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안톤 체호프 作 '공포'의 ‘정체성 경제학’
[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안톤 체호프 作 '공포'의 ‘정체성 경제학’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인종·직업·성별·가치관·규범 등도 각종 선택에 영향 나이가 들수록 산다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삶의 두께가 쌓여갈수록 삶은 두렵고, 때로 공포스럽다. 무언가를 찾아 열심히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보니 허무하다. 꿈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반복되는 일상뿐. 이러려고 산 것인가.
126년 전인 1892년 막 사할린 여행에서 돌아온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도 똑같은 고민을 했다. 결핵에 걸린 몸으로 11개월 간 오지를 다녀온 체호프의 글은 진지해졌다. 모스크바 근교인 멜리호보에 정착한 체호프가 처음 쓴 단편소설이 [공포]다.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은 삶이 공포스럽다. 대학까지 공부했지만 직장에 대해 겁을 먹고 농장일을 하기 시작했다. 실은 농장일도 두렵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일에 몰두하고 몸을 혹사한 후 잠을 청한다. ‘착한 부인과 예쁜 아이’들도 그에게는 짐을 주는 존재다. 아내가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냥 살아간다. 삶은 언제나 그랬으니까.
‘나’는 페트로비치의 친구다. 그의 농장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그의 철학을 좋아하다. 하지만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에 대한 호감속에는 무언가 거북한 압력이 있다. 실은 그의 아내 마리야 세르게예브나를 좋아한다. 한동안 못 보면 그녀가 그리워지고 나의 공상 속에서 그녀만큼 생생하게 떠오르는 사람은 없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페트로비치는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그래서 나에게 ‘그의 공포’를 털어놓는다. “나의 가정생활은 가장 큰 불행이자 공포야. 내 결혼은 기묘했고 어리석었어. 나는 그녀에게 구걸하듯 다섯 번이나 청혼해서 결혼을 했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지 모르겠어. 그래도 한지붕 아래서 ‘여보’라고 부르며 같이 잠자고 아이를 가졌고, 재산도 공동명의로 했어.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이건 지독한 고문이야. 우리 관계에 관한 그 무엇도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그 점 때문에 그녀를 증오하고, 나 자신을 증오하고, 우리 둘 다 증오해.”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죽고 못 사는 사람과 안 하면 죽을 것 같은 일을 선택해야 효용이 극대화되겠지만, 그런 대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정보를 적시에 주지 않는다. 지독한 ‘정보 비대칭’이 존재한다. 그나마 역선택이 아니었기를 바라며 대다수는 자신의 선택을 이어나간다.
페트로비치가 딱 그렇다. 남이 볼 때는 완벽한 가정이지만 실제는 아니다.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정숙한 아내가 되겠다”던 아내는 자신이 집을 비우면 되레 기뻐하는 것 같다. 페트로비치가 표현하듯 ‘절망적인 사랑’이다.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잉꼬부부인 것처럼 행동하는 부부를 ‘쇼윈도 부부’라고 한다. 혹은 ‘디스플레이 부부’라고 칭하기도 한다. 대중에 자주 노출되는 셀럽부부의 경우 이미지 관리가 중요해 쇼윈도부부를 자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페트로비치의 고백을 듣자 나는 남을 속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찜찜하고 우울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반갑고 들뜬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 세 명이 마주앉은 저녁식사, 페트로비치가 일찍 자리를 뜨자 이제 나와 그녀만 남았다. 눈부신 머릿결과 어떤 여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미소를 가진 그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흥분 때문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내가 차마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바로 오늘밤에 일어나야 한다. 반드시 오늘밤이어야 한다. 아니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두 사람은 마침내 입을 맞춘다. 격렬하게 껴안는다. 눈물과 맹세를 담은 ‘심각한 사랑’이다. 그 순간 나는 결코 심각한 사랑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밤이 두 사람의 삶속에서 밝은 유성처럼 타올랐다가 팍 꺼져버리기를 바란다.
그녀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는데 ‘나’는 왜 멈칫하는 것일까. 그는 페트로비치와의 우정을 떠올렸다. 자신을 진정한 친구로 여겨 속내까지 털어놓은 페트로비치에 대한 미안함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떤 거북한 느낌과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는 유부녀이고, 그 남편이 그의 친구라는 ‘정체성’이 그의 선택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다. 사람이 선택을 할 때는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인종·직업·성별·가치관·규범 등도 영향을 준다.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조지 애커로프는 이를 ‘아이덴티티 경제학(정체성 경제학)’이라고 명명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는 특정한 상, 즉 정체성을 갖고 있다. 이 상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경우는 자기도 모르게 불쾌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정체성에는 인종·성별·소득수준 등과 같은 사회적 지위와 사회규범이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살아간다. 유아 때 그토록 뽀로로를 좋아하던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니 더 이상 뽀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뽀로로를 좋아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괜히 부끄럽기 때문이다. “아직도 뽀로로를 좋아하느냐”를 말을 듣게 된다면 자신의 효용도 낮아진다.
인간이 경제적 인센티브에만 반응을 한다면 임금을 많이 주는 직장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주변이 보기에 부정적인 직장이라면 그보다 조금 더 적은 임금을 주는 직장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호날두는 중국의 수퍼리그로부터 2년 간 2억 유로(약 2623억원)를 제의 받았지만 거부하고 유벤투스로 갔다. 호날두가 유벤투스에서 받는 연봉은 3000만 유로(약 392억원)로 연간 기준으로 중국 측 제의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중국보다 적은 연봉을 받고 호날두가 이탈리아를 택한 것은 클럽대항전 우승에 대한 욕심, 아시아라는 낯선 삶의 터전, 3류 리그에서 뛸 수 없다는 자존심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서울보다 적은 연봉을 받고도 기꺼이 고향에서 일하겠다면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애향심, 고향의 편안함 등이 의사결정의 변수가 됐을 것이다.
정체성은 경제적 인센티브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웃사이더(업무를 수행하지만 일로서 하는 타입)는 돈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인사이더(회사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적극적으로 일하는 사람)는 상대적으로 성과급에 둔감하다. 일에 대한 만족감, 회사에 대한 자부심 등은 굳이 돈이 아니라도 일을 하게 만든다. 경영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아웃사이더가 많은 회사는 그만큼 비용을 더 치러야 한다. 애사심을 키우는 것은 경영전략으로도 중요하다. 페트로비치는 나와 그의 아내와의 관계를 알게 된다. 페트로비치는 별 얘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들 부부를 떠나고 다시는 둘을 만나지 않았다. ‘나’는 친구의 아내라는 아이덴티티를 끝내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호모이코노미쿠스는 경제적 인센티브는 중요시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그래서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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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년 전인 1892년 막 사할린 여행에서 돌아온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도 똑같은 고민을 했다. 결핵에 걸린 몸으로 11개월 간 오지를 다녀온 체호프의 글은 진지해졌다. 모스크바 근교인 멜리호보에 정착한 체호프가 처음 쓴 단편소설이 [공포]다.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은 삶이 공포스럽다. 대학까지 공부했지만 직장에 대해 겁을 먹고 농장일을 하기 시작했다. 실은 농장일도 두렵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일에 몰두하고 몸을 혹사한 후 잠을 청한다. ‘착한 부인과 예쁜 아이’들도 그에게는 짐을 주는 존재다. 아내가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냥 살아간다. 삶은 언제나 그랬으니까.
‘나’는 페트로비치의 친구다. 그의 농장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그의 철학을 좋아하다. 하지만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에 대한 호감속에는 무언가 거북한 압력이 있다. 실은 그의 아내 마리야 세르게예브나를 좋아한다. 한동안 못 보면 그녀가 그리워지고 나의 공상 속에서 그녀만큼 생생하게 떠오르는 사람은 없다.
삶은 선택의 연속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죽고 못 사는 사람과 안 하면 죽을 것 같은 일을 선택해야 효용이 극대화되겠지만, 그런 대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정보를 적시에 주지 않는다. 지독한 ‘정보 비대칭’이 존재한다. 그나마 역선택이 아니었기를 바라며 대다수는 자신의 선택을 이어나간다.
페트로비치가 딱 그렇다. 남이 볼 때는 완벽한 가정이지만 실제는 아니다.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정숙한 아내가 되겠다”던 아내는 자신이 집을 비우면 되레 기뻐하는 것 같다. 페트로비치가 표현하듯 ‘절망적인 사랑’이다.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잉꼬부부인 것처럼 행동하는 부부를 ‘쇼윈도 부부’라고 한다. 혹은 ‘디스플레이 부부’라고 칭하기도 한다. 대중에 자주 노출되는 셀럽부부의 경우 이미지 관리가 중요해 쇼윈도부부를 자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페트로비치의 고백을 듣자 나는 남을 속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찜찜하고 우울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반갑고 들뜬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 세 명이 마주앉은 저녁식사, 페트로비치가 일찍 자리를 뜨자 이제 나와 그녀만 남았다. 눈부신 머릿결과 어떤 여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미소를 가진 그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흥분 때문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내가 차마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바로 오늘밤에 일어나야 한다. 반드시 오늘밤이어야 한다. 아니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두 사람은 마침내 입을 맞춘다. 격렬하게 껴안는다. 눈물과 맹세를 담은 ‘심각한 사랑’이다. 그 순간 나는 결코 심각한 사랑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밤이 두 사람의 삶속에서 밝은 유성처럼 타올랐다가 팍 꺼져버리기를 바란다.
그녀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는데 ‘나’는 왜 멈칫하는 것일까. 그는 페트로비치와의 우정을 떠올렸다. 자신을 진정한 친구로 여겨 속내까지 털어놓은 페트로비치에 대한 미안함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떤 거북한 느낌과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는 유부녀이고, 그 남편이 그의 친구라는 ‘정체성’이 그의 선택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다. 사람이 선택을 할 때는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인종·직업·성별·가치관·규범 등도 영향을 준다.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조지 애커로프는 이를 ‘아이덴티티 경제학(정체성 경제학)’이라고 명명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는 특정한 상, 즉 정체성을 갖고 있다. 이 상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경우는 자기도 모르게 불쾌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정체성에는 인종·성별·소득수준 등과 같은 사회적 지위와 사회규범이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살아간다. 유아 때 그토록 뽀로로를 좋아하던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니 더 이상 뽀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뽀로로를 좋아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괜히 부끄럽기 때문이다. “아직도 뽀로로를 좋아하느냐”를 말을 듣게 된다면 자신의 효용도 낮아진다.
인간이 경제적 인센티브에만 반응을 한다면 임금을 많이 주는 직장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주변이 보기에 부정적인 직장이라면 그보다 조금 더 적은 임금을 주는 직장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호날두는 중국의 수퍼리그로부터 2년 간 2억 유로(약 2623억원)를 제의 받았지만 거부하고 유벤투스로 갔다. 호날두가 유벤투스에서 받는 연봉은 3000만 유로(약 392억원)로 연간 기준으로 중국 측 제의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중국보다 적은 연봉을 받고 호날두가 이탈리아를 택한 것은 클럽대항전 우승에 대한 욕심, 아시아라는 낯선 삶의 터전, 3류 리그에서 뛸 수 없다는 자존심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서울보다 적은 연봉을 받고도 기꺼이 고향에서 일하겠다면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애향심, 고향의 편안함 등이 의사결정의 변수가 됐을 것이다.
정체성은 경제적 인센티브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웃사이더(업무를 수행하지만 일로서 하는 타입)는 돈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인사이더(회사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적극적으로 일하는 사람)는 상대적으로 성과급에 둔감하다. 일에 대한 만족감, 회사에 대한 자부심 등은 굳이 돈이 아니라도 일을 하게 만든다. 경영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아웃사이더가 많은 회사는 그만큼 비용을 더 치러야 한다. 애사심을 키우는 것은 경영전략으로도 중요하다.
정체성은 경제적 인센티브에도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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