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브스 첫 100년
포브스가 창간된 1917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시기 중 하나였다. 미국이 오랜 고립주의 정책을 파기하고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10월 혁명으로 러시아를 장악한 근대 최초의 전체주의 정권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격렬하게 뒤흔들었다.
세계대전이 한창인 때 잡지를 창간하다니, 어리석은 결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재단사의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B.C. 포브스는 비즈니스 전문기자가 되고, 나중에는 스스로 기업가가 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꿈을 위해 남아공으로 간 그는 신규 창간한 랜드 데일리 메일(Rand Daily Mail)의 에드가 월러스(Edgar Wallace) 편집장 밑에서 일하며 출판업계에 발을 디뎠다. 나중에 영국과 미국에서 소설가로 유명해진 에드가 월러스는 술에 취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면 B.C.가 편집장을 대신해 사설을 썼다. 그러나 남아공 시장 자체가 너무 작다고 느낀 B.C.는 1904년 더 큰 물에서 놀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뉴욕에 도착해서는 한동안 일자리를 잡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수 주 동안 무급으로 일하겠다고 편집장에게 제안을 했다. 약속한 기간이 끝나고 월급을 요구했을 때 그 요청을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업가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B.C.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취직에 성공했고, 의욕이 넘쳤던 그는 필명을 내세워 다른 잡지에서도 비즈니스 전문기자로 일자리를 얻었다. 편집장 두 명이 자기 밑에 있는 기자가 더 낫다고 언쟁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두 직원이 전부 B.C.였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B.C.는 금융 전문기자로 성장하며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기사뿐 아니라 기고문도 쓰고 책도 저술했다. 그러나 그는 기업가를 취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기업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혈통을 가지고 있어서 수집한 자료를 사용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도 있었다. (요즘 시대를 살았다면 분명 블로거로 활발히 활동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포브스는 자신이 직접 잡지를 출간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잡지의 원래 이름은 두어즈 앤 두잉즈(Doers and Doings)였지만, 결국 자신의 성(姓)을 이름으로 내세웠다. 당시에는 흔한 관행이었다.
B.C.는 ‘기업가적 자본주의’로 자리 잡은 개념을 굳게 신봉했다. 그는 기업 경영자의 성취를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기업가의 행보가 과감할수록 좋았다. 그렇다고 기업가를 옹호한 건 아니었다. 직원들을 학대하거나 경영에 무능력한 기업가는 가차 없이 꾸짖었다. 포브스 창간호에서 B.C는 ‘비즈니스는 엄청난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선사하기 위해 시작됐다’고 적었다. 인간은 결국 비인간적 힘의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을 거부한 것이다.
1920년대는 포브스 잡지의 전성기였다. 오손 웰즈의 고전 영화 <시민 케인(citizen kane)> 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디어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는 1928년 포브스에 인수를 제안했다. 제시 금액은 요즘 기준으로 수천만 달러에 달했다. B.C.는 고고하게 제안을 거절했지만 얼마 안 가 이 결정이 치명적 실수가 아니었을까 큰 후회를 했다.
대공황이 닥친 것이다. 포브스는 큰 타격을 받았다. 1932년까지 광고는 80% 이상 감소했고, 회사는 거의 파산해서 이름만 간신히 유지하는 상태였다. 다행히 허스트 신문에 기고를 계속했던 그는 프리랜서로 번 돈을 급한 데 쓰며 ‘스코틀랜드 주(Scotch week)’를 도입했다. 4번째 주에는 직원에게 주급을 주지 않는 조치였는데, 이는 월급 25% 삭감을 의미했다. 그래도 워낙 힘든 때라 직원들은 그저 직장에 다니고 있음에 안심했다. B.C. 자신은 수 년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월급 수표를 한 번도 현금으로 바꾸지 않았다.
대공황을 간신히 살아남은 포브스는 비즈니스위크와 포춘에 밀려 1930년대를 근근이 버텼다. 1945년 육군 기관총 사수로 복무하던 B.C.의 아들 말콤(MSF)이 중상을 입고 제대한 후 포브스에 입사했다. 다른 아들 브루스는 이미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당시 포브스 콘텐트는 대부분 프리랜서 기자의 글로 구성되어 있었다. MSF는 사설 기사의 수준을 대폭 개선하기 위해 편집진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 주 시황을 분석하고 투자 주식을 추천하는 주간지 더 포브스 인베스터(The Forbes Investor)를 창간했다. 연간 구독료는 무려 35달러였다. (포브스 구독료가 4달러 이하였던 시절이다) 출간비용이 포브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는데 구독료는 포브스의 9배에 달했으니 말도 안 되게 비싼 수준이었다. 그러나 더 포브스 인베스터는 출간 즉시 큰 성공을 거두었고, 포브스는 회사 재정비에 필요한 자본을 확충할 수 있었다.
1947년 창간 30주년을 맞이한 포브스는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창간 기념 만찬을 열었던 초기 전통을 되살렸다. 만찬 연설자는 토마스 듀이(Thomas Dewey) 뉴욕 주지사였다.
이후 논설 기사의 수준이 더 올라갔고, 다양한 혁신이 도입되며 구독수 및 광고가 증가했다. 1949년 1월부터 산업·기업별 연간 성적표를 발표한 포브스는 이때부터 통계 노하우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1월은 잡지 광고가 가장 저조한 달이었지만, 포브스 산업·기업별 성적표가 공개되면서 1월은 광고 수익이 가장 좋은 달로 바뀌었다. 1950년대가 시작되자 포브스는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뮤추얼펀드 산업에 대해 심층 보도를 시작했다. 상승·하락기별 뮤추얼펀드 장기 실적표를 만들어 매년 공개하는 기사였다. 경기회복 덕분에 대공황 당시 쓰디쓴 기억에서 빠져나온 수백만 명이 금융 투자에 나선 걸 포착한 결정이었다.
제임스 마이클스(James Michaels)가 편집장으로 부임한 60년대부터 포브스는 본격적으로 뛰어난 기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1961~99년) 포브스와 함께 한 마이클스 편집장은 까칠한 성격에 절대 기가 죽지 않는 기개를 가진 유능한 편집장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포브스 기사의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이때부터 포브스는 비평가들이 연극을 비평하는 방식으로 혹독하게 기업을 평가하는 직설적 기사로 명성을 쌓았다. 다른 어떤 잡지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기업 재무제표를 심층 분석하고 파헤쳤기 때문에 포브스 기사에는 진실성과 울림이 있었다. 연금보험사들이 터무니 없이 높은 수수료를 가져 가면서도 가입자에게 제대로 고지하지 않았음을 폭로한 1998년의 표지 기사가 좋은 예다. 말도 안 되게 높은 수수료 때문에 미 국민 다수가 가입했던 연금보험의 투자 수익이 형편없음을 보도한 기사였다.
1982년 포브스는 미국 400대 부자 순위를 담은 특별판을 발간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MSF가 제안한 기획이었다. (숫자 ‘400’은 뉴욕 사교계 여왕 캐롤라인 애스터(Caroline Astor)가 1892년 사교계 인사 400명을 초대해 열었던 무도회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사교계 규칙을 결정했던 워드 맥칼리스터(Ward McAllister)는 ‘더 포 헌드레드’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 제안이 나왔을 때 포브스 내부에서는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 순위 산정에 필요한 정보 상당 부분이 비공개인데 대체 그 400명을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후보를 추려낸다 해도 그들의 재무 정보는 어떻게 찾나? 부자 순위를 발표했다가 그 사람들이 납치나 강도 등 강력범죄 대상이 되거나 귀찮은 기부 부탁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기사 가능성에 대해 ‘조사’를 실시한 편집부는 MSF에게 그의 생각이 말도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알겠네.” 포브스 대표였던 MSF가 답했다. “그럼 자네들에게 맡기지 않겠어. 내가 직접 한다고. 외부에서 사람을 고용하고 편집진 일부를 차출해서 팀을 꾸리지.” 결국 편집부는 항복했다. ‘부자 순위’로 명명된 팀에 합류한 편집자와 기자들은 입수가 불가능해 보였던 정보를 입수하는 방법을 능숙하게 찾아냈다. 덕분에 포브스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검색 범위를 넓히고 자료를 입수하는 데이터마이닝 기법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부자 순위를 담은 첫 특별판은 편집 및 재정 면에서 대대적 성공을 거두었고, 부자 순위 콘텐트는 포브스의 든든한 기둥이 됐다. 성공의 핵심은 신뢰성과 혁신이다.
포브스는 ‘브랜딩’을 통해 성공을 지속시켰다. 아름답고 매끄러운 디자인에 집착한 스티브 잡스가 확실히 보여줬듯이, 이전보다 나은 상품을 선보이는 걸로는 충분치 않은 세상이 됐다. 1964년 48세에 암으로 사망한 형 브루스의 뒤를 이어 대표로 취임한 MSF는 포브스라는 이름이 기업가적 업적과 성공, 훌륭한 인생을 연상시키도록 만드는 행보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전통적 CEO가 잘 하지 않는 행동도 했다. 파베르제의 달걀과 미 대통령 서신을 비롯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원고, 기념품, 장난감 보트, 장난감 병정 등을 수집해 대중이 볼 수 있도록 박물관에 전시한 것이다. 박물관은 5번가에 위치한 포브스 사옥에 있다.1967년 포브스는 1929년 대공황 직전 기록했던 광고 수주 고점을 다시 돌파했다. MSF는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뉴저지 저택에서 화려한 파티를 열었다.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미국 최고 기업 지도자 500여 명과 그들의 배우자가 파티에 참석했다. 기조연설은 휴버트 험프리(Hubert Humphrey) 부통령이 맡았다. 포브스 70주년 파티도 MSF 뉴저지 저택에서 열렸다. 70명의 백파이프 연주자들이 안개 자욱한 숲에서 나와 언덕을 내려오던 장관을, 손님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헬리콥터 수십 대가 번갈아 날아와 거물급 기업인을 뉴저지 저택에 내려줬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헬리콥터를 타고 온 사람은 당연히 도널드 트럼프였다.
축하 행사가 항상 환영을 받은 건 아니다. 1989년 8월 MSF는 수 년 전 자신의 70세 생일에 매입한 모로코 탕헤르의 팔레 망두(Palais Mendoub·지금은 이름에 걸맞게 모로코 왕의 재산이 됐다)에서 창간 기념파티를 열었다. MSF가 파티 비용을 다 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일부 미디어는 비난을 쏟아냈다. 다른 사람이 돈을 쓰는 방식에 대해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은 정말 많았다. 외부인들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지나친 호사와 돈 낭비로만 보였는지 모르지만, 실제 파티가 가져온 효과는 대단했다. 파티는 포브스가 수십 년간 글로벌 잡지로서 강력한 이미지를 유지하도록 도왔다. 많은 기업가와 연예인은 포브스 잡지에 얼굴이 실려야 비로소 ‘성공했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브랜딩’이 아닌가!
규모만 보면 포브스 인코퍼레이션(Forbes Inc.)은 타임이나 다우존스, 맥그로힐 등 거대 미디어 그룹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더 유명하고 고급스럽고 화려한 건 포브스였다. 재계 영향력 면에서도 경쟁잡지 포춘과 비즈니스위크를 앞질렀다.
미디어 산업은 증기 발전 윤전인쇄기 발명으로 신문 및 잡지 대량 판매가 가능해진 184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근본적으로 변한 게 없었다. 포브스가 세계대전 이후 눈부신 재기와 발전을 이룬 것도 그 덕분이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는 달랐다. 출판 미디어 산업의 암흑이 시작됐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출판업계는 인쇄 출판물에 넣었던 기사를 그대로 온라인에 올리는 게 온라인 출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부분은 자체 웹사이트 오픈을 망설였다. 힘들게 제작한 콘텐트를 왜 무료로 공개해야 하는가? 당시만 해도 온라인 광고는 시장조차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포브스는 온라인 콘텐트와 출판 잡지를 완전히 다른 별개의 상품으로 바라보며 포브스닷컴(Forbes.com)을 시작했다. 온라인 부서를 다른 건물에 두고 직원을 따로 뽑았으며, 보고선도 별개로 구축했다. 웹사이트에는 잡지 기사를 그대로 올리지 않고 온라인에서만 볼 수 있는 오리지널 콘텐트로 채웠다. 다른 레거시 출판업체는 좀처럼 하지 않은 시도였다. 처음 몇 년간 엄청난 손실을 기록하던 포브스닷컴은 이후 수익을 내기 시작했고, 경영진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업부를 통합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는 격렬히 충돌했고, 이런 양상은 편집부에서 특히 심했다. 오프라인 기자들은 온라인 기자들이 얕고 피상적이며 급 떨어지는 기사만 내놓는다며 이들의 무식과 허세를 욕했다. 반면, 온라인 기자와 편집진은 오프라인쪽 사람들이 게으르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속물이라고 생각했다.
2010년 루이스 드보르킨(Lewis D’Vorkin)이 최고상품책임자로 합류하면서 대대적 변화가 일어났다. 루이스는 온라인 출판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과감하고 독창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새로 개발한 기고 모델은 현재 관련 분야에서 전문가 1700명을 확보하고 있다. 루이스는 인쇄 출판업계에서 상당한 커리어를 쌓았지만, 독자를 위한 정보 발굴 및 전달에 있어서 레거시 미디어가 독점권을 가져야 한다는 오만은 부리지 않았다. 콘텐트만 좋다면 누가 만들었든 무슨 상관인가? 이 원칙은 광고주가 만든 콘텐트에도 적용됐다. ‘네이티브 광고’ 또한 과감히 도입했다. 루이스의 끊임없는 요구로 그의 밑에서 일하는 팀은 독자를 지원하고 온라인 경험을 개선할 새로운 기술과 상품을 끊임없이 개발했다. 어려움이 닥치면 그 속에서 새로운 기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광고 시장을 확장한 구글과 페이스북, 모바일 기기가 좋은 예다. 변화는 끊임없이 닥치지만, 드보르킨이 이끄는 개발팀 덕분에 포브스는 항상 변화의 선봉에 서 있다. 2010년 마이크 펄리스(Mike Perlis)가 CEO로 취임한 후, 포브스는 흥미로운 변화의 시점에 포브스 미디어로 성공적 진화를 마쳤다. 외부에서 영입된 마이크는 평생을 출판 및 스타트업 쪽에서 일한 만큼 경험이 아주 풍부하다.
3년 전, T.C. 얌(T.C. Yam)이 포브스 과반수 지분을 매입하며 대주주가 됐다. 이후 포브스는 디지털 사업 범위를 다양하게 확대하며 새로운 영역에 진출하고 있으며, 사설란은 어느 때보다 탄탄한 기반을 자랑하고 있다.
앞으로 100년 후는 어떻게 될까? 2117년 사람들은 지금보다 끝없이 부유하고,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생활의 질이 높아진 세상을 살아갈 거다. 포브스 또한 설립자의 정신에 충실하며 또 다른 100주년을 축하하고 있을 것이다.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포브스 코리아 온라인 서비스는 포브스 본사와의 저작권 계약상 해외 기사의 전문보기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STEVE FORBES 포브스 편집장시민>
세계대전이 한창인 때 잡지를 창간하다니, 어리석은 결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재단사의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B.C. 포브스는 비즈니스 전문기자가 되고, 나중에는 스스로 기업가가 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꿈을 위해 남아공으로 간 그는 신규 창간한 랜드 데일리 메일(Rand Daily Mail)의 에드가 월러스(Edgar Wallace) 편집장 밑에서 일하며 출판업계에 발을 디뎠다. 나중에 영국과 미국에서 소설가로 유명해진 에드가 월러스는 술에 취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면 B.C.가 편집장을 대신해 사설을 썼다. 그러나 남아공 시장 자체가 너무 작다고 느낀 B.C.는 1904년 더 큰 물에서 놀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뉴욕에 도착해서는 한동안 일자리를 잡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수 주 동안 무급으로 일하겠다고 편집장에게 제안을 했다. 약속한 기간이 끝나고 월급을 요구했을 때 그 요청을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업가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B.C.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취직에 성공했고, 의욕이 넘쳤던 그는 필명을 내세워 다른 잡지에서도 비즈니스 전문기자로 일자리를 얻었다. 편집장 두 명이 자기 밑에 있는 기자가 더 낫다고 언쟁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두 직원이 전부 B.C.였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B.C.는 금융 전문기자로 성장하며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기사뿐 아니라 기고문도 쓰고 책도 저술했다. 그러나 그는 기업가를 취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기업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혈통을 가지고 있어서 수집한 자료를 사용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도 있었다. (요즘 시대를 살았다면 분명 블로거로 활발히 활동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포브스는 자신이 직접 잡지를 출간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잡지의 원래 이름은 두어즈 앤 두잉즈(Doers and Doings)였지만, 결국 자신의 성(姓)을 이름으로 내세웠다. 당시에는 흔한 관행이었다.
B.C.는 ‘기업가적 자본주의’로 자리 잡은 개념을 굳게 신봉했다. 그는 기업 경영자의 성취를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기업가의 행보가 과감할수록 좋았다. 그렇다고 기업가를 옹호한 건 아니었다. 직원들을 학대하거나 경영에 무능력한 기업가는 가차 없이 꾸짖었다. 포브스 창간호에서 B.C는 ‘비즈니스는 엄청난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선사하기 위해 시작됐다’고 적었다. 인간은 결국 비인간적 힘의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을 거부한 것이다.
1920년대는 포브스 잡지의 전성기였다. 오손 웰즈의 고전 영화 <시민 케인(citizen kane)> 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디어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는 1928년 포브스에 인수를 제안했다. 제시 금액은 요즘 기준으로 수천만 달러에 달했다. B.C.는 고고하게 제안을 거절했지만 얼마 안 가 이 결정이 치명적 실수가 아니었을까 큰 후회를 했다.
대공황이 닥친 것이다. 포브스는 큰 타격을 받았다. 1932년까지 광고는 80% 이상 감소했고, 회사는 거의 파산해서 이름만 간신히 유지하는 상태였다. 다행히 허스트 신문에 기고를 계속했던 그는 프리랜서로 번 돈을 급한 데 쓰며 ‘스코틀랜드 주(Scotch week)’를 도입했다. 4번째 주에는 직원에게 주급을 주지 않는 조치였는데, 이는 월급 25% 삭감을 의미했다. 그래도 워낙 힘든 때라 직원들은 그저 직장에 다니고 있음에 안심했다. B.C. 자신은 수 년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월급 수표를 한 번도 현금으로 바꾸지 않았다.
대공황을 간신히 살아남은 포브스는 비즈니스위크와 포춘에 밀려 1930년대를 근근이 버텼다. 1945년 육군 기관총 사수로 복무하던 B.C.의 아들 말콤(MSF)이 중상을 입고 제대한 후 포브스에 입사했다. 다른 아들 브루스는 이미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당시 포브스 콘텐트는 대부분 프리랜서 기자의 글로 구성되어 있었다. MSF는 사설 기사의 수준을 대폭 개선하기 위해 편집진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 주 시황을 분석하고 투자 주식을 추천하는 주간지 더 포브스 인베스터(The Forbes Investor)를 창간했다. 연간 구독료는 무려 35달러였다. (포브스 구독료가 4달러 이하였던 시절이다) 출간비용이 포브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는데 구독료는 포브스의 9배에 달했으니 말도 안 되게 비싼 수준이었다. 그러나 더 포브스 인베스터는 출간 즉시 큰 성공을 거두었고, 포브스는 회사 재정비에 필요한 자본을 확충할 수 있었다.
1947년 창간 30주년을 맞이한 포브스는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창간 기념 만찬을 열었던 초기 전통을 되살렸다. 만찬 연설자는 토마스 듀이(Thomas Dewey) 뉴욕 주지사였다.
이후 논설 기사의 수준이 더 올라갔고, 다양한 혁신이 도입되며 구독수 및 광고가 증가했다. 1949년 1월부터 산업·기업별 연간 성적표를 발표한 포브스는 이때부터 통계 노하우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1월은 잡지 광고가 가장 저조한 달이었지만, 포브스 산업·기업별 성적표가 공개되면서 1월은 광고 수익이 가장 좋은 달로 바뀌었다. 1950년대가 시작되자 포브스는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뮤추얼펀드 산업에 대해 심층 보도를 시작했다. 상승·하락기별 뮤추얼펀드 장기 실적표를 만들어 매년 공개하는 기사였다. 경기회복 덕분에 대공황 당시 쓰디쓴 기억에서 빠져나온 수백만 명이 금융 투자에 나선 걸 포착한 결정이었다.
제임스 마이클스(James Michaels)가 편집장으로 부임한 60년대부터 포브스는 본격적으로 뛰어난 기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1961~99년) 포브스와 함께 한 마이클스 편집장은 까칠한 성격에 절대 기가 죽지 않는 기개를 가진 유능한 편집장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포브스 기사의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이때부터 포브스는 비평가들이 연극을 비평하는 방식으로 혹독하게 기업을 평가하는 직설적 기사로 명성을 쌓았다. 다른 어떤 잡지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기업 재무제표를 심층 분석하고 파헤쳤기 때문에 포브스 기사에는 진실성과 울림이 있었다. 연금보험사들이 터무니 없이 높은 수수료를 가져 가면서도 가입자에게 제대로 고지하지 않았음을 폭로한 1998년의 표지 기사가 좋은 예다. 말도 안 되게 높은 수수료 때문에 미 국민 다수가 가입했던 연금보험의 투자 수익이 형편없음을 보도한 기사였다.
1982년 포브스는 미국 400대 부자 순위를 담은 특별판을 발간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MSF가 제안한 기획이었다. (숫자 ‘400’은 뉴욕 사교계 여왕 캐롤라인 애스터(Caroline Astor)가 1892년 사교계 인사 400명을 초대해 열었던 무도회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사교계 규칙을 결정했던 워드 맥칼리스터(Ward McAllister)는 ‘더 포 헌드레드’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 제안이 나왔을 때 포브스 내부에서는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 순위 산정에 필요한 정보 상당 부분이 비공개인데 대체 그 400명을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후보를 추려낸다 해도 그들의 재무 정보는 어떻게 찾나? 부자 순위를 발표했다가 그 사람들이 납치나 강도 등 강력범죄 대상이 되거나 귀찮은 기부 부탁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기사 가능성에 대해 ‘조사’를 실시한 편집부는 MSF에게 그의 생각이 말도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알겠네.” 포브스 대표였던 MSF가 답했다. “그럼 자네들에게 맡기지 않겠어. 내가 직접 한다고. 외부에서 사람을 고용하고 편집진 일부를 차출해서 팀을 꾸리지.” 결국 편집부는 항복했다. ‘부자 순위’로 명명된 팀에 합류한 편집자와 기자들은 입수가 불가능해 보였던 정보를 입수하는 방법을 능숙하게 찾아냈다. 덕분에 포브스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검색 범위를 넓히고 자료를 입수하는 데이터마이닝 기법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부자 순위를 담은 첫 특별판은 편집 및 재정 면에서 대대적 성공을 거두었고, 부자 순위 콘텐트는 포브스의 든든한 기둥이 됐다. 성공의 핵심은 신뢰성과 혁신이다.
포브스는 ‘브랜딩’을 통해 성공을 지속시켰다. 아름답고 매끄러운 디자인에 집착한 스티브 잡스가 확실히 보여줬듯이, 이전보다 나은 상품을 선보이는 걸로는 충분치 않은 세상이 됐다. 1964년 48세에 암으로 사망한 형 브루스의 뒤를 이어 대표로 취임한 MSF는 포브스라는 이름이 기업가적 업적과 성공, 훌륭한 인생을 연상시키도록 만드는 행보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전통적 CEO가 잘 하지 않는 행동도 했다. 파베르제의 달걀과 미 대통령 서신을 비롯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원고, 기념품, 장난감 보트, 장난감 병정 등을 수집해 대중이 볼 수 있도록 박물관에 전시한 것이다. 박물관은 5번가에 위치한 포브스 사옥에 있다.1967년 포브스는 1929년 대공황 직전 기록했던 광고 수주 고점을 다시 돌파했다. MSF는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뉴저지 저택에서 화려한 파티를 열었다.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미국 최고 기업 지도자 500여 명과 그들의 배우자가 파티에 참석했다. 기조연설은 휴버트 험프리(Hubert Humphrey) 부통령이 맡았다. 포브스 70주년 파티도 MSF 뉴저지 저택에서 열렸다. 70명의 백파이프 연주자들이 안개 자욱한 숲에서 나와 언덕을 내려오던 장관을, 손님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헬리콥터 수십 대가 번갈아 날아와 거물급 기업인을 뉴저지 저택에 내려줬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헬리콥터를 타고 온 사람은 당연히 도널드 트럼프였다.
축하 행사가 항상 환영을 받은 건 아니다. 1989년 8월 MSF는 수 년 전 자신의 70세 생일에 매입한 모로코 탕헤르의 팔레 망두(Palais Mendoub·지금은 이름에 걸맞게 모로코 왕의 재산이 됐다)에서 창간 기념파티를 열었다. MSF가 파티 비용을 다 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일부 미디어는 비난을 쏟아냈다. 다른 사람이 돈을 쓰는 방식에 대해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은 정말 많았다. 외부인들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지나친 호사와 돈 낭비로만 보였는지 모르지만, 실제 파티가 가져온 효과는 대단했다. 파티는 포브스가 수십 년간 글로벌 잡지로서 강력한 이미지를 유지하도록 도왔다. 많은 기업가와 연예인은 포브스 잡지에 얼굴이 실려야 비로소 ‘성공했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브랜딩’이 아닌가!
규모만 보면 포브스 인코퍼레이션(Forbes Inc.)은 타임이나 다우존스, 맥그로힐 등 거대 미디어 그룹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더 유명하고 고급스럽고 화려한 건 포브스였다. 재계 영향력 면에서도 경쟁잡지 포춘과 비즈니스위크를 앞질렀다.
미디어 산업은 증기 발전 윤전인쇄기 발명으로 신문 및 잡지 대량 판매가 가능해진 184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근본적으로 변한 게 없었다. 포브스가 세계대전 이후 눈부신 재기와 발전을 이룬 것도 그 덕분이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는 달랐다. 출판 미디어 산업의 암흑이 시작됐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출판업계는 인쇄 출판물에 넣었던 기사를 그대로 온라인에 올리는 게 온라인 출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부분은 자체 웹사이트 오픈을 망설였다. 힘들게 제작한 콘텐트를 왜 무료로 공개해야 하는가? 당시만 해도 온라인 광고는 시장조차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포브스는 온라인 콘텐트와 출판 잡지를 완전히 다른 별개의 상품으로 바라보며 포브스닷컴(Forbes.com)을 시작했다. 온라인 부서를 다른 건물에 두고 직원을 따로 뽑았으며, 보고선도 별개로 구축했다. 웹사이트에는 잡지 기사를 그대로 올리지 않고 온라인에서만 볼 수 있는 오리지널 콘텐트로 채웠다. 다른 레거시 출판업체는 좀처럼 하지 않은 시도였다. 처음 몇 년간 엄청난 손실을 기록하던 포브스닷컴은 이후 수익을 내기 시작했고, 경영진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업부를 통합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는 격렬히 충돌했고, 이런 양상은 편집부에서 특히 심했다. 오프라인 기자들은 온라인 기자들이 얕고 피상적이며 급 떨어지는 기사만 내놓는다며 이들의 무식과 허세를 욕했다. 반면, 온라인 기자와 편집진은 오프라인쪽 사람들이 게으르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속물이라고 생각했다.
2010년 루이스 드보르킨(Lewis D’Vorkin)이 최고상품책임자로 합류하면서 대대적 변화가 일어났다. 루이스는 온라인 출판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과감하고 독창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새로 개발한 기고 모델은 현재 관련 분야에서 전문가 1700명을 확보하고 있다. 루이스는 인쇄 출판업계에서 상당한 커리어를 쌓았지만, 독자를 위한 정보 발굴 및 전달에 있어서 레거시 미디어가 독점권을 가져야 한다는 오만은 부리지 않았다. 콘텐트만 좋다면 누가 만들었든 무슨 상관인가? 이 원칙은 광고주가 만든 콘텐트에도 적용됐다. ‘네이티브 광고’ 또한 과감히 도입했다. 루이스의 끊임없는 요구로 그의 밑에서 일하는 팀은 독자를 지원하고 온라인 경험을 개선할 새로운 기술과 상품을 끊임없이 개발했다. 어려움이 닥치면 그 속에서 새로운 기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광고 시장을 확장한 구글과 페이스북, 모바일 기기가 좋은 예다. 변화는 끊임없이 닥치지만, 드보르킨이 이끄는 개발팀 덕분에 포브스는 항상 변화의 선봉에 서 있다. 2010년 마이크 펄리스(Mike Perlis)가 CEO로 취임한 후, 포브스는 흥미로운 변화의 시점에 포브스 미디어로 성공적 진화를 마쳤다. 외부에서 영입된 마이크는 평생을 출판 및 스타트업 쪽에서 일한 만큼 경험이 아주 풍부하다.
3년 전, T.C. 얌(T.C. Yam)이 포브스 과반수 지분을 매입하며 대주주가 됐다. 이후 포브스는 디지털 사업 범위를 다양하게 확대하며 새로운 영역에 진출하고 있으며, 사설란은 어느 때보다 탄탄한 기반을 자랑하고 있다.
앞으로 100년 후는 어떻게 될까? 2117년 사람들은 지금보다 끝없이 부유하고,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생활의 질이 높아진 세상을 살아갈 거다. 포브스 또한 설립자의 정신에 충실하며 또 다른 100주년을 축하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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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STEVE FORBES 포브스 편집장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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