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베트남전의 스파이 라이벌을 찾아 떠난 여행

베트남전의 스파이 라이벌을 찾아 떠난 여행

1968년 미군 첩보원으로 다낭에서 첩보망을 운영했던 필자가 당시의 베트콩 첩보 책임자를 수소문한 끝에 다시 만났다
1975년 다낭 함락 후 피란민이 화물용 그물에 매달려 미국 화물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 사진:PETER O’LOUGHLIN-AP-NEWSIS
베트남 다낭, 검은색 벤츠가 오토바이 물결 속을 헤치고 달린다. 정장 상의 옷깃에 현장을 단 베트콩 게릴라 대원 출신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 나를 태운 차는 미국 해군 함정의 주요 기항지였던 항구를 따라 달리다가 옛 미군 사령부 부지를 지나간다. 지금은 그 자리에 베트남 공산당의 지역 본부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조수석에는 하노이의 외교부에서 나온 내 안내원이 앉아 있다. 세상 물정에 밝은 둑이라는 이름의 청년이다. 뒷좌석 내 옆에선 또 다른 옛 베트콩 대원이 1969년 다낭 바로 위쪽에서 미군 해병대를 매복 공격하던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는다. 그는 미소 지으며 바지를 걷어올려 총상 흉터를 보여준다. 나는 부대 이름을 묻고는 대답을 들은 뒤 고개를 끄덕여줬다.

반 세기 전 나는 이곳의 미군 첩보원으로 베트남 첩보망을 통제하고 적군 동태를 파악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나의 옛 라이벌, 나에 맞서 첩보망을 운영하다가 수십 년 뒤 북베트남 군사정보부 부사령관으로 퇴역한 트란 티엔 쿵 소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쿵 장군의 소재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베트남인은 습관적으로 내 노력에 딴지를 걸었다. 협상은 번번이 결렬됐다. 이제 50년 가까운 노력 끝에 그를 직접 만나 전쟁의 은밀한 분야에 관한 역사를 비교해볼 기회가 갑자기 찾아왔다.

도로가 좁아지면서 우리가 탄 차는 라오스 비밀 공습을 위해 출격하던 미국 팬텀 제트기들의 주요 거점이던 옛 미군 공군기지 옆을 통과했다. 마침내 차가 외딴 길로 접어들더니 멈춰섰다. 진지한 표정의 남자들이 나타나 차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리자 베트남의 뜨거운 열기가 훅 밀려왔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한 사람이 말했다. 그는 하노이에서 온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쿵 장군이 나를 아예 못 만날 수도 있다고 둑이 내게 귓속말로 전했다.

나는 차에 몸을 기대며 이마의 땀을 씻어냈다. 이번에도 그를 못 만날까, 세계에서 가장 앞선 첩보 서비스의 포위망을 빠져나간 비결을 그대로 가슴에 안고 무덤으로 들어갈까 두려워졌다.나는 1968년 12월 정보 작전요원으로 다낭에 도착했다. 볼티모어의 포트 홀라버드에서 1년간의 베트남어 속성학습 과정과 6개월 간의 육군첩보원학교 과정을 막 이수한 참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비밀연락장소를 통한 정보 전달, 잠재적인 현지 공작원 평가, 소련 진영 비밀경찰 따돌리기 등의 기술을 배웠다. 그것은 베트남인 행상을 모집해 공산당 부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보다 스릴러 소설의 시나리오에 더 어울렸다. 그러나 다낭에 일단 도착한 뒤로 그런 기법 중 하나인 내 위장신분의 유지가 냉전 시대 베를린에서 민간인 행세를 하기보다 훨씬 더 어렵고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1968년 베트콩의 구정 대공세 중 미 해병대원이 전투 중간에 벽에 기대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사진:AP-NEWSIS
다낭에서의 첫날 밤 실전에서의 첩보 활동에 어떤 난관이 따르는지 명확히 드러났다. 옛 프랑스 식민지 전초기지에 자리 잡은 다낭 주재 미국 영사관에서 열린 칵테일 리셉션에서의 일이었다. 행사장으로 들어가 웨이터의 쟁반에서 칵테일 잔을 집어들 때까지 나의 새 위장 신분을 마저 암기하려 애쓰던 상황이었다. 방 안을 돌아보는 동안 흰색 제복 차림의 월남군 장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월남군 장교단에 공산당 스파이가 우글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로 배운 베트남어로 몇 분 간 대화를 나눈 뒤 그가 물었다. “무슨 일을 하시오?”

내 위장신분을 말하다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국방부 소속 민간인 난민 지원 장교요.”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샴페인을 홀짝였다. “그러니까 스파이네요.”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옛 프랑스 기지의 담장 높은 빌라로 돌아가는 길에 팀 동료 2명에게 그 당혹스러웠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한 명이 말을 받았다. “아, 별 거 아냐. 6개월 전 그린베레가 베트콩 지도를 입수했는데 우리 위치에 큰 X자 표시가 있었지. 그 위에 ‘특수첩보 안가’라고 쓰여 있더군.” 깜짝 놀란 나는 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거든. 월남에 온 걸 환영하네.”그들은 미군병력 감축계획의 일환으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나는 홀로 남아 진행 중이던 작전을 수행하게 됐다. 나는 곧바로 새 안가로 이동해 다른 신분으로 위장했다. 곧 내 첩보원들로부터 첩보 보고서가 꾸준히 올라왔다. 그러나 가장 신경 쓰이는 의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나를 상대로 첩보팀을 운영하는 공산당 스파이 지도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그를 찾아내고자 했다. 그를 죽이거나 또는 생포해 심문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그러나 이름도 알아내지 못했다.

1965년 미군 해병대원이 다낭 인근의 베트콩 마을로 의심되는 지역으로 향하고 있다. / 사진:EDDIE ADAMS-AP-NEWSIS
1969년 추수감사절을 며칠 앞두고 나는 베트남 그리고 군대를 떠났다. 군대 일에선 완전히 손을 뗐다. 단지 가끔씩 베트남전의 후유증에 관한 기고문을 쓰고 책을 한 권 펴냈을 뿐이다. 이중 첩자로 의심받던 아군 스파이 한 명을 처형한 뒤 살인 혐의로 기소된 그린베레 요원들에 관한 책이었다.

40여 년이 지난 뒤인 2012년 초 날아온 이메일 한 통이 내 첩보 분야 라이벌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부채질했다. 은퇴 후 하노이 문서보관서의 문서를 번역하던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멀 프리비나우가 보낸 메일이었다. 그중에는 전시 북베트남 군사정보부 부국장이었다는 쿵 장군이 저술한 회고록도 있었다. 이 특별한 문서에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프리비나우는 자신의 영어 번역문 샘플을 내게 보냈다. 이제 그의 이름뿐 아니라 소재지까지 알게 됐다. 쿵은 다낭 재향군인회 회장이었다.

눈길을 끌지 않으려 일부러 회고록에 ‘집과 전우들(Home and Fellow Soldiers)’이라는 무미건조한 제목을 단 듯했다. 스파이 활동을 묘사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내용은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충격적이었다. 1975년 3월 전쟁 막바지 몇 주 사이 월남군이 맥을 못추고 후퇴할 때 쿵은 첩보 팀을 이끌고 다낭의 버려진 미국-월남 연합군 사령부에 들어가 적군 첩보원들의 명단이 적힌 문서를 포함해 다량의 비밀자료를 확보했다.

쿵은 ‘우리가 입수한 품목 중에는 암호를 작성하고 해독하는 기계 6대’ 외에 확실한 신분증을 만들 수 있는 ‘다수의 기계’도 있었다고 썼다. 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이들 첨단장비를 러시아 모스크바·중국 베이징·쿠바 아바나의 우방에 보내 미국 신분증을 위조할 수 있게 했다. 쿵은 ‘우리가 확보한 문서와 장비가 너무 많아 그것을 모두 실어 내려고 국방부에 요청해 러시아 AN-24 수송기 2대를 동원해야 했다’고 덧붙였다.쿵이 장성 대열에 오르는 데는 의심할 바 없이 이 첩보 특종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미군의 지원을 받는 월남 정부가 패망하자 북베트남 정부는 다음의 큰 작전에서 그에게 핵심적인 역할을 맡겼다. 캄보디아 망명자들을 조직해 이웃 프놈펜에서 인종학살을 자행하는 크메르루주 정권을 전복시키는 일이었다. 베트남의 전광석화 같은 승리로 쿵은 이란·콩고·과테말라·파나마에서 미국이 후원하는 쿠데타의 기초를 닦은 CIA 현장 지휘관들과 대등한 지위로 올라앉았다.

1968년 테트 대공세 중 사이공에서 월남군이 적군을 향해 총격을 가하고 있다. / 사진:NICK URT-AP-NEWSIS
CIA 사이공 지국에서 5년간 근무한 프리비나우는 “첩보 면에서 미국이 공산당에 완전히 당했다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며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다소 과장된 면도 많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런 역사는 내게 당초 모두 학술적인 관심사였지만 곧 쿵이 아직 다낭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쿵은 원래 비밀장소였던 우리 안가에 X 표시를 한 장본인이었다).

2013년부터 그를 인터뷰할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거리를 걸으면서 옛날 스파이 거점을 방문해 전쟁 무용담을 교환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어쨌든 수년 전부터 미군과 베트콩 참전 군인들이 함께 옛 전쟁터를 다시 찾고 있었다. 왕년의 두 스파이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 하노이 당국에 몇 차례 문의했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너무 민감한 주제였으며 쿵이 너무 바빴다. 2015년 그의 나이 88세로 병세가 악화되면서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지난해 여름 내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를 방문하게 됐다고 베트남 당국에 전했을 때 뜻밖에 내가 베트남을 방문할 수 있다면 그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보장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데까지 알아보겠다는 설명이었다. 비행기표를 예약해 다낭으로 향했다.

지난해 8월 18일 다낭의 리조트 푸라마에 체크인했다. 입구 건너편으로 1969년 내가 있을 당시 넓게 펼쳐졌던 논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번화한 레스토랑과 놀이공원들이 늘어선 하이웨이가 뻗어 있었다. 나는 객실로 들어가 짐을 풀고 쿵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말했던 사람들의 전화를 기다렸다.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베트남 당국에 연결된 다른 통로를 통해 내 요청이 당 관료와 정부 부처 사이에 행정적인 충돌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보원에 따르면 미국 PBS 방송의 베트남 테마 시리즈 취재팀에 하노이 정부의 내부 비판자와 인터뷰를 주선한 일로 외교부가 공격을 받고 있었다. 시리즈에서 묘사된 당내 숙청, 북부의 전쟁 피로감, 남부의 공산당 대학살이 당 관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쿵이 병약한 상태라고 그는 전했다. 나와 함께 거리를 거닐며 우리의 비밀 전쟁에 관한 기억을 더듬기는커녕 수명이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른다.둑은 “장군의 건강 상태가 몹시 안 좋으니 면회는 몇 분간만 허용된다”고 설명했다. 마침내 한 측근의 부름을 받아 뒷마당을 통해 널찍하고 천장 높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황갈색의 등나무 침대에 누운 쿵은 야위고 쇠약했다. 측근이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워 알약을 몇 알 먹였다. 벽에는 사인이 적힌 사진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디엔 비엔 푸 전투의 영웅인 전설적인 보응우엔잡 장군과 찍은 사진, 호치민과 찍은 사진이었다. 쿵은 손짓으로 나를 침대 옆으로 불렀다. 둑이 나에 관해 설명했다. 쿵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쉰 목소리로 자신을 만나러 먼 길을 찾아와 고맙다고 말했다. 미국인을 만나 반갑지만 남은 기억이 많지 않다며 미안해 했다. 뇌졸중 탓이었다. 하지만 어려워 말고 질문하라고 그가 베트남어로 말했다. 둑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속삭였다. “아마 한 가지 질문에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내게 귀띔했다.

짧은 순간 갖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준비한 질문은 많았다. 반전 미국인을 스파이로 끌어들인 적이 있나? 미군 기지 내에 스파이를 어떻게 잠입시켰나(미군 기지 내의 베트남인 근로자 수십 명이 베트콩 포대에 좌표를 알려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모스크바에서 받은 첨단 스파이 훈련, 1969년 소련이 제공한 ‘우리 첩보활동의 혁명’을 회고록에서 설명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 등 알고 싶은 것은 많았다.

내가 어떤 질문을 할까 궁리하는 동안 쿵 장군은 손을 휘저어 이마에 앉은 파리를 날려보냈다. 머리 위에선 팬이 천천히 돌고 있었다. 나는 1945~75년 프랑스 식민지 헌병, 월남 경찰, 그리고 미국인의 추적까지 모두 따돌리고 살아남아 역사를 전하는 데 큰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을 상대로 한 첩보활동에서 최대의 승리는 무엇이었는가?” 마침내 내가 질문을 던졌다. 그는 천장을 응시하면서 침묵을 지켰다. 아주 오래 전 일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며 그가 또다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군과 마주쳤던 일을 한 건 기억해 냈다. 1960년대 중반 다낭에서 약 24㎞ 남쪽의 고향 마을 고 노이 지역에서 작전할 때였다. 그는 누운 자세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려 베트남 중부 지방의 억양으로 작고 쉰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요원들과 모임을 갖고 있던 주택 근처에 “갑자기 10여 대의 미군 헬리콥터가 착륙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우리 팀에는 철수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집 안의 지하 터널로 달려 내려갔다.”

둑이 통역할 수 있게 잠시 말을 멈춰달라고 손짓했다. “괜찮아요. 대강은 알아들으니까.” 내가 말했다. 쿵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주인 여자가 우리를 지하로 내려보내자마자 미군 2명과 통역관이 들이닥치더군.” 하지만 쿵 장군과 동료는 갑자기 “집 안의 라디오에서 아직도 하노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군의 베트남인 통역관이 방송을 못 들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트콩은 어디 있나?” 미군이 캐물었다. “헬리콥터가 착륙할 때 대나무 숲을 통해 빠져나갔다”는 여주인의 답변이 지하에 있던 쿵의 귀에 들려왔다.

미군들이 여주인을 담뱃불로 지지겠다고 위협했다고 쿵은 돌이켰다. “우리는 지하에서 덜덜 떨고 있었소. 우리를 일러바칠까봐 두려웠던 거지.”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군들은 더는 못 기다리겠던지 “베트콩 뒤를 쫓아” 달려나갔다. 대단한 무용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마디 말은 귀에 꽂혔다. 쿵은 “현지 주민은 우리 같은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감싸줬다”고 내게 말했다. 분명 따뜻한 추억이었다. “미군이 떠난 뒤 주인 여자는 우리들에게 따뜻한 쌀밥을 대접했지.” 미국 영사관에서 내 위장신분이 벗겨졌을 때 그리고 베트콩이 우리 팀 안가에 큰 X 표시를 했음을 알았을 때 처음 느꼈던 두려움이 떠올랐다. 낯선 땅의 이방인인 우리 등에는 항상 어떤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스파이로 지낸 오랜 세월에서 그가 기억해낼 수 있는 한 가지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동안 그의 행방을 추적해오는 과정에서 느꼈던 흥분이 깊은 슬픔으로 녹아내렸다. 장군도 그것을 느끼는 듯했지만 그의 기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떠날 때가 온 것이다. 내가 짐을 싸며 말했다. “살아 계셔서 정말 다행이네요.” 내가 내민 손에 솜털처럼 가벼운 손을 얹으며 그가 미소 지었다. “선생도 마찬가지요.”

- 제프 스타인 뉴스위크 기자

※ [이 글은 뉴스위크 특별판 ‘베트남 전쟁(Vietnam War)에서 발췌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택배 기사님 “아파트 들어오려면 1년에 5만원 내세요”

2“응애” 소리 늘까…4월 출생아 수, 전년 동월 대비 증가

3책 사이에 숨긴 화려한 우표…알고 보니 ‘신종 마약’

4경북도, K-국방용 반도체 국산화 위해 전주기 지원체계 구축

5영천시, 베트남 대형 유통업체 K-MARKET과 "농특산물 수출 확대" 협약 맺어

6대구시, 경기 화성 배터리공장 화재피해 복구 지원에 1억원 지원

7소방당국, 아리셀에 ‘화재 경고’…‘예방컨설팅’까지 했다

8최태원 동거인 첫 언론 인터뷰 “언젠가 궁금한 모든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

9갤럭시, 접고 끼고 AI 장착…‘언팩 초대장’ 보낸 삼성전자, 링·폴드·플립 공개

실시간 뉴스

1택배 기사님 “아파트 들어오려면 1년에 5만원 내세요”

2“응애” 소리 늘까…4월 출생아 수, 전년 동월 대비 증가

3책 사이에 숨긴 화려한 우표…알고 보니 ‘신종 마약’

4경북도, K-국방용 반도체 국산화 위해 전주기 지원체계 구축

5영천시, 베트남 대형 유통업체 K-MARKET과 "농특산물 수출 확대" 협약 맺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