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6) 동화약품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6) 동화약품
포브스코리아가 한국경영사학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6회는 9월 25일 창사 119주년을 맞는 동화약품이다. 동화약품은 1897년 활명수를 주력제품으로 하여 창업된 우리나라 최초의 제조 기업이고 최초의 제약회사이다. 민강 초대사장에서부터 내려온 동화약품의 기업가정신은 보당 윤창식 사장에 의해 체계화되고 가송 윤광렬 사장에 의해 집대성되고 구체화되었다. 지금의 동화약품을 만든 주요 CEO들의 기업가정신을 조명했다. 부채꽃 까스 활명수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뱃속이 더부룩하고 살살 아플 때 편안하게 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활명수는 무려 4세대에 걸쳐 우리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대한민국 소화제의 대명사다. 그러면 후시딘은? 상처난 데 바르면 빨리 낫는 약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활명수와 후시딘을 제조·판매하는 동화약품(대표 윤도준)은 어린 아이에서부터 백발 노인까지 모르는 이가 없는 장수 기업이다. 하지만 동화약품이 숭고한 독립 운동가들의 땀과 숨결이 배인 ‘민족기업’이라는 사실, 생명을 죽이는 살충제를 생산해야 하느냐 문제로 임직원들이 치열한 내부 논쟁을 벌였던 기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동화약품은 119년이나 되는 역사에 걸맞게 스토리의 보고다. 동화제약의 역사는 활명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고종 임금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던 1897년, 당시 궁중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던 노천(老川) 민병호 선생이 궁중에서만 복용되던 생약의 비방을 일반 국민에까지 널리 보급하기 위해 서양의학을 접목해 개발한 양약(洋藥)이 바로 활명수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소화불량과 위장병을 많이 앓았는데, 탕약 외에는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일찍 손을 쓰지 못하면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다행히 노천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여러 비방을 잘 알고 있었고, 기독교를 접하면서 서양의학과 서양의술에도 일찍 눈을 떴다. 그래서 아선약, 계피, 정향, 현호색, 육두구, 건강, 창출, 진피, 후박, 고추틴크, 엘멘톨의 11가지 생약성분을 넣어 일반 백성이 달이지 않고 복용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했던 것이다.
이는 생명을 살린다는 뜻의 이 활명수(活命水)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그의 아들 민강(1883~1931)과 함께 서울 순화동 5번지에 1897년 동화약방(1962년 동화약품으로 상호변경)을 여는데, 이것이 지금의 동화약품이다. 그러고 보면 동화(同和)라는 상호 자체가 의미가 깊다. 주역에 나오는 말로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예리함이 쇠도 자를 수 있다. 나라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평안해진다” 는 뜻이다. 부채를 상표로 정한 것도 심오한 뜻이 있다. “종이와 대나무가 서로 합하여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紙竹相合 生氣淸風(지죽상합 생기청풍)”에서 따왔다.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민족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동화는 이처럼 “좋은 약을 만들어 사회에 봉사한다”는 제약보국의 기업가정신으로 창업했다.
초대 사장 민강은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던 혁신가였다. 1910년에 국내 최초로 부채표 활명수를 상표 등록했다. 이후 활명수는 소화불량, 식욕감퇴, 과식, 구토 등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면서 동화약품을 먹여살린 효자 상품이 됐다. 연간 1억병 넘게 생산되고 연매출만 400억 원에 이른다. 1910년대 60ml 활명수 1병 값은 50전이었다. 당시 설렁탕 2그릇에 막걸리 2~3잔을 사먹을 수 있는 돈으로 지금처럼 값싸고 흔한 약은 아니었다.
민강 사장을 말할 때 빠뜨리고 갈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서울 연통부 기념비’다. 도심 재개발로 덕수궁 롯데캐슬이 들어선 서울 서소문동 동화약품 옛 본사 건물 앞에 있다. 일제 치하인 1919년, 동화약방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서울 연락소인 서울 연통부(聯通府)가 비밀리에 설치되었다. 국내 각 시, 도, 군, 면까지 조직을 갖추고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일을 하던 서울 연통부의 행정 책임자가 바로 민강이었다. 민강은 활명수를 판매한 금액을 남겨 독립자금으로 임시정부에 전달하곤 했다. 동화약품이 민족기업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동화약품의 기업사를 연구하다 보면 초대 사장 민강을 비롯해 초창기에 큰 족적을 남긴 CEO 3명이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민강 선생은 서울 연통부 활동에 앞서 1909년 경에 각계 인사 80여명과 함께 비밀결사대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한성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하는 등 독립운동을 벌였다. 민강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부터 1936년까지 동화약방의 사장을 지냈다.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경영침체와 파산까지 갈 뻔한 위기도 겪었다. 그러면서도 민족기업으로서의 명맥을 잊지 않고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민강은 결국 두 차례 옥고 끝에 1931년 순국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동화의 임직원들은 윤강이 별세하자 (주)동화약방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민강의 뜻을 이어받아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면서 동화약방을 운영해간다. 대표적인 사례가 초창기 활명수 신문광고다.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내자 동화약품은 승전보를 알리는 축하 광고를 8월 11일 조선일보에 냈다. 이 광고는 후에 일장기를 지운 마라톤 우승자의 사진을 실어 일제의 탄압으로 정간되는 역사적인 항일 사건으로 이어진다.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메시지를 담은 활명수 광고를 게재한 것은 동화약품의 민족기업으로서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만하다.
동화약품 5대 사장 보당(保當) 윤창식(尹昶植, 1890~1963) 역시 민족주의와 봉사정신으로 똘똘 뭉친 애국자였다. 1931년 초대 민강 사장이 갑작스럽게 별세하자 동화약방은 사세가 급격히 기울게 된다. 여러 인물이 사장을 맡았지만 기업 회생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었다. 1937년, 마침내 민강의 독립운동 동지이기도 한 보당이 구원투수로 나서 동화약품을 인수하게 된다.
동화약품의 현대화에 기여한 7대 사장 가송(可松) 윤광열(尹光烈, 1924~2010) 명예회장도 해방 전에 광복군 주호지대 5중대장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처럼 동화약품을 일으켜 세운 주요 CEO들은 단순히 돈을 벌려고 제약회사를 운영한 게 아니라 나라를 살리고 국민 건강에 이바지하기 위해 제약회사를 운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3명 중에서도 특히 보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당은 1936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사세가 기울던 동화약품을 기적적으로 재건해 동화약품의 제2창업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보당은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상과(商科) 출신이다. 일찍이 민족기업을 육성하여 자주독립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뜻을 세우고 육당 최남선, 인촌 김성수 등이 결성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에서 활동했다. 윤창식은 총무를 맡았는데, 다른 애국독립단체와 달리 주식제도를 도입해 자금지원을 외부에 의탁하지 않고 적립해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당시 활동했던 3인방 중 최남선은 저작, 출판으로 하는 애국의 길로, 김성수는 고려대 설립과 동아일보 등 교육, 언론의 길로, 보당은 독립군 자금지원과 빈민구휼 사업을 하게 된다. 보당은 이후 1929년부터 정미업으로 자본을 모았고, 일본인들이 소금을 독점하자 이에 맞서 제염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보당은 이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도 남모르게 지원했는데, 당시 신간회에는 이상재를 비롯해 안재홍, 조만식, 한용운, 이승훈 등 각계를 대표한 민족지도자들이 많았다. 보당은 해방 후에는 이승만, 김구, 오세창, 장덕수, 윤보선 선생 등 각계 저명인사로 구성된 대한독립촉성회국민회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런 보당이 한창 나이인 47세 때인 1937년에 동화약방 제5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드디어 민족기업 부채표 동화의 활로가 열리게 된다. 동화약품을 인수한 보당은 “좋은 약을 만들어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동화의 창업이념은 어떤 시대적 불운 속에서라도 반드시 지켜 나가야 한다”며 동화약품을 재건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보당은 임직원들에게 원리원칙, 정직, 성실을 생활원칙으로 강조했고 경영방식을 대폭 쇄신했다. 보당이 회사 내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보당은 임직원들에게 “약을 만들되 생명을 살리는 약”만을 만들라고 강조했다. 이런 유지 때문에 동화약품이 모기약 홈키파를 개발할 때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벌레라도 죽이는 약을 만드는 것은 보당의 뜻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강했으나 일부 임직원들이 “스님도 파리를 잡는다”며 설득해 겨우 홈키파를 개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보당은 혼란한 해방정국에서도 동화약품의 경영정상화에 몰두했고, 1948년에는 생산판매의 적극화로 의약품 생산을 10여 종으로 넓히는데 성공한다. 보당은 6.25전쟁 중에도 피난지 마산에서 생산 판매를 멈추지 않았다. 6.25전쟁 후에는 미국 ICA(국제협조처)의 자금지원을 거부하고 순수민족자본으로 회사를 재건했다. 그리고 1962년,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해 동화약품을 일으켜 세운다. 보당은 안타깝게도 1963년 운명을 달리하는데, 당시 가족들에게 필생의 유훈을 남기게 된다. “좋은 약이 아니면 아니면 만들지 마라. 동화는 동화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서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는 유훈이 그것이다. 보당의 후계자이자 아들인 윤광렬이 이같은 보당의 경영철학을 나중에 다음과 같이 4가지 ‘동화정신’으로 체계화한다.
“첫째, 동화는 좋은 약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봉사하고 그 효험을 본 정당한 대가로 경영되는 회사이다. 둘째, 동화는 정도(正道)를 밟고 원리원칙에 의하여 경영되는 회사이다. 셋째, 동화는 젊어서 정당하게 땀 흘려 일하고 노후에 잘 살아 보려는 동화식구의 회사이다. 넷째, 동화는 동화식구가 업무수행 중 잘못이 있을 경우 이를 솔직히 시인할 줄 알고 고쳐서 전화위복이 되게 하는 회사이다.”
21세기인 지금 읽어봐도 낯설지 않은, 정도경영과 고객 및 임직원 만족의 훈훈한 정이 묻어나는 경영철학이다. 동화약품의 제2 창업자로 평가되는 보당은 동화의 정신적 지주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기업가로 평가된다. 보당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한 한국경영사학회 학자들은 “독립운동가로서뿐만 아니라 민족기업가로서 보당을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보당은 생전에 “우리 자본으로, 우리 기술로, 우리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부채표 활명수는 민족기업의 대표적 약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 내 뜻이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는데, 이는 후대 기업인들이 본받을만한 민족기업가정신의 발로라는 것이다. 한국경영사학회장을 지낸 김성수 경희대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보당은 신학문을 공부한 선각자로서 제약기업의 나아갈 방향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민족 기업이 지켜야 할 길에 대한 소신이 있었으며,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며 높이 평가했다.
경영사학자들은 보당의 기업가정신 못지 않게 보당의 인품과 생활철학을 후대 경영인들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보당은 예의와 신의가 있고 훈훈한 성품이었다. 그는 가정이나 회사에서 아랫사람에게 “일이 잘 된다고 들뜨지도 말고, 안된다고 기죽지도 말며 언제나 겸허한 자세로 꾸준히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보당은 신의와 신용을 중시했고, 일을 시작하려면 꼼꼼히 열흘이나, 보름 동안 사전에 충분히 계획을 짜서 실행했다. 또 누구와 동업을 할 때는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지분을 더 많이 갖더라도 분배는 똑같이 했다고 한다. 이는 결정을 내릴때 내리더라도 나중에 절대 싸움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누가 이야기를 하면 끝까지 경청했고, 남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용서했으며, 한번 친분을 가진 사람과는 절대 인연을 끊지 않았다. 몸에 밴 검소한 생활을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나 솔선하여 실천했고, 회사에 들어오는 선물이 있으면 직원들과 나누었다고 한다. 직원의 복지를 위해 회사는 어려워도 생산직 월급제를 우리나라 최초로 도입했고, 6.25 전쟁 후 회사가 곤경에 처했어도 직원들 월급을 빠뜨리지 않고 지급했다. 이런 품성과 경영철학으로 동화약품을 운영했으니 제 2의 창업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당에 이어 동화약품을 굴지의 제약기업으로 성장시킨 경영자는 가송 윤광렬 사장이다. 가송은 선친 보당을 닮은 독립운동가 정신에다 혁신적 기업가정신을 보여준 CEO다. 가송은 1948년 동화약품에 입사해 밑바닥부터 경영을 배워나간다. 선친을 닮은 민족기업인으로서 그의 진가는 1973년 그가 동화약품의 7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가송은 동화약품 창업자들이 해온 민족경제정신을 이어 받아 끊임없이 혁신하는 것이 애국운동이라고 여겼다. 혁신을 주창한 슘페터가 주장한 혁신기업가는 신기술의 발명, 신제품의 도입 및 개발, 신시장의 개척, 신 원료의 확보, 신 조직의 형성 등에서 혁신을 이뤄내는 기업가인데, 가송은 이와 같은 혁신을 의약품 경영에서 실현시킨 경영자라는 것이 기업가정신 연구자들의 평가다. 가송은 특히 선진 제약국인 일본을 벤치마킹해 제품 생산의 자동화를 도입했다. 병만 투입하면 1분당 750병 이상의 생산력을 갖추도록 하는 자동화로 2000~3000명이 필요한 생산인원을 1/20 정도로 감소시켰고, 정부로부터 KGMP(한국 우수의약품 제조공정 및 품질관리 기준) 적격업체 승인을 받는다. 이런 혁신을 통해 지금의 동화약품을 21세기 제약 산업의 대표적 기업으로 발전시켰다.
가송은 임직원들에게 정직하게 살자는 윤리경영주의, 저축하며 살자는 근검절약주의, 같이 번영하자는 공존공영주의 사상을 기본 정신으로 강조했다. 가송은 이같은 경영기본방침을 토대로 특히 다음의 4가지를 생활속에서 실천하도록 강조했다.
“첫째, 부정을 멀리하고, 원리원칙에 입각한 경영을 한다. 둘째, 기업주의 이익에 앞서 종업원의 처우개선과 복지향상을 도모한다. 셋째, 근면성실하게 연구하며 일함으로써 좋은 약을 싼값에 팔아 소비자에게 봉사한다. 넷째, 살생보다는 소생하는 약을 만들어 국민보건에 기여한다”는 지침이다. 동화약품 임직원들은 이같은 경영이념을 동력으로 삼아 국내 최장수 기업인 동화약품을 성장시켜 나갔다. 가송의 훌륭한 점은,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을 위한 가송재단의 설립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부채표 가송재단(可松財團)은 가송과 부인 김순녀 여사의 사재출연을 통해 2008년 4월 설립됐다. 학계발전에 기여도가 크고 연구업적이 탁월한 의약학자들을 대상으로 대한의학회와 공동제정한 윤광열 의학상, 대한약학회와 공동제정한 윤광열 약학상, 대한치과의사협회와 공동제정한 윤광열 치과의료봉사상 등을 수여하고 있다. 장학생 선발 지원은 물론 공모전인 ‘가송예술상’을 제정해 신진작가를 지원하는 등 전통예술의 가치를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초대사장 민강, 보당 윤창식, 가송 윤광렬 등 이들 3인의 CEO가 강조한 정도경영, 윤리경영, 생명존중, 민족기업정신, 사원 우선주의 등 동화의 경영이념은 일제시대와 해방정국, 6.25전쟁과 경제재건이라는 큰 변화와 혼란기를 겪으면서도 시류에 퇴색하지 않고 지금까지 굳건히 동화 식구들의 행동지침이 되고 있다. 동화약품은 현재 400여 종의 우수의약품과 30여 종의 원료의약품을 생산, 국내 공급은 물론 세계 40여 개국에 수출하는 일류 제약 기업으로 성장했다.
생명존중 정신으로 제약보국의 기업가 정신을 지켜온 동화약품은 이제 동화의 미래를 상징하는 ‘최고최고정신’ 즉, 최고(最古)의 의약품 제조회사라는 자부심에 최고(最高)의 제약회사라는 미래 비전을 위해 전 임직원이 노력를 경주하고 있다. 동화약품은 2010년부터 고 윤광열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장남 윤도준 회장과 차남 윤길준 부회장이 함께 이끌고 있다. 창사 120주년인 내년까지 매출 7500억원 달성을 목표로 글로벌 신약 발매, 해외 및 신규사업 확대, 일반 및 전문 의약품의 균형성장을 이루어내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국내를 넘어 인류의 건강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글의 마지막은 다시 활명수 이야기다. 바로 활명수의 글로벌화다. 동화약품은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활명수의 의미를 살려 안전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전달하고 있다. 처음 시판됐을 때는 우리 민족의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던 활명수가 이제 전세계를 아울러 생명을 살리는 물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고 국민의 건강을 지켜낸 동화약품이 이제 세계를 살리는 기업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자료 협조 동화약품·한국경영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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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약품은 119년이나 되는 역사에 걸맞게 스토리의 보고다. 동화제약의 역사는 활명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고종 임금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던 1897년, 당시 궁중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던 노천(老川) 민병호 선생이 궁중에서만 복용되던 생약의 비방을 일반 국민에까지 널리 보급하기 위해 서양의학을 접목해 개발한 양약(洋藥)이 바로 활명수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소화불량과 위장병을 많이 앓았는데, 탕약 외에는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일찍 손을 쓰지 못하면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활명수 약으로 창업한 민강 사장
이는 생명을 살린다는 뜻의 이 활명수(活命水)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그의 아들 민강(1883~1931)과 함께 서울 순화동 5번지에 1897년 동화약방(1962년 동화약품으로 상호변경)을 여는데, 이것이 지금의 동화약품이다. 그러고 보면 동화(同和)라는 상호 자체가 의미가 깊다. 주역에 나오는 말로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예리함이 쇠도 자를 수 있다. 나라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평안해진다” 는 뜻이다. 부채를 상표로 정한 것도 심오한 뜻이 있다. “종이와 대나무가 서로 합하여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紙竹相合 生氣淸風(지죽상합 생기청풍)”에서 따왔다.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민족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동화는 이처럼 “좋은 약을 만들어 사회에 봉사한다”는 제약보국의 기업가정신으로 창업했다.
초대 사장 민강은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던 혁신가였다. 1910년에 국내 최초로 부채표 활명수를 상표 등록했다. 이후 활명수는 소화불량, 식욕감퇴, 과식, 구토 등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면서 동화약품을 먹여살린 효자 상품이 됐다. 연간 1억병 넘게 생산되고 연매출만 400억 원에 이른다. 1910년대 60ml 활명수 1병 값은 50전이었다. 당시 설렁탕 2그릇에 막걸리 2~3잔을 사먹을 수 있는 돈으로 지금처럼 값싸고 흔한 약은 아니었다.
민강 사장을 말할 때 빠뜨리고 갈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서울 연통부 기념비’다. 도심 재개발로 덕수궁 롯데캐슬이 들어선 서울 서소문동 동화약품 옛 본사 건물 앞에 있다. 일제 치하인 1919년, 동화약방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서울 연락소인 서울 연통부(聯通府)가 비밀리에 설치되었다. 국내 각 시, 도, 군, 면까지 조직을 갖추고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일을 하던 서울 연통부의 행정 책임자가 바로 민강이었다. 민강은 활명수를 판매한 금액을 남겨 독립자금으로 임시정부에 전달하곤 했다. 동화약품이 민족기업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동화약품의 기업사를 연구하다 보면 초대 사장 민강을 비롯해 초창기에 큰 족적을 남긴 CEO 3명이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민강 선생은 서울 연통부 활동에 앞서 1909년 경에 각계 인사 80여명과 함께 비밀결사대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한성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하는 등 독립운동을 벌였다.
CEO들의 한결같은 제약보국 정신
동화약품 5대 사장 보당(保當) 윤창식(尹昶植, 1890~1963) 역시 민족주의와 봉사정신으로 똘똘 뭉친 애국자였다. 1931년 초대 민강 사장이 갑작스럽게 별세하자 동화약방은 사세가 급격히 기울게 된다. 여러 인물이 사장을 맡았지만 기업 회생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었다. 1937년, 마침내 민강의 독립운동 동지이기도 한 보당이 구원투수로 나서 동화약품을 인수하게 된다.
동화약품의 현대화에 기여한 7대 사장 가송(可松) 윤광열(尹光烈, 1924~2010) 명예회장도 해방 전에 광복군 주호지대 5중대장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처럼 동화약품을 일으켜 세운 주요 CEO들은 단순히 돈을 벌려고 제약회사를 운영한 게 아니라 나라를 살리고 국민 건강에 이바지하기 위해 제약회사를 운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3명 중에서도 특히 보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당은 1936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사세가 기울던 동화약품을 기적적으로 재건해 동화약품의 제2창업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보당은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상과(商科) 출신이다. 일찍이 민족기업을 육성하여 자주독립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뜻을 세우고 육당 최남선, 인촌 김성수 등이 결성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에서 활동했다. 윤창식은 총무를 맡았는데, 다른 애국독립단체와 달리 주식제도를 도입해 자금지원을 외부에 의탁하지 않고 적립해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당시 활동했던 3인방 중 최남선은 저작, 출판으로 하는 애국의 길로, 김성수는 고려대 설립과 동아일보 등 교육, 언론의 길로, 보당은 독립군 자금지원과 빈민구휼 사업을 하게 된다. 보당은 이후 1929년부터 정미업으로 자본을 모았고, 일본인들이 소금을 독점하자 이에 맞서 제염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보당은 이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도 남모르게 지원했는데, 당시 신간회에는 이상재를 비롯해 안재홍, 조만식, 한용운, 이승훈 등 각계를 대표한 민족지도자들이 많았다. 보당은 해방 후에는 이승만, 김구, 오세창, 장덕수, 윤보선 선생 등 각계 저명인사로 구성된 대한독립촉성회국민회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보당 윤창식이 이룬 제2의 창업
보당은 임직원들에게 원리원칙, 정직, 성실을 생활원칙으로 강조했고 경영방식을 대폭 쇄신했다. 보당이 회사 내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보당은 임직원들에게 “약을 만들되 생명을 살리는 약”만을 만들라고 강조했다. 이런 유지 때문에 동화약품이 모기약 홈키파를 개발할 때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벌레라도 죽이는 약을 만드는 것은 보당의 뜻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강했으나 일부 임직원들이 “스님도 파리를 잡는다”며 설득해 겨우 홈키파를 개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보당은 혼란한 해방정국에서도 동화약품의 경영정상화에 몰두했고, 1948년에는 생산판매의 적극화로 의약품 생산을 10여 종으로 넓히는데 성공한다. 보당은 6.25전쟁 중에도 피난지 마산에서 생산 판매를 멈추지 않았다. 6.25전쟁 후에는 미국 ICA(국제협조처)의 자금지원을 거부하고 순수민족자본으로 회사를 재건했다. 그리고 1962년,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해 동화약품을 일으켜 세운다. 보당은 안타깝게도 1963년 운명을 달리하는데, 당시 가족들에게 필생의 유훈을 남기게 된다. “좋은 약이 아니면 아니면 만들지 마라. 동화는 동화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서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는 유훈이 그것이다. 보당의 후계자이자 아들인 윤광렬이 이같은 보당의 경영철학을 나중에 다음과 같이 4가지 ‘동화정신’으로 체계화한다.
“첫째, 동화는 좋은 약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봉사하고 그 효험을 본 정당한 대가로 경영되는 회사이다. 둘째, 동화는 정도(正道)를 밟고 원리원칙에 의하여 경영되는 회사이다. 셋째, 동화는 젊어서 정당하게 땀 흘려 일하고 노후에 잘 살아 보려는 동화식구의 회사이다. 넷째, 동화는 동화식구가 업무수행 중 잘못이 있을 경우 이를 솔직히 시인할 줄 알고 고쳐서 전화위복이 되게 하는 회사이다.”
21세기인 지금 읽어봐도 낯설지 않은, 정도경영과 고객 및 임직원 만족의 훈훈한 정이 묻어나는 경영철학이다.
빛나는 독립운동정신과 민족기업가정신
경영사학자들은 보당의 기업가정신 못지 않게 보당의 인품과 생활철학을 후대 경영인들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보당은 예의와 신의가 있고 훈훈한 성품이었다. 그는 가정이나 회사에서 아랫사람에게 “일이 잘 된다고 들뜨지도 말고, 안된다고 기죽지도 말며 언제나 겸허한 자세로 꾸준히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보당은 신의와 신용을 중시했고, 일을 시작하려면 꼼꼼히 열흘이나, 보름 동안 사전에 충분히 계획을 짜서 실행했다. 또 누구와 동업을 할 때는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지분을 더 많이 갖더라도 분배는 똑같이 했다고 한다. 이는 결정을 내릴때 내리더라도 나중에 절대 싸움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누가 이야기를 하면 끝까지 경청했고, 남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용서했으며, 한번 친분을 가진 사람과는 절대 인연을 끊지 않았다. 몸에 밴 검소한 생활을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나 솔선하여 실천했고, 회사에 들어오는 선물이 있으면 직원들과 나누었다고 한다. 직원의 복지를 위해 회사는 어려워도 생산직 월급제를 우리나라 최초로 도입했고, 6.25 전쟁 후 회사가 곤경에 처했어도 직원들 월급을 빠뜨리지 않고 지급했다. 이런 품성과 경영철학으로 동화약품을 운영했으니 제 2의 창업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당에 이어 동화약품을 굴지의 제약기업으로 성장시킨 경영자는 가송 윤광렬 사장이다. 가송은 선친 보당을 닮은 독립운동가 정신에다 혁신적 기업가정신을 보여준 CEO다. 가송은 1948년 동화약품에 입사해 밑바닥부터 경영을 배워나간다. 선친을 닮은 민족기업인으로서 그의 진가는 1973년 그가 동화약품의 7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가송은 동화약품 창업자들이 해온 민족경제정신을 이어 받아 끊임없이 혁신하는 것이 애국운동이라고 여겼다. 혁신을 주창한 슘페터가 주장한 혁신기업가는 신기술의 발명, 신제품의 도입 및 개발, 신시장의 개척, 신 원료의 확보, 신 조직의 형성 등에서 혁신을 이뤄내는 기업가인데, 가송은 이와 같은 혁신을 의약품 경영에서 실현시킨 경영자라는 것이 기업가정신 연구자들의 평가다. 가송은 특히 선진 제약국인 일본을 벤치마킹해 제품 생산의 자동화를 도입했다. 병만 투입하면 1분당 750병 이상의 생산력을 갖추도록 하는 자동화로 2000~3000명이 필요한 생산인원을 1/20 정도로 감소시켰고, 정부로부터 KGMP(한국 우수의약품 제조공정 및 품질관리 기준) 적격업체 승인을 받는다. 이런 혁신을 통해 지금의 동화약품을 21세기 제약 산업의 대표적 기업으로 발전시켰다.
가송은 임직원들에게 정직하게 살자는 윤리경영주의, 저축하며 살자는 근검절약주의, 같이 번영하자는 공존공영주의 사상을 기본 정신으로 강조했다. 가송은 이같은 경영기본방침을 토대로 특히 다음의 4가지를 생활속에서 실천하도록 강조했다.
“첫째, 부정을 멀리하고, 원리원칙에 입각한 경영을 한다. 둘째, 기업주의 이익에 앞서 종업원의 처우개선과 복지향상을 도모한다. 셋째, 근면성실하게 연구하며 일함으로써 좋은 약을 싼값에 팔아 소비자에게 봉사한다. 넷째, 살생보다는 소생하는 약을 만들어 국민보건에 기여한다”는 지침이다. 동화약품 임직원들은 이같은 경영이념을 동력으로 삼아 국내 최장수 기업인 동화약품을 성장시켜 나갔다. 가송의 훌륭한 점은,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을 위한 가송재단의 설립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부채표 가송재단(可松財團)은 가송과 부인 김순녀 여사의 사재출연을 통해 2008년 4월 설립됐다. 학계발전에 기여도가 크고 연구업적이 탁월한 의약학자들을 대상으로 대한의학회와 공동제정한 윤광열 의학상, 대한약학회와 공동제정한 윤광열 약학상, 대한치과의사협회와 공동제정한 윤광열 치과의료봉사상 등을 수여하고 있다. 장학생 선발 지원은 물론 공모전인 ‘가송예술상’을 제정해 신진작가를 지원하는 등 전통예술의 가치를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최고(最古)에서 최고(最高)의 회사로
생명존중 정신으로 제약보국의 기업가 정신을 지켜온 동화약품은 이제 동화의 미래를 상징하는 ‘최고최고정신’ 즉, 최고(最古)의 의약품 제조회사라는 자부심에 최고(最高)의 제약회사라는 미래 비전을 위해 전 임직원이 노력를 경주하고 있다. 동화약품은 2010년부터 고 윤광열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장남 윤도준 회장과 차남 윤길준 부회장이 함께 이끌고 있다. 창사 120주년인 내년까지 매출 7500억원 달성을 목표로 글로벌 신약 발매, 해외 및 신규사업 확대, 일반 및 전문 의약품의 균형성장을 이루어내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국내를 넘어 인류의 건강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글의 마지막은 다시 활명수 이야기다. 바로 활명수의 글로벌화다. 동화약품은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활명수의 의미를 살려 안전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전달하고 있다. 처음 시판됐을 때는 우리 민족의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던 활명수가 이제 전세계를 아울러 생명을 살리는 물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고 국민의 건강을 지켜낸 동화약품이 이제 세계를 살리는 기업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자료 협조 동화약품·한국경영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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