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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찬 칼럼] 돈이 돌지 않는다

[양재찬 칼럼] 돈이 돌지 않는다

사상 최저 수준 저금리에도 돈이 돌지 않는다. 경제의 혈액인 돈이 한쪽으로 쏠리거나 고이는 ‘돈맥경화’ 현상이 심각하다. 대통령 탄핵 정국이 예상보다 길어짐에 따른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에 기업들은 투자에 나서기보다 은행에 돈을 쌓아둔다. 조류인플루엔자(AI)에 이어 구제역 등 가축전염병이 확산하면서 가뜩이나 냉랭하던 내수도 얼어붙었다.

한국은행이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시중에 자금을 넉넉히 공급해도, 정부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재정을 쏟아부어도 기업투자 등 실물 부문으로 흘러가지 않고 가계소비도 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말 현재 기업이 은행에 맡긴 돈은 383조4597억원. 1년 새 35조4043억원 불어났다. 증가율이 10.2%로 경제성장률(2.7%)의 네 배에 육박한다. 아울러 현금화하기 쉬운 대기성 자금인 단기 부동 자금이 1010조3000억원으로 사상 처음 1000조원을 넘어섰다. 단기 부동자금 규모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540조원이었다. 10년도 안 돼 거의 두 배로 불어난 것이다. 전체 통화량이 약 2400조원이니 시중 자금의 42%가 제대로 순환되지 않고 있음이다.

돈은 돌지 않는 상태를 넘어 퇴장하는 형국이다. 지난해 발행된 5만원권은 23조원으로 2009년 발행을 시작한 이후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환수된 것은 11조원에 그쳤다. 절반이 넘는 12조원이 금고 속으로 숨은 것이다. 미국의 100달러나 유럽연합(EU)의 500유로 고액권 회수율이 70~90%인 점과 비교하면 한국의 돈맥경화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금리인하→투자확대→경기진작’이라는 통화정책 전달경로가 작동하지 않는다. 한은 기준금리는 2012년 7월 연 3.25%에서 지난해 6월까지 8차례 인하돼 연 1.25%로 떨어졌다. 저금리 및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돈이 풀렸지만, 실물 경기는 호전되지 않고 단기 부동자금이 급증했다. 전셋값이 오르고 부동산시장에 돈이 몰리면서 가계 빚이 불어났다. 가계가 저축한 돈을 기업이 빌려 투자하고 고용을 늘리는 게 아니라 기업이 저축한 돈을 가계가 빌려 아파트를 분양받고 전세금을 내고 있다. 시중에 돈이 넘쳐나도 실물경제로 스며들지 않고 배반하며 엉뚱한 데로 흐르는 한국판 ‘유동성 함정’에 빠져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계속 돈을 풀면 기업의 신규투자를 유발하기보다는 부동산 투기나 증권의 단기 매매차익을 노리는 쪽으로 돈이 흐른다. 그 결과 부동산가격 상승을 부채질해 거품을 키우고 경제체질을 약화시킨다. 새로운 부가가치와 일자리 창출은커녕 주거비 부담과 가계부채를 늘려 소득격차를 확대시키고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일본 경제도 1990년대 이후 유동성 함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면서 ‘잃어버린 20년’을 자초했다.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시중에 직접 통화를 공급하는 양적완화(QE)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실시하고 마이너스 정책금리까지 동원했지만 효과는 별로였다.

돈맥경화가 심화되면 ‘투자-고용-소비’의 선순환이 끊기고 성장이 멈춘다. 한국이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돈이 배반하지 않고 필요한 구석구석 돌게 만들어야 한다. 창업과 시장진입 규제를 혁파해 다양한 분야의 신산업과 신생기업이 둥지를 틀 수 있게 해야 한다. 안심하고 투자하도록 기업회계의 투명성도 높여야 한다. 경제의 ‘돈맥경화’ 해소 못지않게 정치의 ‘동맥경화’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것도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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