁에서 읽었던 책에 관한 공책을 발견했다. 어머니는 한번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고 일본 기생처럼 평생을 살았다. 어머니는 내가 안경 쓰는 것을 한탄했다. ‘절대 똑똑한 체하지 마라. 그러면 남자들이 겁먹는다.’ 나는 어머니를 보며 독립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난 직접 돈을 벌며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워너가 성모 마리아 숭배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계기는 1972년 베트남 트랑방에서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을 목격한 것이었다. 베트남에선 ‘원죄 없는 잉태’를 기리는 성모 마리아 성당이 세워져 있었다. 당시 워너는 첫 남편인 작가 윌리엄 쇼크로스와 함께 베트남에 갔다. “논에서 물소가 한가롭게 거니는 평화로운 날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연기를 피해 달려 나오는 알몸의 소녀를 봤다. 베트남전의 참상을 고발한 악명 높은 사진에 나오는 ‘네이팜 소녀’ 킴 푹이었다. “사진에선 그 소녀에 초점을 맞췄지만 실제로 우리는 심한 화상으로 피부가 벗겨진 아기를 안고 달리는 여성들을 봤다.” 워너에겐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아기를 안은 그 어머니가 성모 마리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태비스톡 광장에 도착했다. 그곳의 난간엔 2005년 7월 폭탄테러로 숨진 13명을 추모하는 장소가 있다. 구겨진 종이컵, 셀로판지에 싸인 노란 장미, ‘런던은 그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워너는 “지금 우린 이슬람 순교를 숭배하는 세상에 산다”고 말했다. “순교가 늘어나는 게 걱정이다. 나도 관용을 원하지만 그들에게 우리 땅을 내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린 그들과 싸워야 한다.”
그 부근의 고든 광장 정원에서 워너는 용감한 무슬림 여성의 동상을 보여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특수작전국(SOE) 요원이던 암호명 ‘매들린’인 누르 이나야트 칸의 동상이다. 그녀는 잔다르크처럼 독립심과 용기, 모험심 강한 여성의 상징이다. 워너도 그런 사고방식으로 수녀원 학교에서 받은 지루한 교육을 뛰어넘어 문인으로서 학자로서 정상에 올랐다(최근 버크벡대학의 영문학창작과 교수로 임명됐다). 그녀는 동상의 명판에 쓰인 글을 큰소리로 읽었다. 10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기밀을 누설하지 않고 독일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자유!’였다.”
고든 광장 모퉁이를 돌면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이 있다. 워너는 그 건물의 9층을 가리키며 “저곳에서 죽을 뻔했다”고 말했다. “10년 전 이 병원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내가 첫 환자였다. 난소 파열이 패혈증으로 번졌다. 이 으리으리하고 번쩍이는 병동에 나 혼자였다. 겨우 걸을 수 있을 때 창가로 가서 맞은편의 웰컴 트러스트 건물에서 뜻밖의 비전을 봤다. 조각가 토머스 헤더위크의 작품인 29m 높이의 유리 조각상이 내겐 하나의 희망이었다.”
그 조각상을 더 잘 보려고 우리는 웰컴 트러스트 재단 본부로 갔다. 15t이 넘는 14만2000개의 유리구슬을 2만7000개의 단단한 철사에 묶어 만든 형상으로 ‘블라이기센(Bleigiessen)’으로 불린다. “납조각을 녹여 숟가락 뒷면에 떨어뜨린 다음 물에 담가 그 굳은 모양으로 점을 치는 섣달 그믐날 밤의 독일 풍습에서 따왔다”고 워너는 설명했다.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를 앞두고 워너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으로 나를 안내했다. 복도 끝의 유리로 덮인 나무 키오스크 안에 제러미 밴덤의 시신이 있었다. 그는 1826년 영국 최초의 비종교 대학으로 UCL을 설립했다. 워너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모든 학생이 종교에 상관없이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 그는 자신의 시신을 기증했다. 기독교에 대한 도전의 의미였다. ‘죽음 뒤의 삶은 없다. 현세가 유일한 삶이다. 따라서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마지막으로 워버그연구소 도서관에 도착하자 해가 저물었다. 워너는 열람실 입장권을 끊어 나와 함께 들어갔다. 출입구 위에는 라틴어로 ‘게으른 자는 이 문턱을 넘어가지 못한다’고 적혀 있었다. “난 이 멋진 도서관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 요즘 책을 쓸 땐 반드시 이곳을 이용한다.” 카이로, 브뤼셀, 케임브리지에 있었던 워너 아버지의 서점처럼 그녀에게 워버그 도서관은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마음의 지도인 셈이다. 워너는 나와 헤어진 후 이곳에서 어머니의 아기 살해에 관한 이야기를 주제로 한 강연을 들을 계획이었다.
나중에 워너에게 강연에서 어떤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12세기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 니자미가 쓴 페르시아 로맨스라고 답했다. 솔로몬과 시바가 서로에게 정직하지 못해 기형아를 낳은 이야기다. “그들이 서로에게 정직하다면 아이는 치료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엔 허용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나쁜 충동과 저급한 동기를 서로 이야기하며 내면 세계를 탐구한다. 상대방의 약점과 도덕적 결함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허상으로 사랑하기보다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아이가 말끔히 나았다.”
- NICHOLAS SHAKESPEARE NEWSWEEK 기자 / 번역 이원기
[ 필자 니콜라스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전기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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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15분 워너가 정확히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런던 지도를 꺼내 들며 “여기서 시작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로스타를 아주 좋아한다.” 워너가 그 열차를 처음 탄 것은 파리에서 친구 에드워드 사이드(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 석학)의 베토벤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 말엔 런던-파리 왕복이 굉장한 모험이었다.”
17세 때 영국 군인이자 아마추어 역사가 겸 서적상이던 아버지와 함께 마레 지구를 거닐 던 이래 파리는 워너의 영원한 목적지가 됐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파리의 거리와 그곳을 만들고 파괴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파리 곳곳을 걸어다녔다. 옥스퍼드대학에서도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파리에 임시거처를 만들까 생각도 했다. 그레엄(그녀의 파트너인 호주인 수학자)과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곳이 파리다. 그이는 바다보다 파리를 좋아한다.”
워너는 신화(확장하자면 종교)가 우리 일상, 특히 여성의 삶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탐구하면서 작가 경력을 쌓았다. 그녀의 탐구는 잠잠하던 호수에 풍파를 일으켰다. 동정녀 성모 마리아 숭배에 관한 워너의 연구에 한 비평가는 “보그 잡지 출신 여성이 왜 종교를 건드리나?”라고 말했다(워너는 보그지에서 잠시 일했다). 그녀는 또 다른 신성불가침 영역인 잔다르크도 가차없이 비판했다. “난 모범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워너는 말했다.
소설가이기도 한 워너는 동화 전문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그녀는 동화의 기능을 두 가지로 정의했다. “첫째는 진실을 전하는 것이다. 위선과 예의를 건너뛰고 어떻게 사건이 발생했는지 알려준다. 둘째는 활짝 웃는 괴물을 문앞에 둬 다른 괴물을 겁먹게 하는 것이다. 동화는 그런 식이다. 진실을 먼저 말함으로써 진실의 실현을 막는다.” 함께 걸으며 대화하다 보니 지금의 워너를 만든 것은 그녀의 성장 스토리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녀는 영국인 아버지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성장한 반항아였다.
“5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흑백 영화필름 두 롤을 발견했다.” 그 필름은 워너의 동화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첫째 필름엔 워너의 어머니가 1944년 당시 22세로 이탈리아 라벨로에 신혼여행을 갔을 때 팔룸보 호텔 발코니에서 오렌지를 먹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카메라를 든 남자는 워너의 아버지였다. 그는 36세의 영국 왕실근위대 중령으로 별명이 ‘플럼’이었다.
플럼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돈이 없어 정착하지 못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끝무렵 이탈리아에서 길을 잃었다. 독일군이 거리 표지판을 전부 없앴기 때문이었다. 그는 안내원을 요청했다.
안내원으로 자원한 젊은 여성이 워너의 어머니 엘리아 테르줄리였다. 그녀는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주의 고아 출신으로 매우 아름다웠지만 키가 너무 컸다. “키 178cm라면 이탈리아에선 괴물이었지만 영국인 아버지가 볼 땐 대단한 미녀였다.” 플럼은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 차가 너무 크고 그는 여자보단 항구와 교량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이탈리아 풀리아주 바리에서 군목의 주례로 결혼했다. 곧 플럼은 인도에 배치됐다. 그는 엘리아를 런던으로 보내며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워너는 지도를 살펴본 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리스트리트로 향했다. 그곳엔 고서적 서점 콜린지 앤 클라크가 있었다. 서점 앞의 선반 위에 옛 문서와 인쇄물이 든 박스가 놓여 있었다. 워너는 그 문서들을 훑어보며 “난 서점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엘리아와 결혼한 후 플럼의 일생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순간은 전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었던 서점 ‘아이시스’가 폭동으로 불탔을 때였다. 그는 사막에서 영국 육군 8사단 소속으로 싸우면서 카이로를 처음 보고는 푹 빠졌다. 1952년 1월 26일 오후 반영국 폭도가 카이로 거리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신혼여행이 담긴 필름 다음의 한 롤에는 플럼의 서점이 불타는 장면이 들어 있었다. “당시 난 여섯 살이었다. 한편의 드라마 같았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며 ‘시내에 폭동이 일어났어. 셰퍼드 호텔이 약탈당했어’라고 했다. 우리 집은 나일강이 내려다 보이는 꼭대기층 아파트였다. 아버지는 발코니로 가더니 ‘맙소사!’라고 외쳤다. 나도 달려가 보니 시내엔 거대한 연기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아버지가 소유한 스탠다드 스테이셔너리 컴퍼니 사무실과 아버지의 서점이 큰 피해를 입었다. 아버지는 나만 데리고 강 건너 그곳으로 갔다. 서점이 전소된 뒤였다. “아버지는 1959년 런던에 돌아와 케임브리지에 다시 서점을 열었다.”
플럼은 가톨릭이 딸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카이로를 떠나 벨기에로 갔다. 워너는 숲이 우거진 브뤼셀 교외에 있는 수녀원 학교에 다녔다. “우리는 교실에 줄지어 들어가며 프랑스어로 성가를 불렀다.” 워너는 길에서 갑자기 멈추고 노래를 불러 지나가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위로 최고의 성녀 잔다르크의 평온한 그림자가 떠다닌다”는 가사였다. 워너는 그때의 경험으로 잔다르크 전문가가 됐다고 믿는다.
‘넌 성모 마리아 역을 할 수 없어’
학교의 성탄절 연극에서 워너는 성모 마리아 역을 맡았다. 그 역할을 하려면 말과 행동, 내면의 생각 전부가 성모 마리아를 닮아야 한다는 설교를 들었다. 갑자기 교장 선생님 브리짓 수녀가 워너에게 처녀가 맞는지 캐물었다. 그녀 대부의 아들 매디 패큰햄이 보낸 편지를 수녀들이 몰래 본 것이었다.
“그 편지엔 ‘내 무릎에 널 앉히고 싶어’ 같은 글이 들어 있었다. 수녀들은 나를 탓했다. 내가 요부이며 죄의 원인이라고 꾸짖었다. 브리짓 수녀는 ‘넌 성모 마리아 역을 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회개하겠다면 고해성사를 하러 알프레드 신부에게 데려가 주겠다.’ 고해성사실에 가자 알프레드 신부는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 되풀이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아베 마리아’를 세 번 말해야 10.5했다. 가장 사소한 죄를 뉘우칠 때 하는 속죄 의식이었다. 알프레드 신부는 내가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는 브리짓 수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겐 그 일이 큰 충격이었다. 나는 나 자신과 몸이 부끄러웠고 나의 성적 성향이 두려웠다.”
다음 해 워너가 쓴 시에서 그녀가 말하는 ‘반항의 씨앗이 싹텄다. 아담과 이브에 관한 시였다. “아주 관능적인 내용이다. 이브를 뱀에 비유했다.”
그때쯤 워너는 어머니에게 애인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중에는 아버지가 집에 자주 데려오는 대학생과 교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아주 불행했고 나와 동생 로라를 시샘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침대 곁에서 읽었던 책에 관한 공책을 발견했다. 어머니는 한번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고 일본 기생처럼 평생을 살았다. 어머니는 내가 안경 쓰는 것을 한탄했다. ‘절대 똑똑한 체하지 마라. 그러면 남자들이 겁먹는다.’ 나는 어머니를 보며 독립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난 직접 돈을 벌며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워너가 성모 마리아 숭배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계기는 1972년 베트남 트랑방에서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을 목격한 것이었다. 베트남에선 ‘원죄 없는 잉태’를 기리는 성모 마리아 성당이 세워져 있었다. 당시 워너는 첫 남편인 작가 윌리엄 쇼크로스와 함께 베트남에 갔다. “논에서 물소가 한가롭게 거니는 평화로운 날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연기를 피해 달려 나오는 알몸의 소녀를 봤다. 베트남전의 참상을 고발한 악명 높은 사진에 나오는 ‘네이팜 소녀’ 킴 푹이었다. “사진에선 그 소녀에 초점을 맞췄지만 실제로 우리는 심한 화상으로 피부가 벗겨진 아기를 안고 달리는 여성들을 봤다.” 워너에겐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아기를 안은 그 어머니가 성모 마리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태비스톡 광장에 도착했다. 그곳의 난간엔 2005년 7월 폭탄테러로 숨진 13명을 추모하는 장소가 있다. 구겨진 종이컵, 셀로판지에 싸인 노란 장미, ‘런던은 그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워너는 “지금 우린 이슬람 순교를 숭배하는 세상에 산다”고 말했다. “순교가 늘어나는 게 걱정이다. 나도 관용을 원하지만 그들에게 우리 땅을 내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린 그들과 싸워야 한다.”
그 부근의 고든 광장 정원에서 워너는 용감한 무슬림 여성의 동상을 보여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특수작전국(SOE) 요원이던 암호명 ‘매들린’인 누르 이나야트 칸의 동상이다. 그녀는 잔다르크처럼 독립심과 용기, 모험심 강한 여성의 상징이다. 워너도 그런 사고방식으로 수녀원 학교에서 받은 지루한 교육을 뛰어넘어 문인으로서 학자로서 정상에 올랐다(최근 버크벡대학의 영문학창작과 교수로 임명됐다). 그녀는 동상의 명판에 쓰인 글을 큰소리로 읽었다. 10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기밀을 누설하지 않고 독일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자유!’였다.”
고든 광장 모퉁이를 돌면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이 있다. 워너는 그 건물의 9층을 가리키며 “저곳에서 죽을 뻔했다”고 말했다. “10년 전 이 병원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내가 첫 환자였다. 난소 파열이 패혈증으로 번졌다. 이 으리으리하고 번쩍이는 병동에 나 혼자였다. 겨우 걸을 수 있을 때 창가로 가서 맞은편의 웰컴 트러스트 건물에서 뜻밖의 비전을 봤다. 조각가 토머스 헤더위크의 작품인 29m 높이의 유리 조각상이 내겐 하나의 희망이었다.”
그 조각상을 더 잘 보려고 우리는 웰컴 트러스트 재단 본부로 갔다. 15t이 넘는 14만2000개의 유리구슬을 2만7000개의 단단한 철사에 묶어 만든 형상으로 ‘블라이기센(Bleigiessen)’으로 불린다. “납조각을 녹여 숟가락 뒷면에 떨어뜨린 다음 물에 담가 그 굳은 모양으로 점을 치는 섣달 그믐날 밤의 독일 풍습에서 따왔다”고 워너는 설명했다.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를 앞두고 워너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으로 나를 안내했다. 복도 끝의 유리로 덮인 나무 키오스크 안에 제러미 밴덤의 시신이 있었다. 그는 1826년 영국 최초의 비종교 대학으로 UCL을 설립했다. 워너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모든 학생이 종교에 상관없이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 그는 자신의 시신을 기증했다. 기독교에 대한 도전의 의미였다. ‘죽음 뒤의 삶은 없다. 현세가 유일한 삶이다. 따라서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도서관은 마음의 지도
나중에 워너에게 강연에서 어떤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12세기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 니자미가 쓴 페르시아 로맨스라고 답했다. 솔로몬과 시바가 서로에게 정직하지 못해 기형아를 낳은 이야기다. “그들이 서로에게 정직하다면 아이는 치료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엔 허용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나쁜 충동과 저급한 동기를 서로 이야기하며 내면 세계를 탐구한다. 상대방의 약점과 도덕적 결함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허상으로 사랑하기보다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아이가 말끔히 나았다.”
- NICHOLAS SHAKESPEARE NEWSWEEK 기자 / 번역 이원기
[ 필자 니콜라스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전기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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