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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가 뜨겁게 부활한다?

냉전시대가 뜨겁게 부활한다?

나토 지휘관 지낸 퇴역 장성, 러시아와의 전쟁 가능성 제기…나토가 단합과 무력 시위로 저지해야
지난 7월 30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외곽 지역 알라비노에서 열린 국제육군게임에 참여한 러시아군 탱크.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세계의 미래가 걸린 국제 분쟁에 직면한다. 러시아가 동유럽 슬라브족 국가들을 통합하기 위해 발트 3국(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을 점령한다. 세 나라 전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다. 신랄한 트윗을 날리거나 강도 높은 문구의 성명서 발표만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면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래 처음으로 핵전쟁이 진지하게 거론된다.

실제가 아니라 영국의 퇴역 장군 리처드 시레프가 쓴 책 ‘2017 러시아와의 전쟁(2017 War With Russia)’의 기본 설정이 그렇다. 시레프는 나토의 유럽 부사령관이자 나토에서 근무한 영국의 최고위 장성으로 2014년 퇴역했다. 엄밀히 말해 이 책은 소설이다. 그러나 ‘미래의 역사’로 불릴 만한 이 책은 종이에 인쇄됐다 뿐이지 실질적 ‘워게임(전쟁연습)’이다. 버지니아 울프나 윌리엄 워즈워스 같은 문학가보다 군사 전략가 칼 폰 클라우제비츠나 윈스턴 처칠의 집착에 훨씬 가깝다.

이 책에는 ‘고위 군지휘관의 긴박한 경고’라는 부제가 붙었다. 시레프는 서문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도발적인 행동을 저지하려는 서방의 노력이 시급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게 이 책의 의도라고 노골적으로 밝힌다.

시레프는 현재의 ‘어머니 러시아’(애국심을 고취시키려는 러시아의 국가 의인화 슬로건)를 1930년대 말의 독일에 비유한다. 1938년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 복속에 이어 내친 김에 체코의 350만 명에 달하던 게르만인 밀집거주지인 주데텐 지역을 합병했다. 확립된 국경선을 무시한 명백한 국제법 위반 행위였다. 그러나 전쟁에 지친 유럽은 그런 무도한 행위에도 그냥 넘어갔다. 독일의 ‘천년 제국’ 이야기가 엄포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어느 금요일 저녁 런던에서 멀지 않은 햄프셔의 목가적인 시골 집을 찾아가 시레프를 만났다. 그는 “지금 우리가 무슨 몽유병 환자처럼 잠결에 끔찍한 재앙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무척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영국군에 입대해 중동과 발칸반도에서 근무하며 평생 군인의 길을 걸은 그는 타고난 작가가 아니다. 따라서 ‘문학적 재난’이라는 영국 신문 파이낸셜타임스의 평가도 그에겐 그리 통렬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게다가 같은 서평에는 그의 암울한 지정학적 비전이 ‘의미심장하다’는 칭찬도 들어 있다. 실제로 이 책은 뻔뻔할 정도로 독자를 훈계하려 든다. 중요한 인물들의 이름만 살짝 바꿨을 뿐 현실적인 경고다.

2014년 3월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합병된 후 심페로폴의 크림공화국 의회에서 우크라이나 상징이 철거됐다.
이 소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의 한 학교를 공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2014년 이래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장악해 우크라이나 중앙 정부에 맞서 내전을 치르는 지역이다.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도네츠크 학교의 어린 학생이 100명 가까이 숨진다. 그러나 공격한 쪽이 러시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군인 것으로 조작된다. 그에 따라 러시아는 추가적인 침략을 위한 완벽한 구실을 확보한다.

현실에서 러시아는 1999년 제2차 체첸 전쟁을 일으킬 때 그와 비슷한 책략을 썼다(모스크바의 여러 아파트에서 폭탄테러를 일으켜 체첸 이슬람 반군의 소행으로 몰아붙이면서 반군 거점에 공습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런 책략은 푸틴이 독자적으로 고안한 게 아니라 히틀러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히틀러는 1933년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조작해(그의 부하들이 불을 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정적을 제거하고 한층 더 망상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섰다.

시레프의 소설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작전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다음 러시아는 발트 3국을 노린다(시레프는 소설에서 러시아 대통령을 이름만 다를 뿐 거의 실제 푸틴처럼 묘사했고 미국 대통령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 후보처럼 그렸지만 푸틴과 달리 클린턴의 경우는 반드시 이 소설의 미국 대통령 모델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발트 3국을 일종의 ‘생득권’으로 여겼다. 크렘린은 서유럽과 미국이 어떤 경우에도 무력 충돌은 피할 것으로 믿고 자신만만해 한다. 소설에서 크렘린의 한 보좌관은 “서방의 경제적 능력은 대단할지 모르지만 언제나 사회복지만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나서는 법을 잊어버렸다.”

시레프는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2008년엔 조지아, 2014년엔 우크라이나를 너무도 쉽게 침공할 수 있도록 서방이 내버려뒀다고 개탄했다. 그는 푸틴의 크림반도 합병을 두고 “프로답게 아주 깔끔하게 실행된 작전이었다”고 말했다(푸틴이 크림반도를 접수할 때 실질적인 반발은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발트 3국을 합병할 때도 같은 작전을 써먹을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는 나약함을 경멸하고 강인함을 존중한다.” 그렇다면 몇 달마다 한 번씩 푸틴 대통령이 냉담한 미소를 지으며 웃통을 벗은 채로 말을 달리거나 곰과 레슬링을 하거나 호랑이를 껴앉는 사진을 두고 러시아 전체가 흥분하는 것도 우연이 아닌 듯하다.몇 주 전만해도 그의 소설을 읽은 독자 대다수는 나토 유럽 총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스타브리디스 미국 해군 제독(퇴역)이 쓴 이 책의 추천서에 관해 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7월 언론은 클린턴 후보가 스타브리디스 제독을 부통령 후보 러닝메이트로 진지하게 고려한다고 보도했다. 만약 클린턴이 대통령이 됐을 때 스타브리디스 제독이 부통령을 맡는다면 그가 러시아를 보는 관점이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추천서에 이렇게 명확하게 썼다. ‘2010년대의 지정학 무대에서 미국이 직면할 도전 중 가장 위험한 것은 푸틴 대통령 아래서 러시아의 군사적 부상과 도발이다.’ 2012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된 미트 롬니는 그런 식으로 말했다가 시대착오적인 냉전 공포를 부추긴다는 비난과 조롱에 시달렸다. 롬니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선출된 버락 오바마는 그의 경고를 두고 “1980년대가 자신의 외교정책을 돌려달라고 외친다”고 꼬집었다. 롬니 후보가 1980년대의 냉전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그 당시 수준의 외교정책을 원한다는 놀림이었다.

러시아는 사거리가 480㎞인 이스칸데르(SS26) 전술 탄도미사일도 발트 3국 국경 부근에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1980년대는 소련과 미국 관계가 폭넓게 개선되면서 핵군축 협상이 잘 진행된 시절이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은 오히려 1960년대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루마니아와 폴란드 등 옛 소련권 국가들에서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이 구축되고, 러시아와 나토는 실전을 준비하는 듯한 대규모 군사훈련을 자주 실시한다. 동유럽에서 나토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두고 크렘린의 실제 고위 관리는 시레프의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이렇게 말했다. “나토가 우리 같은 핵강대국을 상대로 야금야금 침략을 시도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응징을 받을 것이다.” 그런 엄포는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로 ‘상호확증파괴(MAD)’를 벼르던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의 크렘린에서나 나옴직하다.

기자가 시레프를 만나기 며칠 전 크렘린과 연계됐다고 알려진 해커들이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 서버에 침투했다. 미국 국가정보국장이 “전쟁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다(그러나 그는 러시아가 해킹을 사주했다고 주장하진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는 민주당의 치부가 드러나면 자신의 백악관 입성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해커들의 추가적인 침투를공개적으로 부추겼다.시레프는 처음엔 트럼프 후보의 그런 반응에 논평을 거부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그는 생각을 바꿔 내게 이런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민주당을 당혹스럽게 만들어 동맹국이 공격 받으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원칙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나토의 집단방위 조약을 손상하려는 후보를 백악관에 앉히는 것보다 푸틴에게 더 바람직한 시나리오가 있겠는가?’ 방위비 분담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나토 동맹국을 미국이 도와선 안 된다는 트럼프 후보의 발언과 해킹 사태를 아울러 꼬집은 표현이었다.

리처드 시레프 전 나토군 유럽 부사령관(오른쪽)이 쓴 소설 ‘2017 러시아와의 전쟁’ 표지.
현재로선 대다수의 예상에 따르면 미국의 차기 대통령은 클린턴일 가능성이 크다. 국무장관 시절 해외에서 미국의 군사력을 기꺼이 사용할 의지를 보인 그녀는 푸틴의 오랜 적이다. 시레프는 러시아와 핵전쟁을 치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현재 러시아는 발트 3국과 국경을 맞댄 서부 변방 영토인 칼리닌그라드에서 재래식·핵무기 군사력을 증강한다.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고 사거리가 480㎞인 이스칸데르(SS26) 전술 탄도미사일 배치도 포함된다. 이 미사일은 서방을 표적으로 발사될 수 있다(만약 러시아의 유럽 국경이 위협 받는다고 푸틴이 판단할 경우 실제로 그 미사일을 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러시아가 발트 3국을 침공한다면 동맹국에 대한 공격을 나토에 대한 공격으로 보고 ‘집단방위’에 나서도록 규정한 나토 조약 5조에 따라 반격이 이뤄질 것이다. 시레프는 “나토가 러시아와 전쟁을 치른다면 그건 당연히 핵전쟁”이라고 말했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나토가 단합과 무력 시위로 러시아의 공격을 사전에 저지해 나토의 힘이 시험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무력으로 평화를 이루겠다는 모순적인 발상이다. 다시 말해 러시아를 겁먹게 만들어 이성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시레프는 트럼프 후보가 자신이 미국 대통령이 되면 나토의 조약 5조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위협한 것은 잘못이지만 많은 유럽국이 나토에 방위비 분담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다는 그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고 덧붙였다.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은 좀 더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시레프는 서방이 다시 한번 러시아와 대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언제나 서방의 지적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유럽과 미국의 훈수에 격분하기 쉬워 대화하기 힘든 상대다. 그러나 돌부처처럼 침묵한다고 해서 해결책이 나오진 않는다. 시레프는 전쟁보다 소통을 기대한다. “그러나 힘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그는 말했다.

- 알렉산더 나자리안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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