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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무역영웅들(2)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우리 시대의 무역영웅들(2)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4차 산업혁명이 다가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수요는 증가했다. 빠르게 첨단을 걷는 시대에 비해 소모품인 기계 장비에 대한 기업의 재정적 부담도 함께 늘었다. 기업들 사이에서 중고장비를 사고파는 시장이 커지고 있는 이유다. 중고장비 매매업체 서플러스글로벌은 이 시장에선 이미 1인자다. 10월 12일 오후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서플러스글로벌 본사에서 김정웅(51) 대표를 만났다.
지난 17년간 2만 여 대에 이르는 중고장비를 세계 40개국에 유통했다. 5년간 전 세계 중고장비 거래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유지했다.
경기 오산에 위치한 큰 창고엔 기계 장비들이 가득했다. 구비돼 있는 전동 킥보드를 타고 전시장을 돌아봤다. 디스플레이, 태양광 각 분야별로 반도체 기계가 수백여 대가 전시돼 있다. 쓰지 않은 듯 신제품에 가까운 상태부터 시간이 좀 흐른 듯한 제품들도 보였다. 서플러스글로벌은 총 면적 7000평의 항온·항습 전시장과 200평의 클린룸으로 구성된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중고장비 전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김정웅 대표는 “하루 평균 20여 명의 바이어가 전시장에 방문하고 있고, 1000여 대의 장비를 직접 점검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며 “동탄에 현재 전시장의 세 배 되는 규모인 2만 평부지로 확장 공사 중”이라고 말했다.

2000년 설립한 서플러스글로벌은 반도체 중고장비를 매입해 보관했다가 되파는 중고장비 전문 유통업체다. 전자 산업에 필요한 전 품목의 중고장비를 취급한다. 불황일 때 싸게 사서 호황일 때 비싸게 파는 게 주요 전략이다.

장비 사양과 고객의 니즈에 따라 가격을 책정하는 방식은 서플러스글로벌의 핵심 경쟁력 중 하나다. 중고 장비 ‘밸류에이션(가치평가) 능력’을 자부하는 김 대표는 “의사 결정, 판매 경험 등을 분석한 수준 높은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8번의 이직에서 얻은 교훈
서플러스글로벌은 폭넓은 네트워크의 장비 수급을 자랑한다. 한국에 본사를 두고 미국(산호세·피닉스), 중국(상하이), 대만(신쥬)에 해외 법인을 둔 회사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글로벌파운드리·TSMC 등 글로벌 톱 반도체 기업들로부터 중고장비를 소싱한다. 지난 17년간 2만여 대에 이르는 중고장비를 세계 40개국에 유통했다. 5년간 전 세계 중고장비 거래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유지했다.

과거 미국이나 일본의 금융회사들이 리스 형태로 중고장비 유통을 점유해오다가 국내 기업인 서플러스글로벌이 강자의 자리를 꿰찬 셈이다. 김정웅 대표는 “그저 타이밍이 좋았을 뿐”이라며 웃는다.

10년간 8번. 첫 직장인 코오롱상사를 그만두고 2000년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하기까지 외국계·대기업 중소기업·공무원까지 김 대표가 이직한 숫자다. 길게는 2년, 짧게는 3개월을 다닌 곳도 있었다. 김 대표는 “평소 수직적인 조직에 순응하지 못해 이직이 잦았다”며 “누더기가 되는 경력에 낙담도 많이 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인지 서플러스글로벌엔 사장실이 없다. 직원들의 업무 공간은 사무실이 아닌 ‘의사 결정 공장(Decision Making Factory)’으로 부른다. 직함도 빼고 서로 영문 이름을 부른다. 카페처럼 아늑하게 꾸민 회의 공간들은 ‘싸움 직전까지 가는’ 적극적인 토론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만들었다. 위계적인 문화가 기업의 성장을 방해한다고 믿는 철학 때문이다. 조직을 여러 차례 옮겼음에도 김 대표의 화려한(?) 커리어는 모두 무역과 연관돼 있다. 이 업과의 인연은 사실 매우 어린 시절부터이기도 하다.

“기브 미 초콜릿(Give me Chocolate).” 기지촌에서 태어난 김 대표가 처음으로 배운 영어였다. 6·25전쟁 이후 미군을 상대로 장사하던 경기 파주의 기지촌에서 태어난 김 대표는 당시 경험이 자연스럽게 ‘무역맨’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첫 아르바이트가 판돌이, 즉 디스크 자키였고, 두 번째 아르바이트가 ‘양색시’들의 영어편지 대필이었다. 김 대표는 “이런 경험들이 외국인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부모의 교육열로 연세대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미국과 유럽 등을 돌아다니는 무역맨을 꿈꾸던 그는 1990년 코오롱상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위계적인 조직문화와 서류 더미에 파묻힌 일상은 꿈꾸던 일과는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우편업무가 텔렉스(telex)에서 팩스(FAX)로 교체되면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역상사의 브로커리지(중개업)의 부가가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되고 있었어요.”

‘인터넷과 무역을 결합한 새로운 일을 만들어보자’ 1995년은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www)이 개방되며 인터넷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해였다. 김 대표는 틈만 나면 해외 사이트를 뒤져서 읽고, 한국에 나오지 않은 해외 서적들까지 구매해 섭렵했다. 1년에 1000권 이상 도서를 구매하는 습관은 지금도 사무실 벽면을 빼곡히 채워가고 있다.
 포기를 모르는 인내
김 대표는 “장비와 재료 관련 사업은 상당히 오랜 기간 기술이 축적이 되어야 세계적인 반열에 오를 수 있는데 한국에선 10년 이상의 기술 로드맵을 가지고 집요하게 목표를 추구해나가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고 말한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 열풍이 불자 김 대표는 일명 업계 스타로 부상했다. 수많은 기업강연과 신문칼럼으로 전자상거래 시장 성장을 예견했다. 인터넷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그의 몸값은 치솟았다.

2000년 3월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했다. 투자금 23억원을 조달했다. 1994년부터 준비해온 인터넷 기반의 온라인 마켓리서치(시장조사)에서 B2B 전자상거래로 사업방향을 전환한 것도 이때다. 그는 “당시 네이버·다음·옥션·잡코리아 등 인터넷 비즈니스 업체들은 주로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인 B2C 모델을 영위했다”며 “난 시장 규모도 훨씬 큰 기업간 전자상거래(B2B)를 사업 모델로 삼았다”고 말했다.

분야도 다양했다. 청바지부터 실과 원단, 공작 기계, 건설 기계, 버스, 돼지고기까지 닥치는 대로 사고 내다 팔았다. 김 대표는 “2000년 구제역이 터져 한국 돼지고기 재고가 쌓였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마장동 우시장으로 달려가 고기를 사서 러시아에 되팔았다”며 “한 번에 고기 200~300t을 사 가니 한때 ‘마장동 큰 손’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때만해도 ‘중고시장의 이베이’가 돼서 3년 내 1조원 가치 회사로 만들겠다고 큰소리쳤다.

결과는 처참했다. 불특정 다수 기업을 상대로 인터넷 사이트에서 거래하는 건 쉽지 않았다. 신뢰를 지키는 일은 몇 배나 힘들었다. 예컨대 베어링 몇 개가 제때 안 도착하면 공장은 멈출 수도 있는 것이었다. 40명 직원의 첫해 매출은 고작 2억8000만원에 그쳤다. 그마저도 억지로 오프라인에서 만든 거래가 대부분이었다. 설립한지 2년 만에 하나 둘씩 떠나던 직원은 6명으로 줄었다.

2002년 사업이 문 닫을 지경까지 이르자 대책이 필요했다. 김 대표는 “그때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의 ‘한 놈만 패라’라는 대사가 눈에 들어왔다”며 “선택과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고 웃었다. 진입 장벽이 낮고, 초기 투자 비용이 적은 네트워크장비·SMT장비·계측기부터 취급 아이템을 서서히 확장해갔다. 전화접속 유휴 장비를 전 세계에 팔며 회사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서플러스글로벌은 국내외 경쟁사와 비교했을 때 글로벌 마케팅에 특화돼 있었다. 개인이 하기에는 덩치가 큰 수억원대 이상의 고가 장비를 수출입하는데 집중했다.

2007년 매출 300억원을 달성할 즈음,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며 회사는 다시 휘청거렸다. 2009년 1분기 100억원까지 오르던 분기 매출은 5억원까지 떨어졌다. 95%가 몇 개월 만에 사라진 것이다. 금융기관의 차입금 상환 압력이 거세졌고 악성 재고에 시달렸다. 김 대표는 “처음으로 자살충동까지 느꼈었다”고 떠올린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회사가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묵묵히 일하고 기다렸다. “남보다 참을성은 좋다”는 김 대표의 인내는 적중했다. 2010년 경제가 회복되며 반도체 업계 환경도 급격히 좋아졌다. 김 대표는 “우리는 그때 몸을 사리던 다른 업체들과 달리 공격적인 투자를 강행했다”며 “2010년 매출액이 500억원을 기록했다”고 강조했다.
 아들을 위한 의미 있는 공헌
사실 그의 기다림엔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뒷받침돼 있었다. 단기·장기 로드맵이 마련돼 있으면 실행은 이후의 문제라고 설명하는 김 대표는 “장비와 재료 관련 사업은 상당히 오랜 기간 기술이 축적되어야 세계적인 반열에 오를 수 있는데 한국에선 10년 이상의 기술 로드맵을 가지고 집요하게 목표를 추구해나가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고 말한다. 이후 10년간 회사는 23% 이상의 연평균 성장률을 기록했다. 올해 1월엔 코스닥에 상장했다. 지난해엔 매출액이 1000억원을 넘어섰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도 손을 놓지 않는 부분은 사회공헌 분야다. 2012년 ‘함께웃는재단‘ 설립은 그의 오랜 과제와도 같았다. 스물한 살 청년이 된 첫째 아들이 발달장애를 앓은 이후부터 구상해왔다. 김정웅 대표는 “발달장애인의 가족은 전쟁터 군인 수준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산다”며 “발달장애인에게 직장을 만들어준다는 것은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복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서플러스글로벌은 한 번 더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반도체 장비 유통사업에서 제조분야로 확장할 예정이다. 장비 제조, 부품 수리·개발, 서비스까지 원스톱(one-stop)으로 운영하는 걸 계획 중이다. 올해 중고장비 수리 전문회사 이큐베스텍을 인수합병한 이유도 사업 다각화와 신규 사업 진출을 위해서다.

중국 호재도 내다보고 있다. 중국 정부의 반도체산업 육성 정책으로 신규 장비뿐만 아니라 중고장비 수요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웅 대표는 “아직 기술력이 부족한 중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중고장비 수요가 크게 늘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플러스 글로벌의 중국 시장 매출은 2013년 63억원에서 지난해 231억원으로 급성장했다. 사업의 정점을 찍었다고 보기엔 아직 업계의 시장은 넓다. 김 대표가 주 80시간을 일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즐거운 이유다.

-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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