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크리스마스 불빛으로 장식된 빈 번화가에서 쇼팽의 음악을…
[정태남의 TRAVEL & CULTURE] 크리스마스 불빛으로 장식된 빈 번화가에서 쇼팽의 음악을…
오스트리아 빈(Wien)은 이탈리아식 표기 비엔나(Vienna)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도시명이 주는 어감처럼 빈은 뭔가 달콤하고 세련되고 귀족적인 기품을 지닌 우아한 미인과 같은 인상을 주는 도시이다. 특히 크리스마스 불빛이 거리를 장식할 때는 빈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더욱더 돋보인다. 사실 빈은 크리스마스 절기에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가장 가 보고 싶어 하는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화려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이 곳곳에 배어 있는 빈 시가지의 심장은 고딕식의 높은 첨탑이 있는 슈테판 대성당이다. 대성당 앞 광장은 빈의 최고급 쇼핑구역 ‘황금의 U’(Goldenes U)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황금의 U’라고 불리는 것은 3개의 번화가, 즉 캐른트너 슈트라세, 그라벤, 콜마르크트가 마치 U자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특히 크리스마스를 맞는 12월이 되면 쇼핑인파로 넘쳐나며, 새해를 맞기 직전인 12월 31일 저녁에는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서로 엉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과 같은 왈츠 음악에 맞추어 흥겨운 춤판도 벌인다.
황금의 U에서 콜마르크트가 끝나는 곳에는 고딕 양식의 미하엘 성당의 첨탑과 바로크 양식의 우람한 황궁 입구 미하엘러토어(Michaelertor)와 그 위에 솟은 화려한 푸른색 돔이 시선을 끈다. 이 웅대한 황궁은 거대한 제국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산이었다. 황궁 입구와 직선으로 연결된 콜마르크트는 귀족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거리이지만 옛날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콜마르크트’(Kohlmarkt)는 문자 그대로 ‘석탄 시장’이란 뜻이니 말이다. 그러다가 황궁이 증축되면서 귀족들의 저택이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그 후 길의 분위기는 완전히 180도로 달라져 지금은 빈 최고의 명품거리가 되었다.
이 길에서는 세계적인 명품브랜드 매장을 비롯 보석매장도 많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황실에서 지정한 보석공들이 이곳에서 작업하고 살던 전통을 이어온 것처럼 보인다. 지금 빈에서 최고의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는 케이크 및 과자 전문점이자 카페인 데멜(Demel)이 지금도 성업 중인데, 원래는 황실에 케이크를 납품하던 곳이었다.
데멜 건너편 콜마르크트 9번지에는 1900년대 건물이 세워져 있고 1층 매장의 기둥에는 쇼팽 기념 명판이 붙어 있다. 명판에는, ‘쇼팽(1810~1849)이 1830년 11월부터 1831년 7월까지 4층에서 살았으며, 이 집은 1900년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판에 새겨진 쇼팽의 옆모습을 보니 그의 피아노곡 ‘혁명’이 폭풍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듯하다. 이 격렬한 곡은 그의 작품 [12개의 연습곡 Op.10] 중 12번째 곡이다. 빈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클래식 음악의 성지이다. 빈은 하이든·글룩·모짜르트·베토벤·슈베르트·브람스·말러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위대한 음악가를 포용했던 도시이다. 하지만 모든 음악가들이 이곳에서 제대로 대접받은 것은 아니다. 특히 쇼팽의 경우, 빈은 매우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왜 그랬을까?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정직하고 온순하고 차분하고 평화스럽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했지만 나치장교로 복무하면서 유대인, 유고슬라비아인, 그리스 주둔 이탈리아군 학살 명령 혐의가 나중에 밝혀져 여러 나라에서 맹렬한 비난을 받아오던 발트하임을 ‘보란 듯이’ 대통령으로 선출하기도 했으며, 또 유럽연합의 여러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아오던 극우파 정당에 ‘보란 듯이’ 표를 던지기도 했다. 이런 기질이 장점으로 작용한 경우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가 분단의 위기에 처하자 국민들은 좌·우익 간의 정쟁(政爭)을 접고 일치단결하여 기지로 그 위기를 모면했으니 말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나른 나라의 간섭이 있을 때나 국익과 관련된 대외적인 일이 있을 때는 철저하게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청년 쇼팽이 청운의 꿈을 안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향한 것은 1830년 초겨울. 그러니까 음악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던 베토벤이 죽은 지 3년, 슈베르트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당시 빈 사회는 향락의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11월 22일에 빈에 도착한 후 쇼팽은 콜마르크트에 있던 어느 백작 부인의 호화스러운 아파트에 방 몇 개를 세 얻어 살면서 희망찬 나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매일 저녁 여러 곳에 초대받기도 하고, 유명한 음악가도 알게 되었으며, 심지어 총리 메테르니히와 베토벤의 주치의였던 유명한 말팟티와도 친분을 갖게 되었는데 이탈리아계인 말팟티의 부인은 폴란드 사람이었다. 그런데 쇼팽의 달콤한 꿈은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 그해 11월 30일 폴란드에서 반러시아 민중혁명이 일어나자 모든 상황이 완전히 180도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폴란드 분할에 참여했던 오스트리아는 이 ‘폭동’을 방관할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폴란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신의 실수’라고까지 공공연히 말하기 시작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빈 사람들이 폴란드에서 온 젊은 음악가를 환호할 리 없었다. 쇼팽은 혁명, 즉 반러시아 저항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총이 아니라 재능으로 조국에 충성하라면서 귀국을 만류했다.
절망 속에서 쇼팽은 경제적 압박과 가족에 대한 염려와 외로움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몇 달 후 다행히 어느 귀족 부인의 주선으로 관중 앞에 설 기회를 가진 쇼팽은 19세 때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e단조 Op.11]을 연주했다. 그러나 연주회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다만 신문에서는 그의 연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사가 몇 줄 보였다. 그 후 캐른트너 극장의 극장장은 쇼팽에게 다른 연주회를 제의했다. 하지만 문제는 무보수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또 쇼팽이 빈에 처음 왔을 때 그에게 눈독을 들였던 출판업자 하슬링어는 쇼팽의 작품에 대해 피상적인 관심만 보일 뿐이었다. 그동안 빈의 유행은 서서히 바뀌어 왈츠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폴란드에서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날이 갈수록 더욱 천박하게 여겨졌다. 쇼팽의 오스트리아 친구들은 하나 둘 멀리 떨어져 갔고, 한때 그를 열렬하게 대하던 피아니스트 체르니도 예의는 지켰지만 태도는 몹시 차가워져 있었다. 게다가 폴란드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망하던 프랑스와 영국의 지원이 말로만 그치자 폴란드 혁명은 러시아 군대의 말발굽 아래 무참히 짓밟혀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쇼팽은 하루속히 빈을 떠나 ‘열린 도시’ 파리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경찰의 방해로 심한 곤혹을 치러야 했다.
쇼팽은 빈에서 여덟 달을 보내면서 절망과 고뇌 속에서도 [12개의 연습곡 Op.10] 일부를 완성했고 [스케르쪼 1번 b 단조 Op.20] 작곡에 착수했다. 스케르쪼(scherzo)는 이탈리아어로 ‘농담’ ‘유머’ 등을 뜻하는데 음악에서는 해학적이며 빠르고 경쾌한 기악곡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 곡에는 이런 것과는 격렬한 감성이 녹아들어 있다. 즉,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고국의 상황과 빈에서 겪은 고통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리라. 한편 [연습곡 Op.10] 중 12번 ‘혁명’은 쇼팽이 빈을 떠나 파리로 가던 중 반 러시아 봉기가 1831년 9월에 러시아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작곡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이런 쇼팽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명품거리 콜마르크트를 걸을 때면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멜랑콜리가 느껴진다. 이 거리가 화려한 크리스마스 불빛으로 밝혀져 있어도 말이다.
※ 정태남은…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내고 있는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및 옛 건축 복원 전문가들과 오랜 기간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오페라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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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거리 콜마르크트
황금의 U에서 콜마르크트가 끝나는 곳에는 고딕 양식의 미하엘 성당의 첨탑과 바로크 양식의 우람한 황궁 입구 미하엘러토어(Michaelertor)와 그 위에 솟은 화려한 푸른색 돔이 시선을 끈다. 이 웅대한 황궁은 거대한 제국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산이었다. 황궁 입구와 직선으로 연결된 콜마르크트는 귀족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거리이지만 옛날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콜마르크트’(Kohlmarkt)는 문자 그대로 ‘석탄 시장’이란 뜻이니 말이다. 그러다가 황궁이 증축되면서 귀족들의 저택이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그 후 길의 분위기는 완전히 180도로 달라져 지금은 빈 최고의 명품거리가 되었다.
이 길에서는 세계적인 명품브랜드 매장을 비롯 보석매장도 많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황실에서 지정한 보석공들이 이곳에서 작업하고 살던 전통을 이어온 것처럼 보인다. 지금 빈에서 최고의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는 케이크 및 과자 전문점이자 카페인 데멜(Demel)이 지금도 성업 중인데, 원래는 황실에 케이크를 납품하던 곳이었다.
데멜 건너편 콜마르크트 9번지에는 1900년대 건물이 세워져 있고 1층 매장의 기둥에는 쇼팽 기념 명판이 붙어 있다. 명판에는, ‘쇼팽(1810~1849)이 1830년 11월부터 1831년 7월까지 4층에서 살았으며, 이 집은 1900년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판에 새겨진 쇼팽의 옆모습을 보니 그의 피아노곡 ‘혁명’이 폭풍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듯하다. 이 격렬한 곡은 그의 작품 [12개의 연습곡 Op.10] 중 12번째 곡이다.
정치적 격동기 속 젊은 쇼팽의 고뇌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정직하고 온순하고 차분하고 평화스럽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했지만 나치장교로 복무하면서 유대인, 유고슬라비아인, 그리스 주둔 이탈리아군 학살 명령 혐의가 나중에 밝혀져 여러 나라에서 맹렬한 비난을 받아오던 발트하임을 ‘보란 듯이’ 대통령으로 선출하기도 했으며, 또 유럽연합의 여러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아오던 극우파 정당에 ‘보란 듯이’ 표를 던지기도 했다. 이런 기질이 장점으로 작용한 경우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가 분단의 위기에 처하자 국민들은 좌·우익 간의 정쟁(政爭)을 접고 일치단결하여 기지로 그 위기를 모면했으니 말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나른 나라의 간섭이 있을 때나 국익과 관련된 대외적인 일이 있을 때는 철저하게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청년 쇼팽이 청운의 꿈을 안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향한 것은 1830년 초겨울. 그러니까 음악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던 베토벤이 죽은 지 3년, 슈베르트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당시 빈 사회는 향락의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11월 22일에 빈에 도착한 후 쇼팽은 콜마르크트에 있던 어느 백작 부인의 호화스러운 아파트에 방 몇 개를 세 얻어 살면서 희망찬 나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매일 저녁 여러 곳에 초대받기도 하고, 유명한 음악가도 알게 되었으며, 심지어 총리 메테르니히와 베토벤의 주치의였던 유명한 말팟티와도 친분을 갖게 되었는데 이탈리아계인 말팟티의 부인은 폴란드 사람이었다. 그런데 쇼팽의 달콤한 꿈은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 그해 11월 30일 폴란드에서 반러시아 민중혁명이 일어나자 모든 상황이 완전히 180도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폴란드 분할에 참여했던 오스트리아는 이 ‘폭동’을 방관할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폴란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신의 실수’라고까지 공공연히 말하기 시작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빈 사람들이 폴란드에서 온 젊은 음악가를 환호할 리 없었다. 쇼팽은 혁명, 즉 반러시아 저항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총이 아니라 재능으로 조국에 충성하라면서 귀국을 만류했다.
절망 속에서 쇼팽은 경제적 압박과 가족에 대한 염려와 외로움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몇 달 후 다행히 어느 귀족 부인의 주선으로 관중 앞에 설 기회를 가진 쇼팽은 19세 때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e단조 Op.11]을 연주했다. 그러나 연주회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다만 신문에서는 그의 연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사가 몇 줄 보였다. 그 후 캐른트너 극장의 극장장은 쇼팽에게 다른 연주회를 제의했다. 하지만 문제는 무보수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또 쇼팽이 빈에 처음 왔을 때 그에게 눈독을 들였던 출판업자 하슬링어는 쇼팽의 작품에 대해 피상적인 관심만 보일 뿐이었다.
절망과 고뇌 속에서 탄생한 명곡
쇼팽은 빈에서 여덟 달을 보내면서 절망과 고뇌 속에서도 [12개의 연습곡 Op.10] 일부를 완성했고 [스케르쪼 1번 b 단조 Op.20] 작곡에 착수했다. 스케르쪼(scherzo)는 이탈리아어로 ‘농담’ ‘유머’ 등을 뜻하는데 음악에서는 해학적이며 빠르고 경쾌한 기악곡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 곡에는 이런 것과는 격렬한 감성이 녹아들어 있다. 즉,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고국의 상황과 빈에서 겪은 고통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리라. 한편 [연습곡 Op.10] 중 12번 ‘혁명’은 쇼팽이 빈을 떠나 파리로 가던 중 반 러시아 봉기가 1831년 9월에 러시아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작곡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이런 쇼팽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명품거리 콜마르크트를 걸을 때면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멜랑콜리가 느껴진다. 이 거리가 화려한 크리스마스 불빛으로 밝혀져 있어도 말이다.
※ 정태남은…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내고 있는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및 옛 건축 복원 전문가들과 오랜 기간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오페라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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