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경기 정점 찍었나?] ‘초호황’ 지나도 ‘호황’은 이어질 듯
[반도체 경기 정점 찍었나?] ‘초호황’ 지나도 ‘호황’은 이어질 듯
외국계 증권사 과도한 비관론에 갑론을박…불확실성 커져 반도체 주가는 부진할 수도 하반기 들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계 국내 대표주자의 주가가 흔들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당황스러울 정도”라고 말한다. 상반기 대비 하반기 영업이익의 증가가 예상되는 데도 주가는 영 맥을 못 추고 있다. 왜 그럴까? 시계 바늘을 잠시 지난해 2월 10일로 돌려보자. 이날 SK하이닉스 주가가 5%나 빠졌다. 시장 전문가들은 전날 UBS증권 리포트를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니콜라 고도와 UBS 애널리스트는 “SK하이닉스 영업이익은 2017년 고점을 기록한 후 2018년 36%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투자의견은 ‘매수’에서 ‘중립’으로 낮췄다. 메모리 반도체 전망과 관련해서도 “D램 사이클이 고점에 근접했다”며 “D램은 2017년 2분기~3분기 사이에, 낸드플래시는 하반기에 공급 과잉이 나타날 것”이라고 분석했다. SK하이닉스 주가는 메모리 시장 호황에 힘입어 2016년 5월 2만5000원대에서 2017년 2월 5만원대까지 2배 이상으로 오르며 상승세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UBS 리포트는 SK하이닉스에 직격탄이 됐다. UBS는 메모리 반도체 수퍼사이클의 지속 여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UBS의 예상대로 2017년 중반부터 공급 과잉이 시작돼 2018년 본격화 한다면 이번 수퍼사이클은 겨우 20개월여 만에 수명을 다하는 셈이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SK하이닉스 주가는 그로부터 6개월 후인 9월 중순 8만원을 훌쩍 넘어섰다. 사상 최대 분기 매출·영업이익·순이익 기록을 매 분기마다 갈아치우며 파죽지세의 실적을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UBS는 손을 들었다. “D램 사이클을 잘못 계산했다”며 지난 2월 리포트의 주장을 거둬들였다. 니콜라 고도와 애널리스트는 “D램 가격이 2017년 4분기까지 상승할 수 있는 요인들을 확인했다”며 “2018년 영업이익은 2017년과 비슷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예상은 맞았을까. 안타깝게도 크게 빗나갈 확률이 100%다. SK하이닉스는 2017년 13조72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UBS는 올해 13조86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SK하이닉스는 올해 상반기에 이미 10조원에 가까운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증권가에서 예상하는 연간 전망치 평균은 20조5000억원이다. 전년 대비 50% 증가한 수치다.
UBS의 이 같은 오류는 분석 실력이 부족해서일까? 업계 관계자들은 “2017년 9월에 2018년의 연간 실적을 전망하는 것 자체가 애당초 무리”라고 말한다. 실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도 3개월~6개월 전망은 주요 거래선과의 메모리 고정거래 가격에 기반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 넘어가면 전망 자체가 힘들다고 한다. 메모리 업황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신의 영역’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김기남 사장이 최근 업황과 관련해 한마디 한 내용이 있다. 지난 9월 12일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삼성AI포럼에서다. 기자들이 메모리반도체 전망에 대해 질문하자 김 사장은 먼저 “몇 개월 후 시장 예측도 사실은 어렵다”는 말을 전제로 깔았다. 그러면서 그는 “적어도 4분기까지는 업황이 좋을 것으로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날 기자들이 김 사장에게 업황에 대한 질문을 쏟아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부 외국계 증권사들이 잇따라 반도체 경기가 고점을 지나고 있다는 분석과 함께 내년 반도체 시장이 둔화할 것이라는 리포트를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메모리 반도체 수퍼사이클 논쟁이 다시 불 붙고 있는 양상이다. 2분기 실적 발표(7월~8월) 이후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테크놀로지 등 국내외 주요 메모리 업체들은 실적설명회에서 하반기 메모리 업황에 대해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그런데 제조사들의 이런 낙관에도 일부 외국계 증권사를 중심으로 메모리 업황 고점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고점론의 선두에는 모건스탠리가 있다. 골드만삭스와 JP모건, 프랑스계 투자은행인 CLSA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퍼사이클의 고점이 닥쳤다며 반도체 업종에 대한 비중 축소를 권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모건스탠리를 불신한다.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반도체 업종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을 제시해왔지만, 예측이 계속 빗나갔다는 지적이다.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11월 “메모리 반도체 경기가 곧 정점을 찍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서버용 D램 등에서 수요가 급증해 메모리 업체들은 1분기와 2분기 연이어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그런에도 이들 외국계 분석기관들의 스탠스에는 큰 변화가 없다. 부정적 전망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유진투자증권 이승우 애널리스트는 최근 리포트에서 수퍼사이클의 원인을 진단하고, 수퍼사이클 종료 논란을 불러온 단서들을 조목조목 분석했다. 리포트는 우선 수퍼사이클이 가능했던 이유로 인공지능(AI) 기술 발전에 따른 데이터 처리 수요 증가를 들고 있다. 과거에 메모리 수요 성장을 이끄는 요인은 주로 소비재였다. 이제는 컴퓨팅 인프라·서비스로 바뀌었다. 그래서 수요의 가격탄력성이 약화(메모리 가격이 높아져도 수요에 큰 변화가 없음)됐다. 메모리 제조 난이도가 증가한 것도 한몫했다. 업체들이 대규모 투자를 해도 메모리 공급이 크게 증가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공급 증가 여력의 둔화도 수퍼사이클의 지속에 큰 기여를 했다.
업계에서도 이 같은 분석에 동의한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특히 투자와 공급 증가 간 상관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새로운 메모리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는 것은 생산량 확대를 통해 공격적 경영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기술 개발의 난이도 증가 등으로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보다 반도체 기술 구현이 어렵지 않던 과거에는 투자를 통해 출하량 증가폭을 대폭 늘리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늘어나는 메모리 수요에 비해 공급 증가폭은 제한적이다. 어려워진 기술 구현이 생산성 감소를 수반해 적극적인 시설투자 없이 경쟁력을 확보하고 수요를 맞춰가는 게 어렵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메모리 업계는 치킨게임이 한창이던 2006년~2007년 2년 동안 552억 달러의 시설투자를 집행했다. 2015년~2016년 2년 동안 투자는 512억 달러로 치킨게임 당시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출하량 증가율(Bit Growth)은 큰 차이가 있다. D램의 경우 2007년 89%와 2008년 66%, 낸드플래시는 2007년 179%와 2008년 132%에 이르는 증가세를 보였다. 이와 달리 2016년과 2017년의 D램 출하량 증가율은 각각 31%와 20%, 낸드플래시는 45%와 44%에 불과하다. 대규모 투자에도 기술 구현의 어려움으로 업계 전체 출하량 증가폭이 대폭 줄었다.
수퍼사이클 종료를 주장하는 측에서 그 근거로 몇 가지를 내세운다. 반도체 업황과 상관관계가 높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기선행지수 등 일부 거시경제 지표의 하락, 서버 수요 둔화 조짐, 그동안 대폭 증가했던 설비투자에 따른 본격적인 공급 증가, 반도체 재고일수의 증가, 현물시장 가격 하락, 중국의 반도체 굴기 영향 등이다. 이승우 애널리스트는 이 같은 근거들 가운데 상당수는 설득력이 약한 것으로 분석했다. 일부 논란이 될 수 있는 변화들이 있기는 하지만, 메모리 수퍼 사이클을 만든 수요와 공급의 기본 프레임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사실 반도체 사이클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지난해 초부터 시작된 일”이라며 “당시 해외 유명 시장조사기관과 국내외 증권사 일부에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D램 사이클의 하드랜딩이 시작될 것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나 지난해와 올해 메모리 반도체 시장 흐름은 어떤 낙관적 전망보다 더 양호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주가 역시 앞으로 발생 가능한 이익 둔화 가능성을 충분히 반영할 정도의 조정을 거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키움증권 박유악 애널리스트도 “D램은 비수기인 올해 4분기에서 내년 1분기까지 일시 수급 불균형이 발생한 후 성수기에 진입하는 2분기부터 다시 공급 부족에 진입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이와 달리 메리츠투자증권 김선우 애널리스트는 D램 업황이 이미 고점을 지나고 있다는 기존의 보수적 시각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올해 3분기부터 선두 업체의 공급 증가가 시장 성장을 능가하며 내년 중반까지 D램 판가 하락은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봤다. 메모리 업체들의 신규 반도체공장 건설과 가동은 구매 업체들의 가격 협상력을 강화시켜 판매가격 하락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김 애널리스트가 전망하는 내년 메모리 시장은 ‘호황’이다. 그는 “유례없는 D램 산업의 ‘초호황’이 내년에 ‘호황’으로 격하될 전망”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미세공정 개발의 난이도 증가와 견조한 서버 수요라는 장기 추세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메모리 업체들의 주가는 내년 중반까지 조정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김 애널리스트는 “주가는 수익성의 ‘위치’가 아닌 ‘방향’을 반영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익의 절대치가 크더라도 이익이 줄어드는 추세라면 주가가 상승흐름을 보이기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정작 메모리 업계는 이 같은 국내외 증권사들의 분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고점 경과론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삼성전자 김기남 사장의 최근 발언이 업계의 시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김 사장은 내년 업황까지 전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올해 하반기까지 업황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해, 적어도 고점 경과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반도체 업체 최고경영자(CEO)들이 대개 6개월 이후 전망까지 언급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박성욱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올해 2월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이 대거 모인 자리(반도체 디스플레이 상생발전위원회 출범식)에서 기자들로부터 “반도체 고점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상반기까지는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반기 전망에 대해 추가 질문이 이어지자 “하반기부터는 데이터 시장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봐야할 것”이라고만 언급, 이렇다 할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6개월 이내 전망은 주요 거래 업체와의 계약가격(고정거래가격)에 기반해 예상할 수 있지만, 그 이상 기간에 대해서는 변수가 너무 많아 전망이 어렵다”고 말했다. 지금 고점을 지나는 중인지, 고점이 임박했는지도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되짚어 봐야 판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점을 지났다고 해도 그것이 곧 불황으로의 진입은 아니라는 사실”이라며 “고점 논란이 격화하면서 고점을 지났다는 것이 불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SK하이닉스의 실적을 한 번 보자. 2010년~2016년까지 연간 영업이익은 최고 5조3360억원, 최저 3690억원이다(2012년에는 2270억원 영업손실). 최고 5조원대 영업이익을 기록하던 SK하이닉스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13조7200억원으로 치솟았다. 모바일, PC, 서버용 메모리 수요가 골고루 증가하면서 가격 상승세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올해 역시 우호적인 수요 환경이 지속되면서 D램과 플래시메모리 모두 큰 폭의 출하량 증가를 기록했다. 증권사들이 전망하는 연간 영업이익 전망치는 20조5000억원 수준이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수조원의 연간 영업이익만으로도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는 한 분기 영업이익이 수조원에 달하는 등 클래스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렇다면 D램 수요 약세와 낸드플래시 공급 과잉 등 메모리 시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건스탠리가 예상하는 2018년, 2019년, 2020년의 SK하이닉스 실적 전망치는 얼마나 될까. 영업이익 기준으로 각각 21조원, 18조 5000억원(전 년 대비 12% 감소), 17조원(전년 대비 7.6% 감소)이다. 반도체 업황이 꺾인 시기에도 적어도 무려 17조원의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본다는 이야기다. 업계 관계자는 “고점을 지난다고 해도 과거 대비로는 ‘호황’을 이어간다는 전망인 셈”이라고 말했다. 골드만삭스는 어떨까. 이 증권사의 SK하이닉스 영업이익 전망치는 22조9000억원(2018년), 19조3000억원(2019년), 18조1000억원(2020년)이다. 여전히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클래스의 영업이익을 계속 유지해 나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이들은 투자의견을 하향 조정할까? 메리츠증권 김선우 애널리스트가 언급했듯 반도체 업황이 유례없는 ‘초호황기’에서 ‘호황기’로 넘어갈 수 있다는 데 대해서는 업계도 동의한다. 업계 관계자는 “절대적인 이익의 크기를 유지하더라도 이익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을 경우 투자자들은 차익실현의 욕구를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럴 때 업황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담은 리포트가 나오면 민감한 투자자나 단기 투자자는 주식을 던지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고점 논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외국계 증권사로서는 가장 최근에 반도체 업황 코멘트를 내놓은 CLSA는 가장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세바스천 허우 애널리스트는 “세계 반도체 시장이 조만간 심각한 하강 국면에 들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게 될 것인가? 상당수의 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그렇지 않다고 보고 있으며, 또 일부 외국계 증권사들도 모건스탠리 등의 전망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 누가 맞을지는 메모리 업계 관계자들의 말처럼, 시간이 한참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불확실하다는 이야기다.
시장은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한다. 그래서 메모리 업체들의 주가는 당분간 부진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낙관적인 전망에 가까운 유진투자증권 이승우 애널리스트도 “반도체 다운 턴 리스크(down turn risk)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면서도 “불확실성과 관련된 논란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도체 업황은 가파른 오르막길 이후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를 만난 형국이라고 그는 말했다.
- 김수헌 글로벌모니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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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번이 예상 빗나간 UBS증권 리포트
이번 예상은 맞았을까. 안타깝게도 크게 빗나갈 확률이 100%다. SK하이닉스는 2017년 13조72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UBS는 올해 13조86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SK하이닉스는 올해 상반기에 이미 10조원에 가까운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증권가에서 예상하는 연간 전망치 평균은 20조5000억원이다. 전년 대비 50% 증가한 수치다.
UBS의 이 같은 오류는 분석 실력이 부족해서일까? 업계 관계자들은 “2017년 9월에 2018년의 연간 실적을 전망하는 것 자체가 애당초 무리”라고 말한다. 실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도 3개월~6개월 전망은 주요 거래선과의 메모리 고정거래 가격에 기반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 넘어가면 전망 자체가 힘들다고 한다. 메모리 업황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신의 영역’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김기남 사장이 최근 업황과 관련해 한마디 한 내용이 있다. 지난 9월 12일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삼성AI포럼에서다. 기자들이 메모리반도체 전망에 대해 질문하자 김 사장은 먼저 “몇 개월 후 시장 예측도 사실은 어렵다”는 말을 전제로 깔았다. 그러면서 그는 “적어도 4분기까지는 업황이 좋을 것으로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날 기자들이 김 사장에게 업황에 대한 질문을 쏟아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부 외국계 증권사들이 잇따라 반도체 경기가 고점을 지나고 있다는 분석과 함께 내년 반도체 시장이 둔화할 것이라는 리포트를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메모리 반도체 수퍼사이클 논쟁이 다시 불 붙고 있는 양상이다. 2분기 실적 발표(7월~8월) 이후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테크놀로지 등 국내외 주요 메모리 업체들은 실적설명회에서 하반기 메모리 업황에 대해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그런데 제조사들의 이런 낙관에도 일부 외국계 증권사를 중심으로 메모리 업황 고점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고점론의 선두에는 모건스탠리가 있다. 골드만삭스와 JP모건, 프랑스계 투자은행인 CLSA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퍼사이클의 고점이 닥쳤다며 반도체 업종에 대한 비중 축소를 권고하고 있다.
모건스탠리·골드만삭스·JP모건·CLSA “수퍼사이클 정점”
유진투자증권 이승우 애널리스트는 최근 리포트에서 수퍼사이클의 원인을 진단하고, 수퍼사이클 종료 논란을 불러온 단서들을 조목조목 분석했다. 리포트는 우선 수퍼사이클이 가능했던 이유로 인공지능(AI) 기술 발전에 따른 데이터 처리 수요 증가를 들고 있다. 과거에 메모리 수요 성장을 이끄는 요인은 주로 소비재였다. 이제는 컴퓨팅 인프라·서비스로 바뀌었다. 그래서 수요의 가격탄력성이 약화(메모리 가격이 높아져도 수요에 큰 변화가 없음)됐다. 메모리 제조 난이도가 증가한 것도 한몫했다. 업체들이 대규모 투자를 해도 메모리 공급이 크게 증가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공급 증가 여력의 둔화도 수퍼사이클의 지속에 큰 기여를 했다.
업계에서도 이 같은 분석에 동의한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특히 투자와 공급 증가 간 상관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새로운 메모리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는 것은 생산량 확대를 통해 공격적 경영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기술 개발의 난이도 증가 등으로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보다 반도체 기술 구현이 어렵지 않던 과거에는 투자를 통해 출하량 증가폭을 대폭 늘리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늘어나는 메모리 수요에 비해 공급 증가폭은 제한적이다. 어려워진 기술 구현이 생산성 감소를 수반해 적극적인 시설투자 없이 경쟁력을 확보하고 수요를 맞춰가는 게 어렵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메모리 업계는 치킨게임이 한창이던 2006년~2007년 2년 동안 552억 달러의 시설투자를 집행했다. 2015년~2016년 2년 동안 투자는 512억 달러로 치킨게임 당시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출하량 증가율(Bit Growth)은 큰 차이가 있다. D램의 경우 2007년 89%와 2008년 66%, 낸드플래시는 2007년 179%와 2008년 132%에 이르는 증가세를 보였다. 이와 달리 2016년과 2017년의 D램 출하량 증가율은 각각 31%와 20%, 낸드플래시는 45%와 44%에 불과하다. 대규모 투자에도 기술 구현의 어려움으로 업계 전체 출하량 증가폭이 대폭 줄었다.
수퍼사이클 종료를 주장하는 측에서 그 근거로 몇 가지를 내세운다. 반도체 업황과 상관관계가 높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기선행지수 등 일부 거시경제 지표의 하락, 서버 수요 둔화 조짐, 그동안 대폭 증가했던 설비투자에 따른 본격적인 공급 증가, 반도체 재고일수의 증가, 현물시장 가격 하락, 중국의 반도체 굴기 영향 등이다. 이승우 애널리스트는 이 같은 근거들 가운데 상당수는 설득력이 약한 것으로 분석했다. 일부 논란이 될 수 있는 변화들이 있기는 하지만, 메모리 수퍼 사이클을 만든 수요와 공급의 기본 프레임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사실 반도체 사이클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지난해 초부터 시작된 일”이라며 “당시 해외 유명 시장조사기관과 국내외 증권사 일부에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D램 사이클의 하드랜딩이 시작될 것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나 지난해와 올해 메모리 반도체 시장 흐름은 어떤 낙관적 전망보다 더 양호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주가 역시 앞으로 발생 가능한 이익 둔화 가능성을 충분히 반영할 정도의 조정을 거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키움증권 박유악 애널리스트도 “D램은 비수기인 올해 4분기에서 내년 1분기까지 일시 수급 불균형이 발생한 후 성수기에 진입하는 2분기부터 다시 공급 부족에 진입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기술 난이도 높아져 대규모 투자에도 공급 증가 적어
그렇다면 정작 메모리 업계는 이 같은 국내외 증권사들의 분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고점 경과론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삼성전자 김기남 사장의 최근 발언이 업계의 시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김 사장은 내년 업황까지 전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올해 하반기까지 업황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해, 적어도 고점 경과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반도체 업체 최고경영자(CEO)들이 대개 6개월 이후 전망까지 언급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박성욱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올해 2월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이 대거 모인 자리(반도체 디스플레이 상생발전위원회 출범식)에서 기자들로부터 “반도체 고점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상반기까지는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반기 전망에 대해 추가 질문이 이어지자 “하반기부터는 데이터 시장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봐야할 것”이라고만 언급, 이렇다 할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6개월 이내 전망은 주요 거래 업체와의 계약가격(고정거래가격)에 기반해 예상할 수 있지만, 그 이상 기간에 대해서는 변수가 너무 많아 전망이 어렵다”고 말했다. 지금 고점을 지나는 중인지, 고점이 임박했는지도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되짚어 봐야 판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점을 지났다고 해도 그것이 곧 불황으로의 진입은 아니라는 사실”이라며 “고점 논란이 격화하면서 고점을 지났다는 것이 불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SK하이닉스의 실적을 한 번 보자. 2010년~2016년까지 연간 영업이익은 최고 5조3360억원, 최저 3690억원이다(2012년에는 2270억원 영업손실). 최고 5조원대 영업이익을 기록하던 SK하이닉스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13조7200억원으로 치솟았다. 모바일, PC, 서버용 메모리 수요가 골고루 증가하면서 가격 상승세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올해 역시 우호적인 수요 환경이 지속되면서 D램과 플래시메모리 모두 큰 폭의 출하량 증가를 기록했다. 증권사들이 전망하는 연간 영업이익 전망치는 20조5000억원 수준이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수조원의 연간 영업이익만으로도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는 한 분기 영업이익이 수조원에 달하는 등 클래스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렇다면 D램 수요 약세와 낸드플래시 공급 과잉 등 메모리 시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건스탠리가 예상하는 2018년, 2019년, 2020년의 SK하이닉스 실적 전망치는 얼마나 될까. 영업이익 기준으로 각각 21조원, 18조 5000억원(전 년 대비 12% 감소), 17조원(전년 대비 7.6% 감소)이다. 반도체 업황이 꺾인 시기에도 적어도 무려 17조원의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본다는 이야기다. 업계 관계자는 “고점을 지난다고 해도 과거 대비로는 ‘호황’을 이어간다는 전망인 셈”이라고 말했다. 골드만삭스는 어떨까. 이 증권사의 SK하이닉스 영업이익 전망치는 22조9000억원(2018년), 19조3000억원(2019년), 18조1000억원(2020년)이다. 여전히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클래스의 영업이익을 계속 유지해 나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이들은 투자의견을 하향 조정할까? 메리츠증권 김선우 애널리스트가 언급했듯 반도체 업황이 유례없는 ‘초호황기’에서 ‘호황기’로 넘어갈 수 있다는 데 대해서는 업계도 동의한다. 업계 관계자는 “절대적인 이익의 크기를 유지하더라도 이익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을 경우 투자자들은 차익실현의 욕구를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럴 때 업황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담은 리포트가 나오면 민감한 투자자나 단기 투자자는 주식을 던지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반도체 회사 CEO들 “6개월 이상 전망 어렵다”
시장은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한다. 그래서 메모리 업체들의 주가는 당분간 부진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낙관적인 전망에 가까운 유진투자증권 이승우 애널리스트도 “반도체 다운 턴 리스크(down turn risk)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면서도 “불확실성과 관련된 논란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도체 업황은 가파른 오르막길 이후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를 만난 형국이라고 그는 말했다.
- 김수헌 글로벌모니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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