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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색 석양에 마음을 물들이다

오렌지색 석양에 마음을 물들이다

니카라과의 태평양 해변에서 서핑과 애시 보딩, 활화산 분화구 관광, 정글 짚 라인 등 즐길 거리 많아
니카라과의 태평양 해변은 석양이 아름다워 부자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다.
유난히 길고 비열했던 미국 대통령 선거전 취재를 끝내고 뉴욕을 훌쩍 떠나 니카라과로 갔다. 내가 니카라과에 관심을 가졌던 때는 1980년대 이란-콘트라 사건 당시였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항해 내전을 벌이던 콘트라 반군에 자금을 지원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 올리버 노스 전 미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있었고 매력적인 그의 여비서가 증거 서류를 파기했다. 내 생각에 중앙아메리카는 지금도 워런 제본(2003년 사망한 미국의 싱어송 라이터)이 1978년 발표한 노래 ‘Lawyers, Guns and Money’의 가사처럼 부패하고 위험한 곳인 듯하다.

하지만 니카라과는 이제 혁명을 완수했다. 독재정권 타도를 목표로 좌파의 유혈 혁명이 계속된 수십 년 동안 식자율이 거의 2배로 증가했다. 농업 혁신으로 농부들에게 1인당 토지 약 8100㎡와 소총 한 자루가 한시적으로 지급됐다. 이 실험이 국가 파산으로 끝나면서 과두재벌들이 다시 득세했다. 이제 니카라과는 평화가 어느 정도 정착됐고 약간의 번영을 이룩했다. 요즘 이 나라에서는 세계 수준의 서핑과 화산재 슬로프를 미끄러져 내려오는 ‘애시 보딩(ash boarding)’, 정글 짚라인 등을 즐길 수 있다. 또 해질 무렵 해변의 풀장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니카라과산 럼을 넣은 열대 칵테일을 마실 수도 있다.

엄청난 부를 축적한 니카라과의 극소수 부유층은 좌파가 부의 재분배 계획에 성공하진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 마이애미에 숨어 있다가 니카라과로 돌아가 재산을 되찾은 과두재벌인 돈 카를로스 펠라스는 이 나라 최초의 억만장자다. 니카라과에 대한 그의 사랑과 재력 덕분에 관광객은 태평양 연안의 산비탈에 자리 잡은 5성급 리조트에서 중미의 재벌처럼 지낼 수 있다.

19세기 설탕과 교통 재벌의 5대손인 펠라스가 젊은 시절 요트를 타고 니카라과의 에메랄드 해안을 처음 지나쳤을 때 그곳은 원숭이와 재규어, 도마뱀, 모기 천지였다. 10년 전 그는 작은 만 근처의 땅 6.5㎢를 사들여 ‘이슬라 과야킬’이라는 이름의 휴양지를 조성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리조트를 지어 ‘무쿨’(마야어로 ‘비밀’이라는 뜻)이라고 명명했다.

이 만은 요즘 니콰라과 부자들 사이에선 비밀이 아니다. 펠라스가 자신과 부인을 위해 지은 저택 근처에 부자들의 별장이 많이 들어섰다. 세계 수준의 서퍼들도 바닷물이 따뜻하고 파도가 기막힌 이곳을 즐겨 찾는다. 이곳엔 또 헤밍웨이의 쿠바 시절을 동경하는 여행객이 자주 찾아온다.

코스타리카와 마찬가지로 니카라과에도 오래된 도로가 많다. 니카라과 주 공항에서 태평양 해안까지 가는 2차선 도로를 달리려면 반대편에서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트럭들과 담력을 겨루거나 교통체증으로 인내심 테스트를 받거나 둘 중 하나다.
무쿨 리조트의 바. 커다란 나무 줄기로 기둥을 세우고 말린 야자잎으로 지붕을 얹은 정자 (팔라파)에서 해변을 바라보며 니카라과산 럼을 넣은 칵테일을 마실 수 있다.
이 길의 큰 장점은 니카라과에서 가장 멋진 관광지를 지나간다는 것이다. 마사야는 마음 놓고 분화구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활화산 중 하나다. 정글에서 지그재그식 도로를 달려 분화구 가장자리에 다가가면 초현실적인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지구의 종말을 보는 듯하다.

길 모퉁이를 한번 돌면 위쪽에 유황색 구름이 보인다. 다음 모퉁이를 돌면 그 구름 사이로 1520년 스페인 수사들이 세운 거대한 검은 십자가가 보인다. 그들은 지옥의 입구라고 믿었던 분화구 속에 악마를 가둬두기 위해 이 십자가를 세웠다. 우리는 꼭대기까지 차를 타고 올라가서 분화구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관광객 몇몇이 발 아래 거대한 협곡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협곡 밑바닥의 구덩이에선 오렌지색 용암이 부글거렸다.

다시 해안으로 향하는 길에 말 탄 사람들과 3륜 택시, 세미트럭들을 지나쳐 달렸다. 지나는 길에 파형강판으로 된 원룸 주택도 눈에 많이 띄었는데 대개 집 앞 나무에 소나 당나귀, 돼지가 묶여 있었다. 비옥한 화산 토양에 조성된 옥수수와 사탕수수 밭이 사방으로 몇 ㎞씩 뻗어 있었다.

2시간 뒤 우리는 무쿨 리조트의 중앙 팔라파(열대 지방의 정자) 앞에 차를 세웠다. 커다란 나무 줄기로 기둥을 세우고 말린 야자잎으로 지붕을 얹은 이 정자는 야외 리셉션 로비다. 널찍한 공간에 고리버들로 만든 흰색 흔들의자들이 놓여 있다. 이 리조트는 문을 연 지 3년밖에 안 돼 직원들이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는 부자 손님들을 응대할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따라서 손님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경직되거나 겉치레 같은 느낌은 찾아볼 수 없고 매우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씨가 엿보인다.
무쿨 리조트의 숙박 시설인 보이오(목재나 갈대로 만든 오두막)에는 작은 풀장이 딸려 있다.
무쿨의 지배인에 따르면 펠라스는 직원들에게 영어와 손님접대 강의를 무상으로 들을 수 있게 한다. 또 무상 의료 서비스와 식수를 제공하며 축구 교실도 개설했다. 무쿨은 또 투숙객이 현지 학교에 들러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태평양이 오렌지색 석양으로 물들 때 웨이터가 니카라과 전통 칵테일 마쿠아를 내왔다. ‘플로르 데 카나’(펠라스의 가문에서 만드는 럼)에 오렌지와 레몬, 파인애플 즙을 섞은 칵테일이다. 저녁은 해변의 조그만 정자에서 먹었다. 정중한 웨이터들이 따뜻한 스테이크 타코를 내왔다.

다음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우리가 묵는 보이오(목재나 갈대, 밀짚으로 만든 아메리카의 오두막) 현관에 커피와 쿠키가 배달되는 소리에 잠이 깼다. 절벽 쪽에 있는 침실 1개짜리 이 보이오에는 작은 풀장도 딸려 있다. 매일 아침 웨이터가 골프 카트를 타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 아침 식사를 배달한다. 우리가 커피를 마시고 쿠키를 먹으며 기지개를 켜는 동안 목이 흰 어치(까마귓과의 새) 3마리가 담장 난간에 앉아 던져준 쿠키를 쪼아 먹었다. 저 아래쪽에선 바닷물이 핑크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침 식사 후 해변으로 나갔다. 난 나무 아래 해먹에 누워 독서를 했다. 메리 매카시의 ‘더 그룹(The Group)’(1930년대 바사대학 졸업생들의 성적·지적 모험에 관한 이야기)과 해리 허트 3세가 쓴 도널드 트럼프 전기 ‘로스트 타이쿤(Lost Tycoon)’을 번갈아 읽었다.

나와 함께 간 친구는 호주인 강사의 지도를 받으며 서핑을 했다. 난 마쿠아를 마시면서 반짝이는 수평선에 아른거리는 범선을 바라봤다. 만을 형성하는 거대한 두 절벽 중 오른쪽에 큰 동굴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곳에 해적들이 숨어 럼을 마시며 카드 놀이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그들의 어깨 위에는 앵무새와 원숭이가 앉아 있고 그들은 곧 깊은 잠에 빠진다.

무쿨에는 데이비드 맥레이 키드(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류스에 ‘캐슬 코스’를 설계한 디자이너)가 설계한 골프 코스가 있다. 매우 인상 깊지만 골프를 안 치는 내겐 아무 의미가 없다. 난 골프 코스 가장자리에 있는 정글이 훨씬 더 흥미로웠다. 그곳에선 고함 원숭이의 짖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무쿨을 떠나기로 한 날 아침이 밝았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며칠 동안은 트위터에서 벗어나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아침 식사인 쿠키를 어치들과 나눠 먹고 해변의 모래 사장을 걸으며 따뜻한 파도에 발을 담근 다음 짐을 꾸려 자동차에 실었다.

자정 무렵 뉴욕으로 돌아와 음산한 JFK 공항의 택시 대기 줄에 섰다. 난 멋진 니카라과 밀짚모자를 하나 사왔고 주머니엔 해변의 모래를 좀 담아왔다. 1980년대에 총과 마약 밀수업자들이 미국으로 들여오던 물건들과는 사뭇 달랐다. 애시 보딩을 안 해본 것과 펠라스를 만나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강사가 필요한지 물어보지 않은 게 후회됐다.

- 니나 벌리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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