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과 에볼라 사태 극복한 엘런 존슨 설리프, 퇴임하면서도 70여 년만에 라이베리아의 첫 민주적 정권이양 이뤄내 2016년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는 설리프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 그녀는 내전 종식의 공로로 201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 사진:AP-NEWSIS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던 엘런 존슨 설리프는 최근 라이베리아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마치면서도 2006년 처음 선출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새로운 선례를 남겼다. 지난 1월 22일 축구스타였던 조지 웨아가 그녀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라이베리아에선 1944년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인 정권이양이 이뤄졌다.
설리프 전 대통령은 헌법이 허용하는 한도인 두 차례의 임기를 마치면서 선거를 실시했다. 지난달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 야당후보인 웨아는 현직 부통령이던 조셉 보아카이 후보를 쉽게 이기고 대통령에 선출됐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집권여당이던 통합당은 보아카이 후보의 당선에 해로운 행위를 함으로써 당헌당규를 위반했다며 설리프를 출당시켰다(그러나 설리프는 그런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아프리카 최초의 민선 여성 대통령이었던 설리프의 유산을 이해하려면 복잡한 현재의 상황을 넘어 그녀의 12년 재임 전체를 돌아봐야 한다. 설리프가 2006년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라이베리아는 17년간 내전에 시달린 상태였다. 집단 잔혹행위, 고삐 풀린 탐욕, 여성 인구의 70%가 조직적으로 시달린 성폭행, 흉악한 폭력을 저지르도록 소년병에게 마약을 먹이는 행위 등이 난무했다. 뉴욕타임스 기자 헬렌 쿠퍼가 저서 ‘여성 대통령 엘런 존슨 설리프의 특이한 여정(Madame President: The Extraordinary Journey of Ellen Johnson Sirleaf)’에서 지적했듯이 라이베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가 됐다. 소말리아보다 더 잔혹하고, 이라크보다 더 치명적인 나라였다.
여러 번 투옥되고 협박에 시달렸던 설리프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귀국해 1997년 대선에 출마했다. 그러나 7년간의 내전을 주도해온 군벌 출신의 지도자 찰스 테일러가 투표조작을 통해 75.3%의 지지로 대통령이 됐다. 그녀는 반역죄 혐의로 다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설리프는 망명 동안 주로 금융부문에서 일했지만 테일러의 하야를 위해 세계은행과 유엔, 서아프리카 지도자들을 규합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2003년 라이베리아의 폭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그해 7월의 한 주 동안 수도 몬로비아의 주민 약 600명이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무참히 학살당했다. 부모들은 학살당한 아이들의 훼손된 시신을 끌고 미국 대사관으로 갔다. 시장에서 상인으로 일하던 여성들이 뭉쳐 군인과 반군에 대항했다. 그들은 가나의 수도 아크라로 가서 라이베리아 내전종식을 위한 평화회담을 벌이는 서아프리카경제협력체 대표단에 새 정부 수립을 압박했다. 결국 테일러는 나이지리아로 도피했고 과도정부가 세워졌다.
설리프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기를 원했고, 대표단의 다수도 그녀를 지지했다. 그러나 특별위원회는 투표를 거부하고 기업인 출신 기우드 브라이언트를 대통령으로 선임했다. 2005년 설리프는 다시 귀국해 대선에 출마했다. 그녀가 승리하리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외부 선거참관인들은 ‘철의 여인’(투옥 생활에서 살아남았다는 뜻)으로 불리는 설리프가 당연히 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테일러를 몰아내는 데 일조한 시장 여성들의 힘이 다시 발휘되면서 예상을 뒤집고 설리프가 당선됐다.
설리프가 승리한 뒤에도 많은 사람은 하버드대학에서 교육 받은 그녀가 글도 잘 모르는 군벌들이 많고 내전에서 전투원으로 싸운 인구가 많은 나라를 통치할 수 있을지 우려했다. 라이베리아는 오랜 내전을 치렀지만 여전히 분할된 국가였고, 제대로 기능하는 정부기관이나 인프라가 없었으며, 부채와 부패에 짓눌렸고, 여성과 어린이는 사회에서 완전히 무시당했다.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려면 정부와 법치의 근간을 다시 세워야 했다. 설리프와 시장 여성들은 여성이 열쇠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의 강력한 연대를 구축해 국가를 바꾸고 화해와 지배구조 확립에 여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과거의 라이베리아는 조직적인 성폭행으로 고문실과 마찬가지였다. 반군과 군인, 평화유지군이 여성을 공격하고도 처벌 받지 않았다. 여성은 치안부문의 개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리프는 최초로 여성을 경찰청장으로 임명했고 유엔은 여경부대를 평화유지 목적으로 라이베리아에 파견했다. 2016년이 되자 라이베리아의 경찰 중 여성이 17%에 이르렀다.
설리프는 부패와 싸우고 국가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많은 여성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경찰청장만이 아니라 경제부와 상공부 장관 등의 주요 각료직에 여성을 임명했다. 설리프는 여성 교육을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했다. 또 여성·평화·안전을 위한 ‘라이베리아 액션플랜’을 시행했고 회복과 재건, 지배구조 확립에 여성의 전면적인 참여를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이런 노력과 설득으로 라이베리아는 국제사회로부터 막대한 부채를 탕감 받고 개발을 위한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그 다음 10년 동안 라이베리아의 국내총생산(GDP)은 연간 7%씩 성장했다.
그러다가 2013년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그녀가 구축했던 국민적 합의가 무너질 위험에 처했다. 설리프 정부가 에볼라 유행 지역 주민의 서로간 접촉을 금하고 망자를 매장하라고 권고했지만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에볼라가 없다고 주장하며 치료센터를 파괴하고 격리 조치에 반항했다. 병원은 환자를 거부했다. 전쟁 수준의 공황이 다시 시작됐다.
설리프가 그토록 어렵게 재건한 라이베리아의 인프라가 흔들렸다. 그녀의 정책은 반발을 샀다. 정치적인 비판자들이 그녀를 공격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라이베리아인 140만 명이 사망할 것으로 예측하면서 절박해진 라이베리아 국민은 결국 설리프 대통령을 지지했다.
설리프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고 영국 BBC 방송을 통해 세계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의 요청은 구체적이었다. 라이베리아가 에볼라를 퇴치하는 데 얼마나 많은 병원과 공중보건 전문가, 군인이 필요한지 밝혔다. 설리프가 2011년 내전 종식의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미국과 중국이 대대적인 지원에 나섰다. 그로써 에볼라가 퇴치됐고 투자자들도 돌아왔다.
물론 설리프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빈곤선 아래서 살아간다. 부패와 족벌주의가 횡행한다. 여성의 정치 참여가 아직 크게 부족하며, 가정폭력 관련 법도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자가 평화롭게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 역사가 없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설리프가 단연 돋보인다.
그녀와 라이베리아 여성은 자신들의 허약한 국가를 변화시켰다. 설리프는 여성과 어린이를 정책의 우선으로 삼은 첫 라이베리아 대통령이었다. 이제 임기를 마치면서 그녀는 다시 한번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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