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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홀린 듯 열정을 불사르다

무엇에 홀린 듯 열정을 불사르다

1974년 미국에서 생방송 도중 권총 자살한 뉴스 앵커의 삶을 다룬 영화 ‘크리스틴’에서 주인공 맡은 레베카 홀이 말하는 촬영 뒷 이야기
영국의 유명한 연극인 집안 출신인 레베카 홀은 ‘크리스틴’ 이전에는 영화보다 연극에서 진가를 발휘해 왔다.
레베카 홀은 최근 영화 ‘크리스틴(Christine)’의 마지막 장면 촬영을 마쳤다. 1974년 TV 생방송 도중 머리에 권총을 쏴 자살한 미국 뉴스 앵커 크리스틴 처벅에 관한 영화다. 저예산 독립 영화라 촬영장에 트레일러를 갖추지 못해 그녀는 얼굴이 가짜 피로 범벅이 된 채 자동차를 타고 집까지 가야 했다.

“집에 도착해 피를 씻어내면서 오랫동안 몸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고 그녀는 말했다. “피를 뿜어내는 장비를 달고 머리에 권총을 갖다 댔을 때 내 몸은 그것이 연기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연기를 제대로 하고 있다면 머릿속으로 그 상황을 실제처럼 받아들여야 하니까 당연한 일이다. 내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생각하면서 한동안 샤워기 아래 주저앉아 있었다.”

뉴욕 브루클린 하이츠에 있는 홀의 집 근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샐러드를 먹으면서 소리 내 웃었다. 너무 감상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처벅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는 게 역력했다. “난 다른 무엇보다 이 영화를 옹호하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늘씬한 키에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홀은 눈매가 슬프고 얼굴은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내성적이면서도 대담한 그녀의 성격은 연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연약하면서도 거침없는 성격을 묘사한 ‘크리스틴’에서는 특히 그렇다. 처벅의 죽음은 섬뜩한 인터넷 밈(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문화요소)이 됐다.

하지만 소문과 달리 1974년 7월 15일 방송된 처벅의 자살 장면이 담긴 비디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30세 생일을 며칠 앞둔 그날 카메라 앞에서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었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사건을 신속하고 생생하게 보도한다는 채널 40의 정책에 따라 여러분은 지금부터 자살 기도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책상 아래서 권총을 집어 들고 자신의 오른쪽 귀 옆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왜 ‘자살 기도’라고 말했을까?”라고 내가 홀에게 물었다. “혹시 성공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 홀은 “나 역시 궁금하지만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아마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언론인으로서 정확성을 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 영화는 생각만큼 우울하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제대로 살아보려는 지적인 사회 부적응자에 관한 가슴 아픈 성격 연구다. 홀의 얼굴에서 처벅의 상처와 고통을 읽을 수 있다. 처벅의 직장 동료들이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녀는 한눈에 봐도 매우 혼란스러워 보인다.

홀은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우울증과 경계성 인격장애에 관한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녀는 처벅을 어떤 틀에 끼워맞추려 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녀를 차갑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홀은 말했다. “난 영화에서 여성을 혐오스럽게 묘사하는 것이 아주 못마땅하다. 아직도 사람들은 ‘저 여잔 너무 거칠어, 저 여잔 제정신이 아니야, 저 여잔 술에 취했어, 저 여잔 이래, 저 여잔 저래…’ 하는 식으로 어떤 틀에 끼워 맞추려 한다. 로버트 드니로는 그런 캐릭터들을 연기해 배우로 성공했고 우리는 그 캐릭터들을 사랑한다.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대단한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그게 여자일 때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본다. 영화는 크리스틴이 어떻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그녀가 얼마나 뜨거운 열정과 의지로 삶을 대했던가에 초점을 맞춘다.처벅의 그런 면이 홀과 매우 흡사하다. 할리우드는 매우 똑똑한 데다 영국 연극인의 혈통을 타고난 홀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홀은 대다수 미국인이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을 설립한 피터 홀 경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 다행이라고 말한다).

영화 ‘크리스틴’에서 레베카 홀은 1970년대에 생방송 도중 권총 자살한 미국 뉴스 앵커 크리스틴 처벅 역을 맡았다.
그녀는 론 하워드 감독의 ‘프로스트 vs 닉슨’(2008)에서 뿌루퉁하고 차가운 프로스트의 여자친구 역을 맡았다. ‘아이언맨 3’(2013)에서는 계약 당시엔 중요한 악역이었지만 최종 대본에서는 비중이 대폭 축소돼 잠깐 얼굴을 비쳤을 뿐이다. 대신 그녀는 우디 앨런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9)와 니콜 홀로프세너의 ‘뉴욕에서 착하게 살아가는 법’(2010) 등의 독립 영화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서는 스칼렛 요한슨, ‘뉴욕에서 착하게 살아가는 법’에서는 아만다 피트와 공연했다. 두 역할 다 지적이고 수줍으며 섬세한 성격으로 수채화로 그린 초상화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크리스틴’ 이전에 홀의 진정한 능력이 펼쳐진 무대는 연극이었다. 그녀는 극에 완전히 빠져들어 폭발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홀은 위험한 배우”라고 ‘크리스틴’의 감독 안토니오 캄포스는 말했다. 캄포스는 2년 전 홀의 브로드웨이 데뷔작 ‘머시널’(남편을 살해하고 사형수가 되는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소피 트레드웰의 연극)을 보고 그녀에게 영화 출연을 제의했다. “그동안 홀이 출연한 영화들은 그녀가 배우로서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고 캄포스 감독은 말했다. “‘머시널’에서 그녀는 혼신의 연기를 보여줬다. 연기라기보다는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불사른다.”

홀은 얼마 전 오렌 무버맨이 감독한 ‘더 디너(The Dinner)’의 촬영을 마쳤다. 정치인으로 나오는 리처드 기어의 젊고 매력적인 부인 역을 맡았다. 이 부부와 기어의 남동생 부부(스티브 쿠건과 로라 리니)가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집안의 어두운 비밀과 범죄 사실이 드러난다.

극작가들이 좋아하는 하룻밤의 길고 어두운 여행 이야기다. 뉴욕 주 용커스에서 3주일 동안 밤 시간에만 촬영했다. “이 영화와 관련해서는 이상한 기억만 남아 있다”고 홀은 말했다. “아니,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몽유병자가 된 기분이랄까? 한밤중에 모두가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찍었기 때문에 작품의 질이나 분위기, 연기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그녀는 ‘크리스틴’(그리고 처벅)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 “처벅은 자살, 정신건강 문제, 직장 내 여성의 위상 등 말하기 불편한 많은 것들을 상징한다. ‘폭력적인 것이 주목 받는다’는 개념은 요즘 인터넷의 ‘낚시성 게시물(clickbait, 자극적인 제목으로 클릭을 유도해 조회수를 높이는 기사나 광고)’로 이어진다. 두려움이 사람들을 조종하는 방법이라는 생각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처벅의 이야기는 요즘 세상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톰 숀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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