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2) 단테
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2) 단테
명품 경제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14년 4월 18일자에 “궁극의 자기계발서: 단테의 『신곡』 (The Ultimate Self-Help Book: Dante’s ‘Divine Comedy’)”이라는 제목의 에세이 기사를 실었다. 궁극의 자기계발서라는 『신곡(神曲)』의 특장(特長)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2015년은 흔히 단테라 불리는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1265~1321)의 탄생 750주년이었다. 생각보다 더 오래 전 사람이다. 중세 말기 사람이다. 문인·정치가·군인이었다. 1289년에는 말을 타고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 이기면 관군, 지면 반군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현실이다. 고향 피렌체의 당파 싸움에서 지는 쪽에 가담했기 때문에 로마 출장 중이었던 1302년 궐석 재판에서 화형(火刑)에 처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죄는 부패와 횡령이었다. 근거가 없었다. 죽을 때까지 20여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우선 단테가 얼마나 위대한지 한번 따져보자. 단테는 중세의 문을 닫고 르네상스의 문을 연 선구자다. 그가 모국어 문학의 길을 제시했기에 페트라르카·보카치오·밀턴·초서의 문학이 탄생했다. 모국어가 라틴어보다 오히려 우월하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한글 창제와 같은 충격이었다. 문학은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며 대중이 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혁명적이었다.
미국 태생의 영국 문인인 T. S. 엘리엇(1888~1965)은 “단테와 셰익스피어가 세계를 양분한다. 둘 사이에 3번째 인물은 없다”라고 주장했다.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는 지옥편 제3곡에서 ‘훔친’ 표현이었다. 영국 사회 비평가 존 러스킨(1819~1900)에게 단테는 “전세계의 중심적 인간”이었다. 영국 태생 프랑스 작가 사뮈엘 베케트(1906~1989)는 무신론자였지만, 죽을 때까지 『신곡』을 머리맡에 두고 애독했다.
모든 역사적 인물이 그러하듯 단테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국가와 교회가 분리돼야 국가도 강하게 되고, 교회도 강하게 된다고 봤다. 단테의 주장은 미국 헌법(1787)에 가서야 온전히 실현됐다.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단테는 당시 과학의 흐름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신곡』의 ‘천국편’에서는 과학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단테에게는 상당한 정치적인 야심이 있었다. 1300년에는 피렌체 시협의회 의장 자리에 올랐다. 고향에서 쫓겨나 유력가들의 식객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신곡』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피렌체에서 추방되고 5년 후인 1307년부터 『신곡』 집필에 착수해 사망 1년 전에 완성됐다.
『신곡』의 ‘지옥편’(1317년 출간)과 ‘연옥편’ 중 일부가 항간에 유포되면서 단테는 유명인사가 됐다. 어쩌면 그는 금의환향을 꿈꿨는지 모른다. 하지만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라벤나에서 1321년 56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 이후 수백 년 동안 피렌체는 그의 유해를 모셔오려고 시도했다. 1519년 교황 레오 10세는 미켈란젤로의 건의로 유해 반환을 라벤나 시에 명령했다. 라벤나 시당국은 유해를 한동안 숨겨버렸다. 역사는 꾸물거린다. 페렌체 시가 단테에 대한 화형 선고를 공식적으로 백지화한 것은 2008년 6월이다. 피렌체에 가면 곳곳에 단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미리 만들어둔 빈 무덤도 있다. 단테가 평생 사랑한 베아트리체를 처음 봤다는 산타 마르게리타 데이 체르키 성당도 관광명소다.
베아트리체 없는『신곡』또한 없었다. 소년 단테는 9살 때 같은 또래인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1266~1290)를 처음 봤다. 8개월 더 어린 베아트리체는 소년의 마음을 송두리째 차지했다. 그를 다시 본 것은 9년이 흐른 후였다.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였다. 서로 잘 알지도 못했다. 당시 피렌체는 인구가 8만, 파리 다음으로 유럽에서 큰 도시였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갑돌이와 갑순이’인 둘은 각기 다른 여성·남성과 결혼했다. 단테는 당시 풍습에 따라 1277년 12세에 약혼한 여성과 결혼해 3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는 부인 젬마 도나티를 자신의 작품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단테는 20세 무렵부터 베아트리체를 향한 연심(戀心)을 품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체는 24살에 사망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아픔과 망명의 아픔을 승화한 게『신곡』이다.『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신(神)의 은총’을 상징한다.『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주인공인 단테를 천국으로 안내한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성모 마리아에 버금가는 신앙의 길잡이었다.
1만4233줄로 된 장편 서사시인 『신곡』은 어떤 책인가. 로드무비의 근대적 원형이 『신곡』에 있다. 7일 동안 벌어진 일이다. 영혼이 신을 향해 떠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지옥·연옥·천국 3편(篇·cantica)으로 돼 있다. ‘지옥편’에만 예외적으로 전체 서론이 붙어 34곡(曲·canto)이고 ‘연옥편’·’천국편’은 33곡으로 돼 있다. 『신곡』의 원제는 『희극(La Commedia)』이다. 당시 어의(語義)에 따르면 ‘Commedia’는 코미디가 아니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작품이다. 최초의 단테 전기를 쓴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가 ‘신(神)의, 신성한’을 뜻하는 ‘Divina’를 붙였기에 『신곡』이 됐다. 『신곡』은 중세 문학의 백미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과 문학, 가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인 스콜라철학을 융합했다. 거기에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한 풍자까지 버무렸다. 『신곡』에서 단테는 당시 부패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역대 교황도 단테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성인이 된 교황까지도 『신곡』의 지옥에 등장시켰다. 단테를 시원적인 종교개혁가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단테의 『신곡』이 이단인지 아닌지에 대한 열띤 논의가 14세기까지도 있었다. 판정은 ‘이단 아님’이었다.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보편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중심 테마인 죄의 문제에 대해 서양과 동양의 관점이 다르다. 중세 가톨릭과 현대 가톨릭은 죄, 천국·지옥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역사적으로 『신곡』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부분은 ‘지옥편’이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기쁨보다 지옥의 형벌을 면하는 게 일차적인 인생 과제였다. 현대의 많은 신학자에게 지옥은 가마솥이 끓는 곳이 아니라 ‘신의 사랑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곳’이다. 이제 지옥을 물리적이 아니라 추상적·정신적으로 상상한다. 지옥도 살만한 곳이 된 것이다. 현대인은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자신이 웬만하면 천국·천당·낙원 같은 좋은 곳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세 유럽인들은 자신이 연옥에 가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일정 조건하에서 죗값을 면제해주는 면벌부(免罰符)가 인기였다.
이쯤 해서『신곡』을 ‘왜’ 그리고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윤리경영이 부쩍 강조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로, 대중적인 표현을 쓰자면 ‘한방에 훅 가는’ 비즈니스 환경이다. 기업 활동을 규제하는 그 많은 법을 다 지키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법 만으로는 이제 안 된다. 많은 경우 소위 ‘갑질’ 파문은 법률 위반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니다. CEO에서 인턴 사원까지 윤리·도덕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성찰이 필요하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아무래도 종교의 힘은 전근대 사회와 비교했을 때 약화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종교가 설파하는 윤리·도덕은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 새로운 연관성(relevance)를 확보하게 됐다. 종교 인구는 줄지만 영성적인 사람들의 수는 늘고 있다. 영성의 원천은 결국 전통·기성 종교다. 『신곡』은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영성 문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단테는 자신의 『신곡』을 글자 그대로, 우화적으로, 비유적으로, 그리고 도덕적 차원에서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다. 작가·화가 등에게는 영감을 주는 뮤즈(muse)가 필요하다. 베아트리체는 단테를 천상으로 이끄는 뮤즈다. 사업가에게도 뮤즈가 필요하다. 그 뮤즈가 여성이 아니더라도. 베아트리체가 등장하기 전에 나오는 것은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B.C.70~B.C.19)다. 베르길리우스는 연옥과 지옥을 견학시킨다. 둘 다 안내자다. 사업은 여정이다. 여정에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베르길리우스는 지식, 이성과 합리성을 상징한다. 기업에 꼭 필요한 가치다. 베아트리체는, 비즈니스에 필요한 이성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상징한다. 기업인마다 ‘그 무엇’은 인연일수도 있고 신의 섭리일 수도 있다. 징크스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신곡』에 나타난 사랑과 섭리의 관계를 요약하면 이렇다. 모든 덕행이나 악행은 궁극적으로 사랑의 문제다. 사랑은 우주의 근원적인 에너지다. 사랑에는 성애(性愛), 이성적·철학적인 사랑 외에 신에 대한 사랑이 있다. 신비적인 사랑이다. 신은 사랑이기 때문에 온 우주를 위해 계획을 마련했다. 이성이라는 도구를 가지고서는 인간은 신의 계획을 부분적으로만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의 사랑과 섭리를 맛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열려 있으면 우리는 신이 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
『신곡』은 영혼이 신에게로 나아가는 과정과 인간 사회가 지상의 평화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그린다. 『신곡』은 ‘어두운 숲’에서 시작된다. 어두운 숲은 종교적으로는 ‘신으로부터 영적으로 격리된 상태’를 상징한다. 세속적으로는 중년의 위기나 사업의 위기를 상징할 수 있다. 『신곡』에서 단테는 위기를 겪고 있는 35세 가량의 ‘중년’이다. 당시 사람들은 70세를 천수(天數)라고 봤다. 지옥·연옥·천국은 기업이 처한 세가지 상태… 예컨대 위기, 위기의 극복, 성공을 은유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지옥은 죄 때문에 간다. 가톨릭 교회에서 특히 중시하는 것은 칠죄종(七罪宗, seven deadly sins)이다. 칠죄종은 그 자체가 죄이면서 다른 죄와 악습을 일으키는 일곱 가지 죄다. 교만(pride), 인색(greed), 시기(envy), 분노(anger), 음욕(lust), 탐욕(gluttony), 나태(sloth). 칠죄종은 기업의 위기를 부를 수 있는 기업문화의 7대 악습으로 응용해 해석해 볼 수 있다.
『신곡』에서 지옥은 뒤집어진 원뿔 모양이다. 지옥의 상층부에는 예루살렘이 있다. 지옥 문을 넘어서면 살았을 때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산다. 지구 중심에는 사탄이 갇혀 있다. 단테에게는 배신을 가장 큰 죄로 본 듯하다. 머리가 세 개인 사탄은 카이사르를 배반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그리고 예수를 배반한 유다를 물어뜯고 있다. 역시 영적인 여정에 있어서나 사업에 있어서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림보(Limbo)’도 지옥에 있다. 림보는 덕망 있는 삶을 살았지만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가는 곳이다.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하고 충족시켜도 결정적인 것 하나, 즉 세례가 빠지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비즈니스 성공에도 그런 결정적인 것이 있지 않을까. 『단테』의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기억하지만 현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미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과거 영광의 기억에만 안주하는 기업은 비즈니스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옥 다음은 연옥이다. ‘단테가 연옥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톨릭 교회가 연옥에 대한 가르침으로 정식으로 정의한 것은 1274년이다. 단테는 최초로 연옥을 체계적으로 형상화한 인물이다. 『단테』의 연옥은 지구에서 지옥의 반대편에 있는 산이다. 천국으로 올라갈 자격을 얻기 위해 영혼을 정화하는 곳이다.
어쩌면 연옥은 성공도 실패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를 상징한다. 연옥에 간 사람은 지옥은 면했다. 파산·폐업은 면했다. 천국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확실한 성공, 천국으로 진입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단테가 인용·제시하는 것은 사추덕(四樞德)이다. 그리스도교 윤리신학에서는 덕을 인간의 노력으로 이룩할 수 있는 ‘자연덕’과 신의 선물로 주어지는 초자연덕으로 나눈다. 사추덕은 자연덕에 속하는 것으로 지덕(智德, prudence), 의덕(義德, justice), 용덕(勇德, force), 절덕(節德, temperance)을 의미한다. 연옥의 정상에 에덴 동산이 있다. 에덴으로부터 천국으로 올라간다. 천국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최고천(最高天·Empyrean)이 있다. 그곳에서 단테는 삼위일체와 온 우주를 체험한다.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단테에 대한 회칙을 발표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다.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신곡을 집필한 그의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을 그 비참한 상태로부터 끌어올리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그들을 행복의 경지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사대로 『신곡』이 ‘궁극의 자기계발서’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죽음과 행복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성공의 신’이 있다면 그는 『신곡』에 나오는 내용이 적어도 상당 부분 맞는다고 손을 들어주지 않을까.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등이 있다.
단테의 말 중에서 음미할만한 몇 가지● 불과 열처럼 아름다움과 영원함도 분리할 수 없다.
● 네 별을 따르라!
●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고수한 사람들을 위해 지옥에서는 가장 어두운 장소가 마련돼 있다.
● 여러분의 뿌리를 생각하라. 여러분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식을 따르기 위해 태어났다.
● 큰 일보다 작은 일에 더 큰 공력(功力)의 도움이 필요하다.
● ‘여기서부터는’이라고 외치며 모든 믿지 못함과 주저함, 비겁함을 뒤로 해 끝내야 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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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단테가 얼마나 위대한지 한번 따져보자. 단테는 중세의 문을 닫고 르네상스의 문을 연 선구자다. 그가 모국어 문학의 길을 제시했기에 페트라르카·보카치오·밀턴·초서의 문학이 탄생했다. 모국어가 라틴어보다 오히려 우월하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한글 창제와 같은 충격이었다. 문학은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며 대중이 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혁명적이었다.
미국 태생의 영국 문인인 T. S. 엘리엇(1888~1965)은 “단테와 셰익스피어가 세계를 양분한다. 둘 사이에 3번째 인물은 없다”라고 주장했다.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는 지옥편 제3곡에서 ‘훔친’ 표현이었다. 영국 사회 비평가 존 러스킨(1819~1900)에게 단테는 “전세계의 중심적 인간”이었다. 영국 태생 프랑스 작가 사뮈엘 베케트(1906~1989)는 무신론자였지만, 죽을 때까지 『신곡』을 머리맡에 두고 애독했다.
중세의 문을 닫고 르네상스의 문을 연 선구자
『신곡』의 ‘지옥편’(1317년 출간)과 ‘연옥편’ 중 일부가 항간에 유포되면서 단테는 유명인사가 됐다. 어쩌면 그는 금의환향을 꿈꿨는지 모른다. 하지만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라벤나에서 1321년 56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 이후 수백 년 동안 피렌체는 그의 유해를 모셔오려고 시도했다. 1519년 교황 레오 10세는 미켈란젤로의 건의로 유해 반환을 라벤나 시에 명령했다. 라벤나 시당국은 유해를 한동안 숨겨버렸다. 역사는 꾸물거린다. 페렌체 시가 단테에 대한 화형 선고를 공식적으로 백지화한 것은 2008년 6월이다. 피렌체에 가면 곳곳에 단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미리 만들어둔 빈 무덤도 있다. 단테가 평생 사랑한 베아트리체를 처음 봤다는 산타 마르게리타 데이 체르키 성당도 관광명소다.
베아트리체 없는『신곡』또한 없었다. 소년 단테는 9살 때 같은 또래인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1266~1290)를 처음 봤다. 8개월 더 어린 베아트리체는 소년의 마음을 송두리째 차지했다. 그를 다시 본 것은 9년이 흐른 후였다.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였다. 서로 잘 알지도 못했다. 당시 피렌체는 인구가 8만, 파리 다음으로 유럽에서 큰 도시였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갑돌이와 갑순이’인 둘은 각기 다른 여성·남성과 결혼했다. 단테는 당시 풍습에 따라 1277년 12세에 약혼한 여성과 결혼해 3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는 부인 젬마 도나티를 자신의 작품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단테는 20세 무렵부터 베아트리체를 향한 연심(戀心)을 품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체는 24살에 사망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아픔과 망명의 아픔을 승화한 게『신곡』이다.『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신(神)의 은총’을 상징한다.『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주인공인 단테를 천국으로 안내한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성모 마리아에 버금가는 신앙의 길잡이었다.
1만4233줄로 된 장편 서사시인 『신곡』은 어떤 책인가. 로드무비의 근대적 원형이 『신곡』에 있다. 7일 동안 벌어진 일이다. 영혼이 신을 향해 떠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지옥·연옥·천국 3편(篇·cantica)으로 돼 있다. ‘지옥편’에만 예외적으로 전체 서론이 붙어 34곡(曲·canto)이고 ‘연옥편’·’천국편’은 33곡으로 돼 있다.
베아트리체가 없었다면 『신곡』 또한 없었다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보편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중심 테마인 죄의 문제에 대해 서양과 동양의 관점이 다르다. 중세 가톨릭과 현대 가톨릭은 죄, 천국·지옥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역사적으로 『신곡』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부분은 ‘지옥편’이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기쁨보다 지옥의 형벌을 면하는 게 일차적인 인생 과제였다. 현대의 많은 신학자에게 지옥은 가마솥이 끓는 곳이 아니라 ‘신의 사랑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곳’이다. 이제 지옥을 물리적이 아니라 추상적·정신적으로 상상한다. 지옥도 살만한 곳이 된 것이다. 현대인은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자신이 웬만하면 천국·천당·낙원 같은 좋은 곳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세 유럽인들은 자신이 연옥에 가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일정 조건하에서 죗값을 면제해주는 면벌부(免罰符)가 인기였다.
이쯤 해서『신곡』을 ‘왜’ 그리고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윤리경영이 부쩍 강조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로, 대중적인 표현을 쓰자면 ‘한방에 훅 가는’ 비즈니스 환경이다. 기업 활동을 규제하는 그 많은 법을 다 지키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법 만으로는 이제 안 된다. 많은 경우 소위 ‘갑질’ 파문은 법률 위반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니다. CEO에서 인턴 사원까지 윤리·도덕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성찰이 필요하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아무래도 종교의 힘은 전근대 사회와 비교했을 때 약화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종교가 설파하는 윤리·도덕은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 새로운 연관성(relevance)를 확보하게 됐다. 종교 인구는 줄지만 영성적인 사람들의 수는 늘고 있다. 영성의 원천은 결국 전통·기성 종교다. 『신곡』은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영성 문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단테는 자신의 『신곡』을 글자 그대로, 우화적으로, 비유적으로, 그리고 도덕적 차원에서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다. 작가·화가 등에게는 영감을 주는 뮤즈(muse)가 필요하다. 베아트리체는 단테를 천상으로 이끄는 뮤즈다. 사업가에게도 뮤즈가 필요하다. 그 뮤즈가 여성이 아니더라도. 베아트리체가 등장하기 전에 나오는 것은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B.C.70~B.C.19)다. 베르길리우스는 연옥과 지옥을 견학시킨다. 둘 다 안내자다. 사업은 여정이다. 여정에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베르길리우스는 지식, 이성과 합리성을 상징한다. 기업에 꼭 필요한 가치다. 베아트리체는, 비즈니스에 필요한 이성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상징한다. 기업인마다 ‘그 무엇’은 인연일수도 있고 신의 섭리일 수도 있다. 징크스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신곡』에 나타난 사랑과 섭리의 관계를 요약하면 이렇다. 모든 덕행이나 악행은 궁극적으로 사랑의 문제다. 사랑은 우주의 근원적인 에너지다. 사랑에는 성애(性愛), 이성적·철학적인 사랑 외에 신에 대한 사랑이 있다. 신비적인 사랑이다. 신은 사랑이기 때문에 온 우주를 위해 계획을 마련했다. 이성이라는 도구를 가지고서는 인간은 신의 계획을 부분적으로만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의 사랑과 섭리를 맛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열려 있으면 우리는 신이 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
『신곡』은 영혼이 신에게로 나아가는 과정과 인간 사회가 지상의 평화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그린다. 『신곡』은 ‘어두운 숲’에서 시작된다. 어두운 숲은 종교적으로는 ‘신으로부터 영적으로 격리된 상태’를 상징한다. 세속적으로는 중년의 위기나 사업의 위기를 상징할 수 있다. 『신곡』에서 단테는 위기를 겪고 있는 35세 가량의 ‘중년’이다. 당시 사람들은 70세를 천수(天數)라고 봤다. 지옥·연옥·천국은 기업이 처한 세가지 상태… 예컨대 위기, 위기의 극복, 성공을 은유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지옥은 죄 때문에 간다. 가톨릭 교회에서 특히 중시하는 것은 칠죄종(七罪宗, seven deadly sins)이다. 칠죄종은 그 자체가 죄이면서 다른 죄와 악습을 일으키는 일곱 가지 죄다. 교만(pride), 인색(greed), 시기(envy), 분노(anger), 음욕(lust), 탐욕(gluttony), 나태(sloth). 칠죄종은 기업의 위기를 부를 수 있는 기업문화의 7대 악습으로 응용해 해석해 볼 수 있다.
연옥에서 천국 가기 위해 필요한 사추덕(四樞德)
‘림보(Limbo)’도 지옥에 있다. 림보는 덕망 있는 삶을 살았지만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가는 곳이다.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하고 충족시켜도 결정적인 것 하나, 즉 세례가 빠지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비즈니스 성공에도 그런 결정적인 것이 있지 않을까. 『단테』의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기억하지만 현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미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과거 영광의 기억에만 안주하는 기업은 비즈니스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옥 다음은 연옥이다. ‘단테가 연옥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톨릭 교회가 연옥에 대한 가르침으로 정식으로 정의한 것은 1274년이다. 단테는 최초로 연옥을 체계적으로 형상화한 인물이다. 『단테』의 연옥은 지구에서 지옥의 반대편에 있는 산이다. 천국으로 올라갈 자격을 얻기 위해 영혼을 정화하는 곳이다.
어쩌면 연옥은 성공도 실패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를 상징한다. 연옥에 간 사람은 지옥은 면했다. 파산·폐업은 면했다. 천국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확실한 성공, 천국으로 진입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단테가 인용·제시하는 것은 사추덕(四樞德)이다. 그리스도교 윤리신학에서는 덕을 인간의 노력으로 이룩할 수 있는 ‘자연덕’과 신의 선물로 주어지는 초자연덕으로 나눈다. 사추덕은 자연덕에 속하는 것으로 지덕(智德, prudence), 의덕(義德, justice), 용덕(勇德, force), 절덕(節德, temperance)을 의미한다. 연옥의 정상에 에덴 동산이 있다. 에덴으로부터 천국으로 올라간다. 천국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최고천(最高天·Empyrean)이 있다. 그곳에서 단테는 삼위일체와 온 우주를 체험한다.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단테에 대한 회칙을 발표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다.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신곡을 집필한 그의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을 그 비참한 상태로부터 끌어올리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그들을 행복의 경지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사대로 『신곡』이 ‘궁극의 자기계발서’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죽음과 행복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성공의 신’이 있다면 그는 『신곡』에 나오는 내용이 적어도 상당 부분 맞는다고 손을 들어주지 않을까.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등이 있다.
단테의 말 중에서 음미할만한 몇 가지● 불과 열처럼 아름다움과 영원함도 분리할 수 없다.
● 네 별을 따르라!
●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고수한 사람들을 위해 지옥에서는 가장 어두운 장소가 마련돼 있다.
● 여러분의 뿌리를 생각하라. 여러분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식을 따르기 위해 태어났다.
● 큰 일보다 작은 일에 더 큰 공력(功力)의 도움이 필요하다.
● ‘여기서부터는’이라고 외치며 모든 믿지 못함과 주저함, 비겁함을 뒤로 해 끝내야 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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