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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악룡+어부+미인이 빚은 판타지

[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악룡+어부+미인이 빚은 판타지

삐뤄춘과 탕색.
떵팅삐뤄춘(洞庭碧螺春, 이하 삐뤄춘)은 제주도 면적 만한 거대한 호수 타이후(太湖)에 우뚝 솟은 떵팅산에서 생산되는 명품 녹차다. 롱징차(龍井茶)와 더불어 중국 10대 명차의 반열에 올라있는 저장성 최고의 특산물로 방문객의 구매희망 품목 1순위다. 떵팅산은 섬으로 이루어진 서산(西山)과 수면 아래로 이어져 반도 끝에 있는 동산(東山)으로 나뉘어져 있다. 최고 품질의 삐뤄춘 생산기지인 떵팅산을 중심으로 타이후 주변에서 삐뤄춘이 출품되기에 타이후삐뤄춘이라고도 한다. 삐뤄춘은 맛도 훌륭하지만 차향이 강렬하고 신선해 예로부터 ‘혁살인향(사람 잡는 향기)’이란 애칭이 있다. 청나라 제4대 황제 캉시띠(康熙帝)가 1699년 타이후 유람선상에서 이 차를 마셔보고 감탄했다. 그래서 그자리에서 황실공차로 지정하며 푸른 소라모양의 찻잎에 걸맞은 삐뤄춘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청나라 4대 황제 캉시띠가 이름 하사
1. 타이후에서 삐뤄춘을 채취하는 차농들. 2. 전설의 삐뤄. 3. 중국에서 3번째로 큰 담수호인 타이후.
이뿐만 아니다. 삐뤄춘에 대한 민간 전설은 애틋한 사랑이 담겨있기에 원전을 살려 필자의 시각으로 재구성해봤다. 용과 사람이 어울려 살던 아주 먼 옛날 타이후의 동쪽 떵팅산에 사는 젊은 어부, 아씨양은 조업을 마치고 피곤이 몰려왔지만 집과 반대 방향인 서쪽 떵팅산이 있는 섬을 향해 열심히 노를 저어갔다. 노을이 깃드는 산 어디선가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표정이 밝아지며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아씨양의 배 앞에는 아씨양보다 먼저 온 배들이 줄지어있다. 산자락에서 어여쁜 소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산 아래에서도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소녀의 노래에 빠져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마을의 귀염둥이로 살아가는 삐뤄(碧螺)는 떵팅산에 사는 모든 이의 시름과 피로를 노래로 달래주는 아이돌이었다. 아씨양은 삐뤄의 노래를 멀리서라도 들어야 살맛이 났다. 고기도 잘 잡고 무예도 뛰어났지만 삐뤄에게 다가갈 용기는 없었다.

겨울이 끝날 무렵 서쪽 떵팅산에 흉악한 악룡(惡龍)이 나타나 마을의 평화를 위협했다. 산 위에 커다란 사당을 지어 매일 향을 피우고 달마다 공양을 바치고 해마다 어린 남녀를 몸종으로 바치라고 했다. 더구나 삐뤄를 부인으로 삼겠다고 요구했다. 마을사람들은 삐뤄를 숨기고 악룡의 요구를 거절했다. 화가 난 악룡은 거대한 파도를 일으켜 낮에 조업하던 어선을 모두 전복시켰다. 밤에는 광풍을 몰고 와 농작물을 망치고 나무와 집을 파괴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아씨양은 마을과 삐뤄를 구하러 분연히 나섰다.

달이 뜨지 않은 칠흑 같은 밤을 틈타 아씨양은 서쪽 떵팅산으로 건너갔다. 악룡은 나무를 뿌리 채 뽑아 집을 부수고 있었다. 마음대로 횡포를 부리며 마을을 유린하는 악룡의 등에 번개처럼 올라탄 아씨양은 용의 급소인 역린(逆鱗)을 향해 작살을 날렸다. 느닷없는 공격에 놀란 악룡이 하늘로 날아 오르려했지만 역린 사이를 뚫고 깊숙이 들어온 작살 때문에 허리를 곧게 펼 수 없어 땅에 떨어져 뒹굴며 발버둥을 쳤다. 악룡 위에 올라탔던 아씨양도 산등성이에 내동댕이쳐졌다. 악룡은 시뻘건 입을 벌려 독니를 드러내며 아씨양을 공격했다. 아씨양은 물러서지 않고 작살로 용의 급소를 노렸다. 7일 밤낮 동안 악룡과 아씨양의 사생결단이 산과 호수에서 벌어졌다. 무협과 판타지에서 보여주는 모든 대결이 펼쳐졌다. 악룡은 발톱을 세울 힘도 없게 되자 독버섯 같은 피를 뿜어내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버렸다. 피투성이가 된 아씨양도 산등성이에서 피를 흘리며 혼절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뿌리 채 뽑혀 죽은 나무와 부러진 가지들이 아씨양이 흘린 피에 닿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곡우 전에 차를 따서 마셔
마을사람들은 악룡을 물리친 아씨양을 마을로 데려와 상처를 치료해 줬다. 삐뤄도 매일 찾아와 간병을 했다. 의식을 겨우 차린 아씨양은 삐뤄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조차 없었다. 아씨양을 위해 각지에서 답지한 좋다는 약을 모두 써봤지만 차도가 없었다. 침상에 누워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삐뤄의 노래를 들으러 노를 저어 매일 왔었다”는 아씨양의 얘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들은 삐뤄는 그날부터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아씨양을 돌보며 틈틈이 노래를 불러줬다. 아씨양은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었지만 기력이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삐뤄가 직접 선약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약초를 찾아 산을 헤매던 삐뤄는 아씨양이 악룡과 싸우며 피를 흘린 곳에서 자그마한 어린 차나무를 발견했다. 아직은 추운 경칩 때인데도 잎을 틔우려는 새싹을 위해 삐뤄는 매일 새벽 일찍 산에 올라 입김을 따뜻하게 불어줬다. 속삭이듯 노래를 해주며 냉해를 입지 말고 잘 자라기를 기원했다. 삐뤄의 정성을 먹고 튼실하게 발아한 어린찻잎을 곡우 전에 입술로 채취해 아씨양에게 가져왔다. 차를 끓이는 향기만으로도 벌써 눈이 맑아진 아씨양은 차를 마시자 몸에 활기가 도는 것을 느끼며 혈색이 좋아졌다. 비로소 남녀는 손을 마주 잡게 됐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아씨양을 보고 삐뤄는 감격했다.

삐뤄는 수시로 산에 올라 찻잎을 입술로 물어와 차를 만들어 아씨양이 마시게 했다. 하루가 다르게 아씨양의 몸은 좋아졌다. 그러나 삐뤄는 나날이 수척해졌다. 아씨양이 침상을 벗어나 기운을 완전히 회복하는 날, 삐뤄는 숨을 거뒀다. 삐뤄가 키운 찻잎은 삐뤄의 원기가 농축된 결정체였다. 아씨양과 마을사람들은 차나무 옆에 삐뤄를 묻어줬다. 아씨양은 삐뤄의 무덤 아래 움막을 짓고 평생 동안 묘를 지키며 살았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마을 사람들이 삐뤄의 산소를 찾아왔다. 차나무가 무성한 산속에 아씨양이 있었다. 자신들은 세월 따라 늙었는데 아씨양은 젊은 청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불로장생차로 여긴 마을 사람들은 매년 봄 곡우 전에 차를 따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 차의 이름이 ‘삐뤄춘’이다.

차에 얽힌 전설과 역사는 재가공되어 다양한 산업에 영감을 주고 있다. 21세기의 차는 단순한 농작물을 넘어 문화와 관광산업의 주요 테마로 성장하고 있다. 팩트를 무시한 전설로만 치부되는 것이 아닌 성인을 위한 영화와 교육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요즘 각광받는 온라인 롤플레잉게임에서도 좋은 판타지로 활용되고 있다. 명차에 숨어있는 이야기 발굴과 스토리 탄생은 그 자체가 돈이 되는 광맥이 될 수 있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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