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슬픈 이유
설날이 슬픈 이유
나이를 먹는다고 느끼게 되는 여러 징표가 있다. 명절을 맞을 때마다 무감각해지는 것도 그중 하나다. 도대체 흥겹기는커녕 아무 감흥도 없다. 참으로 큰 문제다. 설레기는커녕 괜스레 ‘빨간 날’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어떤 때는 지겹고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최근 들어 이런 증상이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아 깜짝 놀라기도 한다. 분명 설날에 대한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다.
왜 그럴까? 언제부터 그리고 왜, 설날이 재미없는 날이 됐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명절이라고 근처 옷가게에 가서 새 옷을 사서 입는 ‘설빔 장만’의 기쁨이 사라졌다(오히려 아내와 자식에게 무언가를 해줘야 하니 부담만 백배천배 커졌다).
전통시장을 돌며 두 손 가득 음식 재료를 사오던 수고도 할 필요가 없다. 대형마트에서 평소 사는 것보다 조금 더 얹어 카트에 싣고 차로 실어 나르면 된다. 명절이라고 딱히 힘들게 쇼핑할 필요도 없지 않나. 힘을 쓸 일이 없으니 남자의 존재감도 제로다.
설날 기차표 예매도 그립다. 밤새 뜬눈으로 기다려서 고향 가는 기차표를 받아들 때의 감동은 기억 속에만 남았다(손놀림 빠른 아들놈 시켜 인터넷으로 예매하면 되니 내가 할 일이라곤 지갑에서 신용카드 꺼내는 것뿐이다). 더욱이 어린 시절 고향 가는 날 어머니는 역무원 아저씨가 나이를 물으면 꼭 한두 살 줄여서 말하라고 몇 번이나 연습시켰다(당시 미취학 아동은 요금을 받지 않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건만 이제는 나이를 속일 수도 없는데다 안절부절 하던 어머니도 작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멀리 떨어져 살다가 설날이라고 모처럼 모인 형제자매끼리 오순도순 즐기던 놀이도 변했다. 유일한 단체게임인 윷놀이가 고스톱으로 변하더니 이젠 그마저도 뒷전이다. 각자 컴퓨터나 스마트폰 게임 삼매경이다. 서로 얼굴 보고 얘기할 일이 없어졌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설날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세뱃돈이 나를 가장 슬프게 한다. 먹을 게 많아서 좋은 설날에, 세뱃돈까지 덤으로 받는다는 생각에 어른들만 보면 무조건 엎드렸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것도 잠시. 현실은 전혀 다르다. 세뱃돈 받긴커녕 직원들에게 줄 설 상여금이 문제다. 줄지 말지, 준다면 얼마를 줘야 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하다. 주고도 욕 먹는 게 명절 상여금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설날이 전혀 기쁘지 않은 건 경영자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받는 입장에서 주는 입장이라서 말이다. 설날 무렵 단골 주제인 체불임금만 해도 그렇다. 하도급 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룬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면 나쁜 사장놈이라고 주먹을 불끈 쥐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직원 상여금 챙기느라 여간 신경 쓰이지 않으니 설날이 뭐 그리 즐겁겠는가?
혹자는 신년 초 세운 계획을 다시 점검하고 새로운 계획을 설날에 다시 짤 수 있어 두 번의 설날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경영자에겐 그나마도 우울하다. 새해의 두 달이 거의 지나가는 설날 즈음엔 1분기 실적 공시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3월의 주주총회도 만만치 않다.
최근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한파만큼이나 ‘경제 한파’도 심각하다. 그래도 다시 맞는 우리의 명절이 더욱 생동감 넘치는 날이 되도록 몸과 마음을 다시 추스르자. 가족과 회사와 국가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 이상호 참좋은레져 사장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왜 그럴까? 언제부터 그리고 왜, 설날이 재미없는 날이 됐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명절이라고 근처 옷가게에 가서 새 옷을 사서 입는 ‘설빔 장만’의 기쁨이 사라졌다(오히려 아내와 자식에게 무언가를 해줘야 하니 부담만 백배천배 커졌다).
전통시장을 돌며 두 손 가득 음식 재료를 사오던 수고도 할 필요가 없다. 대형마트에서 평소 사는 것보다 조금 더 얹어 카트에 싣고 차로 실어 나르면 된다. 명절이라고 딱히 힘들게 쇼핑할 필요도 없지 않나. 힘을 쓸 일이 없으니 남자의 존재감도 제로다.
설날 기차표 예매도 그립다. 밤새 뜬눈으로 기다려서 고향 가는 기차표를 받아들 때의 감동은 기억 속에만 남았다(손놀림 빠른 아들놈 시켜 인터넷으로 예매하면 되니 내가 할 일이라곤 지갑에서 신용카드 꺼내는 것뿐이다). 더욱이 어린 시절 고향 가는 날 어머니는 역무원 아저씨가 나이를 물으면 꼭 한두 살 줄여서 말하라고 몇 번이나 연습시켰다(당시 미취학 아동은 요금을 받지 않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건만 이제는 나이를 속일 수도 없는데다 안절부절 하던 어머니도 작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멀리 떨어져 살다가 설날이라고 모처럼 모인 형제자매끼리 오순도순 즐기던 놀이도 변했다. 유일한 단체게임인 윷놀이가 고스톱으로 변하더니 이젠 그마저도 뒷전이다. 각자 컴퓨터나 스마트폰 게임 삼매경이다. 서로 얼굴 보고 얘기할 일이 없어졌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설날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세뱃돈이 나를 가장 슬프게 한다. 먹을 게 많아서 좋은 설날에, 세뱃돈까지 덤으로 받는다는 생각에 어른들만 보면 무조건 엎드렸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것도 잠시. 현실은 전혀 다르다. 세뱃돈 받긴커녕 직원들에게 줄 설 상여금이 문제다. 줄지 말지, 준다면 얼마를 줘야 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하다. 주고도 욕 먹는 게 명절 상여금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설날이 전혀 기쁘지 않은 건 경영자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받는 입장에서 주는 입장이라서 말이다. 설날 무렵 단골 주제인 체불임금만 해도 그렇다. 하도급 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룬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면 나쁜 사장놈이라고 주먹을 불끈 쥐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직원 상여금 챙기느라 여간 신경 쓰이지 않으니 설날이 뭐 그리 즐겁겠는가?
혹자는 신년 초 세운 계획을 다시 점검하고 새로운 계획을 설날에 다시 짤 수 있어 두 번의 설날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경영자에겐 그나마도 우울하다. 새해의 두 달이 거의 지나가는 설날 즈음엔 1분기 실적 공시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3월의 주주총회도 만만치 않다.
최근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한파만큼이나 ‘경제 한파’도 심각하다. 그래도 다시 맞는 우리의 명절이 더욱 생동감 넘치는 날이 되도록 몸과 마음을 다시 추스르자. 가족과 회사와 국가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 이상호 참좋은레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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