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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학각색(各學各色)’ | 불발에 그친 6월 개헌 그 후 - 사회학] 헌법의 3가지 사회학적 역설

[‘각학각색(各學各色)’ | 불발에 그친 6월 개헌 그 후 - 사회학] 헌법의 3가지 사회학적 역설

정부와 국회의 협력부터 이뤄야…시민의 열망 담고 역사적 의미 부여할 필요
2000년대 한국 사회의 주목할 만한 현상은 ‘헌법’의 존재감이 매우 커졌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헌법은 언제나 있었으되, 그것이 정치와 시민의 생생한 현실로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16년의 1500만 촛불 시민은 위력을 행사하는 대신 의회를 압박해 ‘헌법이’ 대통령을 파면하도록 했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 수백만 시민은 ‘헌법 1조가’를 함께 불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은 신성한 것이 됐고, 가슴 속의 이상이 됐다. 이제 헌법은 대한민국의 근본 가치에 비추어 정치 권력을 심판하는 힘이자, 시민들의 정치적 정체성의 중핵이 됐다. 지금 개헌은 민주화 30년의 이 거대한 변화에 응답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이다.

그러나 개헌이 앞으로 오랫동안 한국 정치와 사회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면 헌법 텍스트의 올바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과정과 내용의 측면 모두 보편성·정당성·구속성을 강력히 갖춰야 한다. 그것은 손쉽게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헌법의 세 가지 사회학적 역설에서 생겨나는 과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헌법은 한 사회의 최상위의 규범과 근본 가치를 담아야 하는데, 모든 집단이 동의하는 객관적 시대정신 같은 것은 없다는 게 문제다. 현실에서 헌법은 사회 전체의 만장일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정 정치사회 세력들의 구상과 협의로 제정된다. 헌법은 특수한 역사 과정에서 생겨나지만, 모든 사회 구성원에 보편적 구속력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특수한 탄생의 순간이 보편성의 광채를 발해야 한다.

둘째 역설은 민주주의와 헌법주의 사이에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수 국민이 선출했다는 것이 권력의 정당성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출된 권력의 남용을 막고, 법의 지배를 관철하며, 모든 시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려면 헌법이 선출의 원리를 견제해야 한다. 따라서 헌법이 형식적 대의 절차보다 더 깊고 넓은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어야 그것은 정권과 여론이 변해도 권위를 누릴 수 있다.

마지막 역설은 질서와 시민의 관계에 있다. 헌법국가는 모든 개인과 집단에 그것이 지향하는 질서를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 헌법보다 센 강자가 있다면 헌법은 규범이 아니라 명목이 된다. 하지만 또한 헌법은 시민들이 국가폭력과 사회적 강자에 맞서 자유와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방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의 자유와 존엄을 규정하는 헌법을 신성시하는 강력한 시민문화가 받쳐줄 때, 그것은 사회 전체에 강한 구속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개헌은 그럼 무엇이 필요한가? 대통령 발의라는 형식이 충분히 이상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국회가 더 이상적인 주체는 아니다. 국회 헌정특위는 그동안 특별히 진전시킨 것이 없을 뿐더러, 헌법에 의해 규제되고 견제되어야 할 대의기구가 헌법 개정의 독점적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헌법의 제·개정은 다양한 경로를 밟았다. 1780년대 필라델피아와 메사추세츠주 헌법과 1949년 서독 기본법은 제헌협의체로 만들었고, 1977년 스페인에선 독재 종식 후 구성된 일반 의회가 제정했다. 행정부 주도로 대표적인 것은 1799, 1802,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사례다.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에 힘입은 보나파르트식 개헌은 한계가 있다. 민심은 변하고 정권은 바뀌지만, 헌법은 변화를 견디는 항구적 가치, 신성한 약속이 돼야 한다. 그러려면 정부와 국회의 협력이라는 시험을 통과해야 하며, 무엇보다 시민들 스스로 열망을 표현하고 이 개헌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새 헌법에 힘과 생명을 부여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어떤 독재 권력도 손대지 못했다. 그것이 헌법의 카리스마다.

※ 신진욱 교수는…한국사회학회 상임이사이자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소장이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방문교수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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