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3) | 자연의 봄 맞이] 어느 날 갑자기 핀 꽃은 없다
[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3) | 자연의 봄 맞이] 어느 날 갑자기 핀 꽃은 없다
봄을 맞는 동식물의 치열한 준비 … 나무는 꽃 피우기 위해 플랜B와 또 다른 대비책 마련 모두 퇴근한 늦은 밤, 자신의 사무실에서 어둠에 쌓인 창 밖을 하염없이 응시하는 최고경영자(CEO)들이 있다. 대개 이런 이들의 마음은 수만 가지 생각으로 엉키고 설켜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런 것 같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래 이렇게 하자’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다’ 싶다. 내일 오전 회의에서는 수백억원이 넘는 투자 여부를 확정 지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지금이 적기(適期)인가?’ ‘그래 지금’이라는 생각 한편으로 ‘상황을 좀 더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시소게임을 벌인다.
지금이야 장밋빛 전망 일색이지만 3년 후, 5년 후에도 지금의 전망이 그대로 들어맞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몇 년 걸려 공장 짓고 상품 개발 마치고 나면 세상과 시장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고 좋은 시절이 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 마음의 저울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정을 내리는 순간 회사의 주요한 자원은 그쪽으로 집중될 것이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쏟아 부은 일이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뒷목이 서늘해지고 등엔 식은땀이 흐른다. 지금까지 아무리 잘해왔다 하더라도 한 방에 훅 가는 게 요즘 세상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손에 잡히는 일이 없고, 잠을 잘 수 없고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다. 지금 해야 하는가, 아니면 좀더 두고 봐야 하는가? 최종 결정권자는 이 단순한 물음 앞에 한없이 흔들린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다행스럽게도 이런 고민은 살아있는 생명체들에겐 아주 흔한(?) 것이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건 언제나 불확실성 속에서 헤매야 하는 것이라, 그때 그때 최선책이 있을 뿐 정답이란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온 세상을 자신들의 색깔로 바꾸고 있는 풀과 나무들도 그렇다. 잎을 틔우고 꽃을 펼쳐낼 ‘때’를 알지 못하면 사는 게 힘들어진다.
우리는 싹이 돋고 꽃이 피면 ‘봄이 왔구나’ 하고 말지만, 풀과 나무들에 봄은 즐기는 시간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하는 격전의 시간이다. 무엇보다 잎과 꽃을 내야 하는 때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제대로 포착하지 않으면 한 해 성장은 끝이나 다름없다. 남들이 하는 걸 보고 따라 하면 좋겠지만 그러면 뒤처지기 쉽다. 일찍 시작한 주변의 경쟁자들이 먼저 잎을 펼쳐내 햇빛을 다 받아버리면 낭패 아닌가? 또 꽃을 늦게 피우면 벌과 나비처럼 수정을 해주는 중매쟁이를 다 빼앗겨 후세를 남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먼저 시작하는 건 어떨까. 별 일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꽃샘 추위 같은 한파가 몰아치면 성급하게 내놓은 가녀린 꽃과 잎들은 오들오들 떨다 꼼짝없이 얼어 죽을 수밖에 없다. 나무의 동사(凍死)가 겨울보다 봄에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황이 이러니 언제 잎과 꽃을 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창밖을 보며 서성거리는 CEO와 다르지 않다. 말은 쉽지만 너무나 어려운 최적의 시점을 골라야 한다. 풀과 나무들에 봄은 사업가들에게 호경기와 같은 것. 이들은 봄이 오는 걸 어떻게 알까. 입춘이나 우수 같은 절기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봄을 선언해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미국의 식물학자 윌리엄 버거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초원에서 희귀한 난초를 발견한 그는 호기심이 동해 줄기 하나를 떼어 연구실로 가져와 키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가혹한 건기와 우기가 오가는 거친 야생에서 사는 이들 난초는 보통 우기가 시작되는 5월에 꽃을 피운다. 필요한 물이 충분히 주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온실에서 1년 내내 물을 충분히 주는데도 매년 5월에만 꽃을 피웠다. 꽃을 피우게 하는 게 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알고 보니 난초들은 낮의 길이, 즉 해가 비치는 시간을 기준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버거가 정작 궁금했던 것은 이곳은 적도 근처라 일 년 열두 달 동안, 특히 12~6월까지는 낮의 길이가 거의 비슷한데 어떻게 5월을 콕 집어내 꽃을 피웠을까 하는 것이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이 난초는 몸속의 생체 시계(biological clock) 라는 기능을 통해 언제 꽃을 피워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생체 시계가 뭐기에 이 중요한 걸 가능하게 할까. 생체 시계란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몸속에 갖고 있는, 언제 활동을 시작하고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알람 시계 같은 신체 리듬이다.
대부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지만 제대로 쓰는 건 시계를 갖고 있는 존재에게 달렸다. 태엽으로 돌리던 시계처럼 날마다 기준 시간에 맞춰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식물은 대개 추위나 온도, 그리고 낮의 길이 등을 종합해 언제 꽃을 피우고 잎을 낼지 결정하지만 보통 낮의 길이를 ‘표준 시간’으로 삼아 날마다 자신의 시계를 맞춘다. 낮의 길이를 표준 시간으로 삼는 건 기후는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면서 생기는 낮의 길이는 거의 일정한 까닭이다. 뱃사람들이 북극성을 기준으로 방향을 잡는 것처럼 말이다. 버거가 가져온 난초가 제철에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다. 놀라운 건 당시 버거가 거주했던 곳은 12월부터 6월까지 낮의 길이 차이가 채 한 시간도 나지 않았는데 정확하게 ‘제 때’를 감지했다는 것이다.
동물들도 같은 시계를 쓴다. 예를 들어 야행성인 다람쥐는 하루 내내 어둠 속에 있어도 해가 질 때쯤 활동을 시작하고 해가 뜰 때쯤 활동을 중지한다. 체내에 있는 시간 조절 장치를 통해 언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해야 할지 아는 것이다. 이런 녀석들을 낮의 길이를 알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곳에 넣어 두면 어떨까. 녀석들의 생체 시계는 날이 갈수록 제각기 달라진다. 어떤 녀석은 빨라져 24시간보다 적은 23시간 30분이 될 수 있고, 다른 녀석은 24시간이 넘은 24시간 40분을 하루로 인식한다. 업데이트를 하지 못하고 어림짐작으로 지내다 보니 들쭉날쭉해지는 것이다. 하루를 다르게 인식하니 행동 개시와 종료 시각이 달라지고 한 달쯤 지나면 12시간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낮의 길이를 알 수 있는 곳에 두면 녀석들의 ‘시간’은 곧 같아진다. 생존을 결정하는 낮의 길이, 정확하게는 낮이 끝나는 시점을 기준으로 자신의 시계를 재조정한다(야행성은 해가 지는 걸 기준으로 시간을 맞추고, 주행성은 해가 뜨는 걸 기준점으로 한다). 날이면 날마다 변하는 낮의 길이에 맞춰 몸속의 신체 리듬을 재조정하는 것은 귀찮기도 하고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값비싼 일이다. 그런데도 하나같이 이걸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살아가는 일에서는 언제 시작하고 끝내야 할지를 아는 시간 감각, 더 나아가 변화 감지가 중요한 까닭이다. 예를 들어 주행성 동물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와야 하고, 야행성은 반대로 해야 한다. 밤눈이 어두운 주행성 동물이 밤에 돌아다니는 건 밤눈에 밝은 포식자에게 ‘나 여기 있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빛이 없는 깊은 동굴 속에 사는 박쥐가 저녁 때를 모르면 어떨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동굴 밖으로 나가 ‘때’를 살피고 들어와야 할 것이다.
수많은 생명체들에게 이런 생체 시계가 있는 것은 ‘제때’라는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서 행동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모르면 좋은 일은 남의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위험해진다. 이들에게만 그럴까. 일해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몰라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몰라 파국을 맞은 사람들 또한 한 둘이 아니다. 제때를 아는 시간 감각은 살아가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해야 할 일을 대충하면 결과도 대충 돌아오게 마련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환경을 부단히 몸속에 축적하다 보면 빅데이터가 그런 것처럼 미세하게 다가오는 계절을 감지하는 감각까지 얻을 수 있다. 언제 잎을 내고 꽃을 피워야 하는지 포착할 수 있다. 물론 판단은 나름이다. 줄줄이 서 있는 같은 나무, 같은 풀이라도 서로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시기가 다른 게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판단이 한 해를 결정짓는다. 어쨌든 이 덕분에 철새들은 수천 킬로나 되는 여정을 정확하게 시작할 수 있고(어떤 철새들은 오차범위가 15분 이내라고 한다), 곤충은 때에 맞춰 번데기로 변할 수 있고, 개구리는 동면 준비에 착수할 수 있다. 이런 분명한 이점이 있어서 그런지 기생충들까지 생체 시계를 내장하고 있을 정도다.
봄은 어디서 오는가? 계절이라는 봄은 바깥에서 올지 몰라도 생명체가 누리는 봄은 내부로부터 온다. 변화하는 세상을 제대로 포착하려는 하루하루의 노력, 그 시간의 축적이 봄을 만들어낸다. 그렇다. 봄은 그 누군가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식물들도 생체 시계를 풀가동하면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면?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뭔가 다른 게 필요하다. 봄을 제대로 맞기 위한 나무들의 두 번째 노력은 먼저 준비하는 것이다. 먼저 준비하면 먼저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우내 찬바람을 묵묵히 맞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 겨울눈이라는, 눈곱만한 걸 가지에 달고 있는데 이게 바로 나무들이 봄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이 겨울눈은 봄이 되면 꽃이 되고 잎이 되는 나무의 희망 캡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놀라운 건 이 겨울눈을 겨울이 아니라 1년 전에 미리 만들어둔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것이 풍요로운 늦은 봄이나 여름, 늦어도 가을이 되기 전까지 말이다. 여력이 있을 때 미리미리 미래성장동력을 만들어두는 삶의 지혜다.
나무들이 1년 전에 준비하는 이 희망 캡슐을 열어 보면 봄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나무들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겨울눈의 겉은 여러 겹으로 된 겉껍질과 보송보송한 솜털로 덮여 있다. 갑옷에 외투를 걸친 것 같은 이런 장비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함이다. 이 안에 눈이 있는데, 조심스레 가운데를 잘라 보면 화창한 봄날에 선 보일 잎과 꽃들을 가지런히 차곡차곡 포개놓고 있다. 봐도 봐도 감탄하게 되는 질서정연한 ‘수납’이다. 나무들은 이렇게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로 겨울을 묵묵히 견디며 봄을 기다린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무들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뭇가지를 보면 가장 최근에 생긴 가지 끝에 가장 큰 겨울눈이 달려있다. 봄이 오면 잎이나 꽃으로 키울 제1 후보 정아(頂芽)다. 경영에 빗대면 정식 후계자다. 이상한 것은 이 정아의 양 옆에 이보다 작은 옆눈(측아ㆍ側芽)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건 뭘까? 만에 하나 정아에 일이 생겨 제대로 자라지 못할 경우 그 자리를 승계할 예비 후계자, 즉 세컨드 플랜(Second plan)이다. 보통 하나의 줄기로 곧게 자라는 나무와 달리 중간에 두 갈래나 세 갈래로 갈라져 자라는 나무들이 바로 이런 경우다. 정아에 문제가 생겨 옆눈이 자라난 것이다. 그러면 이 옆눈에도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할까. 꽃샘 추위가 한 번 더 오거나 배고픈 동물이 새순을 뜯어 먹어 버릴 수도 있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해야 할까.
나무들은 이런 일을 한두 번 당한 게 아닌 듯 이에 대한 대비책까지 마련해두고 있다. 옆눈 옆에 잠아(潛芽)라고 하는 제3 후보군을 더 작게 준비해놓고 있거나 나무 줄기 껍질 속에 만들어놓고 있다. 이런 걸 다 준비하자면 몇 배의 힘이 들겠지만 삶을 포기한 것보다는 나은 까닭일 것이다. 덕분에 화창한 봄이라는 기회가 어느 날 갑자기 몰려오거나 꽃샘 추위라는 예기치 않은 위기가 닥쳐도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다. 꽃 피는 봄날이란 이런 보이지 않는 숨은 노력들이 밖으로 표출된 날이다. 봄이면 새순과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핀 꽃은 없다.
지난 2월 말 봄이 오는 길목에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회장이 미국 ABC뉴스와 눈길을 끄는 인터뷰를 했다. “30년 이상 매년 이탈리아를 방문하면서도 늘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비로소 ‘때가 왔다’고 직감했다.” 슐츠 회장은 지난 1983년 이탈리아의 커피 문화를 접한 후 스타벅스를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 하지만 정작 이탈리아에는 진출하지 못했는데 이제 ‘때가 왔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그도 어둠에 쌓인 창 밖을 보며 수없이 흔들리는 마음의 저울을 겪었을 텐데 이제 확실한 감을 잡았다는 말일 것이다. 궁금하다. 그는 어떻게 그걸 포착했고 어떤 준비를 했을까. 그는 새로운 봄을 맞을 수 있을까.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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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장밋빛 전망 일색이지만 3년 후, 5년 후에도 지금의 전망이 그대로 들어맞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몇 년 걸려 공장 짓고 상품 개발 마치고 나면 세상과 시장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고 좋은 시절이 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 마음의 저울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정을 내리는 순간 회사의 주요한 자원은 그쪽으로 집중될 것이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쏟아 부은 일이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뒷목이 서늘해지고 등엔 식은땀이 흐른다. 지금까지 아무리 잘해왔다 하더라도 한 방에 훅 가는 게 요즘 세상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손에 잡히는 일이 없고, 잠을 잘 수 없고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다. 지금 해야 하는가, 아니면 좀더 두고 봐야 하는가? 최종 결정권자는 이 단순한 물음 앞에 한없이 흔들린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삶과 경영과 자연은 불확실성의 연속
우리는 싹이 돋고 꽃이 피면 ‘봄이 왔구나’ 하고 말지만, 풀과 나무들에 봄은 즐기는 시간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하는 격전의 시간이다. 무엇보다 잎과 꽃을 내야 하는 때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제대로 포착하지 않으면 한 해 성장은 끝이나 다름없다. 남들이 하는 걸 보고 따라 하면 좋겠지만 그러면 뒤처지기 쉽다. 일찍 시작한 주변의 경쟁자들이 먼저 잎을 펼쳐내 햇빛을 다 받아버리면 낭패 아닌가? 또 꽃을 늦게 피우면 벌과 나비처럼 수정을 해주는 중매쟁이를 다 빼앗겨 후세를 남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먼저 시작하는 건 어떨까. 별 일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꽃샘 추위 같은 한파가 몰아치면 성급하게 내놓은 가녀린 꽃과 잎들은 오들오들 떨다 꼼짝없이 얼어 죽을 수밖에 없다. 나무의 동사(凍死)가 겨울보다 봄에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황이 이러니 언제 잎과 꽃을 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창밖을 보며 서성거리는 CEO와 다르지 않다. 말은 쉽지만 너무나 어려운 최적의 시점을 골라야 한다. 풀과 나무들에 봄은 사업가들에게 호경기와 같은 것. 이들은 봄이 오는 걸 어떻게 알까. 입춘이나 우수 같은 절기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봄을 선언해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미국의 식물학자 윌리엄 버거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초원에서 희귀한 난초를 발견한 그는 호기심이 동해 줄기 하나를 떼어 연구실로 가져와 키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가혹한 건기와 우기가 오가는 거친 야생에서 사는 이들 난초는 보통 우기가 시작되는 5월에 꽃을 피운다. 필요한 물이 충분히 주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온실에서 1년 내내 물을 충분히 주는데도 매년 5월에만 꽃을 피웠다. 꽃을 피우게 하는 게 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알고 보니 난초들은 낮의 길이, 즉 해가 비치는 시간을 기준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버거가 정작 궁금했던 것은 이곳은 적도 근처라 일 년 열두 달 동안, 특히 12~6월까지는 낮의 길이가 거의 비슷한데 어떻게 5월을 콕 집어내 꽃을 피웠을까 하는 것이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이 난초는 몸속의 생체 시계(biological clock) 라는 기능을 통해 언제 꽃을 피워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생체 시계가 뭐기에 이 중요한 걸 가능하게 할까. 생체 시계란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몸속에 갖고 있는, 언제 활동을 시작하고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알람 시계 같은 신체 리듬이다.
대부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지만 제대로 쓰는 건 시계를 갖고 있는 존재에게 달렸다. 태엽으로 돌리던 시계처럼 날마다 기준 시간에 맞춰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식물은 대개 추위나 온도, 그리고 낮의 길이 등을 종합해 언제 꽃을 피우고 잎을 낼지 결정하지만 보통 낮의 길이를 ‘표준 시간’으로 삼아 날마다 자신의 시계를 맞춘다. 낮의 길이를 표준 시간으로 삼는 건 기후는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면서 생기는 낮의 길이는 거의 일정한 까닭이다. 뱃사람들이 북극성을 기준으로 방향을 잡는 것처럼 말이다. 버거가 가져온 난초가 제철에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다. 놀라운 건 당시 버거가 거주했던 곳은 12월부터 6월까지 낮의 길이 차이가 채 한 시간도 나지 않았는데 정확하게 ‘제 때’를 감지했다는 것이다.
동물들도 같은 시계를 쓴다. 예를 들어 야행성인 다람쥐는 하루 내내 어둠 속에 있어도 해가 질 때쯤 활동을 시작하고 해가 뜰 때쯤 활동을 중지한다. 체내에 있는 시간 조절 장치를 통해 언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해야 할지 아는 것이다. 이런 녀석들을 낮의 길이를 알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곳에 넣어 두면 어떨까. 녀석들의 생체 시계는 날이 갈수록 제각기 달라진다. 어떤 녀석은 빨라져 24시간보다 적은 23시간 30분이 될 수 있고, 다른 녀석은 24시간이 넘은 24시간 40분을 하루로 인식한다. 업데이트를 하지 못하고 어림짐작으로 지내다 보니 들쭉날쭉해지는 것이다. 하루를 다르게 인식하니 행동 개시와 종료 시각이 달라지고 한 달쯤 지나면 12시간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낮의 길이를 알 수 있는 곳에 두면 녀석들의 ‘시간’은 곧 같아진다. 생존을 결정하는 낮의 길이, 정확하게는 낮이 끝나는 시점을 기준으로 자신의 시계를 재조정한다(야행성은 해가 지는 걸 기준으로 시간을 맞추고, 주행성은 해가 뜨는 걸 기준점으로 한다).
제때를 알게 하는 생체 시계
수많은 생명체들에게 이런 생체 시계가 있는 것은 ‘제때’라는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서 행동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모르면 좋은 일은 남의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위험해진다. 이들에게만 그럴까. 일해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몰라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몰라 파국을 맞은 사람들 또한 한 둘이 아니다. 제때를 아는 시간 감각은 살아가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해야 할 일을 대충하면 결과도 대충 돌아오게 마련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환경을 부단히 몸속에 축적하다 보면 빅데이터가 그런 것처럼 미세하게 다가오는 계절을 감지하는 감각까지 얻을 수 있다. 언제 잎을 내고 꽃을 피워야 하는지 포착할 수 있다. 물론 판단은 나름이다. 줄줄이 서 있는 같은 나무, 같은 풀이라도 서로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시기가 다른 게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판단이 한 해를 결정짓는다. 어쨌든 이 덕분에 철새들은 수천 킬로나 되는 여정을 정확하게 시작할 수 있고(어떤 철새들은 오차범위가 15분 이내라고 한다), 곤충은 때에 맞춰 번데기로 변할 수 있고, 개구리는 동면 준비에 착수할 수 있다. 이런 분명한 이점이 있어서 그런지 기생충들까지 생체 시계를 내장하고 있을 정도다.
봄은 어디서 오는가? 계절이라는 봄은 바깥에서 올지 몰라도 생명체가 누리는 봄은 내부로부터 온다. 변화하는 세상을 제대로 포착하려는 하루하루의 노력, 그 시간의 축적이 봄을 만들어낸다. 그렇다. 봄은 그 누군가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식물들도 생체 시계를 풀가동하면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면?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뭔가 다른 게 필요하다.
봄은 어디서 오는가?
나무들이 1년 전에 준비하는 이 희망 캡슐을 열어 보면 봄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나무들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겨울눈의 겉은 여러 겹으로 된 겉껍질과 보송보송한 솜털로 덮여 있다. 갑옷에 외투를 걸친 것 같은 이런 장비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함이다. 이 안에 눈이 있는데, 조심스레 가운데를 잘라 보면 화창한 봄날에 선 보일 잎과 꽃들을 가지런히 차곡차곡 포개놓고 있다. 봐도 봐도 감탄하게 되는 질서정연한 ‘수납’이다. 나무들은 이렇게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로 겨울을 묵묵히 견디며 봄을 기다린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무들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뭇가지를 보면 가장 최근에 생긴 가지 끝에 가장 큰 겨울눈이 달려있다. 봄이 오면 잎이나 꽃으로 키울 제1 후보 정아(頂芽)다. 경영에 빗대면 정식 후계자다. 이상한 것은 이 정아의 양 옆에 이보다 작은 옆눈(측아ㆍ側芽)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건 뭘까? 만에 하나 정아에 일이 생겨 제대로 자라지 못할 경우 그 자리를 승계할 예비 후계자, 즉 세컨드 플랜(Second plan)이다. 보통 하나의 줄기로 곧게 자라는 나무와 달리 중간에 두 갈래나 세 갈래로 갈라져 자라는 나무들이 바로 이런 경우다. 정아에 문제가 생겨 옆눈이 자라난 것이다. 그러면 이 옆눈에도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할까. 꽃샘 추위가 한 번 더 오거나 배고픈 동물이 새순을 뜯어 먹어 버릴 수도 있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해야 할까.
나무들은 이런 일을 한두 번 당한 게 아닌 듯 이에 대한 대비책까지 마련해두고 있다. 옆눈 옆에 잠아(潛芽)라고 하는 제3 후보군을 더 작게 준비해놓고 있거나 나무 줄기 껍질 속에 만들어놓고 있다. 이런 걸 다 준비하자면 몇 배의 힘이 들겠지만 삶을 포기한 것보다는 나은 까닭일 것이다. 덕분에 화창한 봄이라는 기회가 어느 날 갑자기 몰려오거나 꽃샘 추위라는 예기치 않은 위기가 닥쳐도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다. 꽃 피는 봄날이란 이런 보이지 않는 숨은 노력들이 밖으로 표출된 날이다. 봄이면 새순과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핀 꽃은 없다.
지난 2월 말 봄이 오는 길목에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회장이 미국 ABC뉴스와 눈길을 끄는 인터뷰를 했다. “30년 이상 매년 이탈리아를 방문하면서도 늘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비로소 ‘때가 왔다’고 직감했다.” 슐츠 회장은 지난 1983년 이탈리아의 커피 문화를 접한 후 스타벅스를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 하지만 정작 이탈리아에는 진출하지 못했는데 이제 ‘때가 왔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그도 어둠에 쌓인 창 밖을 보며 수없이 흔들리는 마음의 저울을 겪었을 텐데 이제 확실한 감을 잡았다는 말일 것이다. 궁금하다. 그는 어떻게 그걸 포착했고 어떤 준비를 했을까. 그는 새로운 봄을 맞을 수 있을까.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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