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농구 코트의 지배자는?
2010년대 농구 코트의 지배자는?
제임스의 성적을 NBA의 전설 2명, 그리고 현역 스타 3명과 비교한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르브론 제임스가 2010년대의 농구를 규정짓게 될 듯하다. 1990년 대 마이클 조던, 1970년대 카림 압둘-자바가 그랬듯이 말이다. 종합 득점에서는 아직 아무도 카림 압둘-자바를 넘어서지 못했지만 한때 관객이 2000~3000명 대에 불과하던 투박한 농구가 미식축구의 뒤를 이어 많은 이목이 집중되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대형 스포츠로 어떻게 진화했는지 알려면 선수 연봉과 3점 슛의 부상만봐도 충분하다(3점 슛은 1979년 공식 채택됐으며 그때까지는 모든 골이 2점으로 계산됐다). 압둘-자바의 선수 경력 중 기록한 3점 슛은 한 개에 불과한 반면 스테판 커리는 지금까지 2344개를 기록했다. 一 팀 마신 1967년 초 뉴스위크 표지인물로 올랐을 때 카림 압둘-자바는 루 알신도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2학년생이자 곧 미국농구기자협회(USBWA) 올해의 대학 선수에 선정되는 그는 216㎝의 신장에도 ‘놀라운 힘과 기동성’으로 슈팅 성공률이 무려 67%에 달했다. 1969년 밀워키 벅스에 입단해(연봉 25만 달러) 1975년 레이커스로 이적한 그는 1989년 NBA에서 은퇴했다. 여전히 통산 최고득점자로 남아 있다.
알신도어가 등장했을 당시 농구 팀들은 흑인과 백인 선수가 거의 반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보스턴 셀틱스의 빌 러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윌트 챔벌레인, 신시내티 로얄스의 오스카 로버트슨 등 최고의 스타들이 흑인 선수였다. 보스턴 셀틱스는 1965~1966 시즌 최초로 스타팅 멤버 5명을 모두 흑인 선수로 내보냈다. 9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뒤 러셀을 NBA의 첫 흑인 코치로 앉혔다. 그는 “우리는 백인을 거북하게 만들고 계속 불편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알신도어는 1969년 이슬람으로 개종해 1971년 무슬림 이름으로 바꿨다. 그러나 다음 뉴스위크의 1967년 프로필 기사 발췌문을 보면 그는 PR 활동과 잡담을 경멸해 팬들과 언론을 당황하게 만드는 무뚝뚝한 인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4년간 학교 대표선수로 활약하면서 2067점을 올렸고 그의 팀은 1패만 기록하는 등 기록을 갈아치우는 농구 신동으로 떠올랐다. UCLA 재학 중에 이미 언론에 둘러싸여 가장 주목 받은 NBA 유망주가 됐다. 이 기사가 실릴 무렵 알신도어는 묘기 농구단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에서 제시한 100만 달러의 종신 계약을 걷어찼다. 그는 “난 학업에 더 관심이 많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코트 안팎에서 사회정의와 평등에 대한 압둘-자바의 평생에 걸친 헌신의 시작뿐 아니라 주류 잡지와 스포츠에 생색 내는 듯한 인종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도 엿볼 수 있다. 흑인 운동선수들을 난관에 봉착하게 만드는 사고방식이다.
一 메리 케이 실링 뉴스위크 기자
뉴욕의 할렘 북쪽 디크먼 주택개발지구에서 외둥이로 성장한 알신도어는 공부할 때 자신만의 습관이 있었다. 재즈 아티스트 텔로니어스 멍크, 존 콜트레인, 찰스 밍거스, 마일스 데이비스의 위안을 주는 음악을 틀어놓는다. 알신도어의 모친은 “(UCLA에서) 음반을 틀기 시작하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방으로 몰려들었다”며 아들의 입장을 변호했다. “그러나 우리 애는 마음을 안정시켜 공부하려 했을 뿐이다. 침울하거나 외톨이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나 알신도어는 올해 캠퍼스 밖의 아파트에서 룸 셰어링을 시도한 뒤 결국 웨스트우드의 개인 주택으로 이주했다. 집에서 4000여㎞ 떨어진 곳에서 지내는 여느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그도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그는 뉴욕의 한 친구에게 “UCLA 캠퍼스를 타임스 스퀘어로 그냥 옮겨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리고 진지한 성격의 알신도어가 햇볕 따가운 캘리포니아 남부에 갖는 환멸이 커져간다. 그는 “캘리포니아주는 다른 지역 사람을 대상으로 게임을 한다”고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여기에는 마치 TV에 출연한 듯 연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분명 그들이 인위적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알신도어 자신도 요즘 많은 시간을 스폿라이트를 받으며 지낸다. 그는 갈수록 강렬해지는 조명에 대해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 변덕스럽고 종종 멍청한 대중에게 갈수록 많이 노출된다고 여긴다. 19세의 그는 진부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법을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 낯선 사람이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며 “키가 얼마냐”(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위쪽 날씨는 어떠냐?”(분명 이 질문을 5000번은 받았을 것이다)고 물으면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다. 한번은 뉴욕시에서 한 중년 여성이 자기 집 안마당의 기이한 털북숭이 동물 다루듯 우산으로 그를 쿡쿡 찔러댔다. 이번 시즌에는 또 다른 여성이 시애틀의 한 모텔 로비에서 그에게 몰래 다가가 “헤이!” 하고 소리치고는 깜짝 놀란 그 10대 청소년의 얼굴에 대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알신도어는 “여기 사람들은 내가 침울하고 사람을 멀리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뉴스위크의 존 레이크 스포츠 기자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그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환경은 진부한 잡담이나 우산으로 찌르기가 아니다. 대다수 흑인이 생활 속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매일 직면하는 인권 평등의 부정, 미묘한 할당제, 조건부 수용이다. 사람들은 216㎝의 알신도어를 항상 빤히 쳐다본다. UCLA 캠퍼스에서 아시아인이나 흑인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만 예외다(“그들은 키에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의 인간으로 나를 대한다”). 알신도어는 그런 시선들을 의식한다. 그러나 알신도어가 가끔 백인 여자와 함께 걸어가면 쳐다본다기보다 노려보는 눈길이 많다고 한 친구는 전한다. 알신도어는 “그런 데서 이질감이 생기는 것 같다”고 추측한다. “공평하지 않다. 몽고메리에도, 일리노이주 시세로에도, 롱아일랜드 그레이트 넥에도,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도 사방에 남부(인종차별)가 존재한다.”
알신도어는 얼마 전 어느 날 저녁 웨스트우드의 한 식당에서 자신과 몇몇 흑인 친구들이 계산서에 이의를 제기했을 때 경찰관이 거칠게 개입한 것도 “남부식 정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경찰은 당연히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단정했다”며 알신도어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일상대화에서 고상한 단어들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그의 어휘에는 “게슈타포(독일 나치 정권의 정치경찰) 방식”이나 “게토(유대인 거주지역)” 같은 어구도 포함된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알신도어는 역사학 전공자다) 농구 코트 밖의 삶에 눈이 뜨이면서 적개심과 인종적 긍지로 불타오른다. 아직은 ‘블랙 파워’를 공개적으로 옹호하지 않지만 미식축구의 지미 브라운, 농구의 빌 러셀, 복싱의 캐시어스 (무하마드 알리) 클레이와 많은 공통점을 발견한다. 먼저 스포츠 슈퍼스타로 입지를 굳힌 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역할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 선배 흑인들이다.
알신도어는 4개월 전 할리우드 레스토랑 앞에서 처음 만난 클레이를 환하게 미소 짓게 했다. 그는 헤비급 복싱 챔피언을 향해 “쌀람 알라이쿰(당신에게 평화를)”이라고 인사말을 했다. 무슬림인 클레이는 깜짝 놀라 “알라이쿰 알 쌀람(당신에게도 평화가)”라고 화답한 뒤 역할을 바꿔 거인 대학 농구선수에 맞서 주먹을 쥐어 보이며 조크를 던졌다. “자네하고는 붙고 싶지 않네. 나보다 리치가 길어.”
클레이는 알신도어의 지적인 ‘리치’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을지 모른다. 알신도어는 코란을 탐독 중이며 ‘말콤 X 자서전’을 지금껏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말한다. 또한 할렘의 커피숍에서 만난 극작가이자 수필가 르로이 존스의 반(反) 백인감정도 타당하다고 여긴다. 껌을 씹으며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농구 신동의 불안한 마음 속에는 UCLA 폴리 파빌리온 체육관의 대다수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생각이 많이 담겨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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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르브론 제임스가 2010년대의 농구를 규정짓게 될 듯하다. 1990년 대 마이클 조던, 1970년대 카림 압둘-자바가 그랬듯이 말이다. 종합 득점에서는 아직 아무도 카림 압둘-자바를 넘어서지 못했지만 한때 관객이 2000~3000명 대에 불과하던 투박한 농구가 미식축구의 뒤를 이어 많은 이목이 집중되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대형 스포츠로 어떻게 진화했는지 알려면 선수 연봉과 3점 슛의 부상만봐도 충분하다(3점 슛은 1979년 공식 채택됐으며 그때까지는 모든 골이 2점으로 계산됐다). 압둘-자바의 선수 경력 중 기록한 3점 슛은 한 개에 불과한 반면 스테판 커리는 지금까지 2344개를 기록했다. 一 팀 마신
농구 전설 알신도어의 대학 시절 | 1967년 뉴스위크 기사는 농구의 전설이 되기 전 청년 카림 압둘-자바를 어떻게 소개했나
알신도어가 등장했을 당시 농구 팀들은 흑인과 백인 선수가 거의 반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보스턴 셀틱스의 빌 러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윌트 챔벌레인, 신시내티 로얄스의 오스카 로버트슨 등 최고의 스타들이 흑인 선수였다. 보스턴 셀틱스는 1965~1966 시즌 최초로 스타팅 멤버 5명을 모두 흑인 선수로 내보냈다. 9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뒤 러셀을 NBA의 첫 흑인 코치로 앉혔다. 그는 “우리는 백인을 거북하게 만들고 계속 불편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알신도어는 1969년 이슬람으로 개종해 1971년 무슬림 이름으로 바꿨다. 그러나 다음 뉴스위크의 1967년 프로필 기사 발췌문을 보면 그는 PR 활동과 잡담을 경멸해 팬들과 언론을 당황하게 만드는 무뚝뚝한 인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4년간 학교 대표선수로 활약하면서 2067점을 올렸고 그의 팀은 1패만 기록하는 등 기록을 갈아치우는 농구 신동으로 떠올랐다. UCLA 재학 중에 이미 언론에 둘러싸여 가장 주목 받은 NBA 유망주가 됐다. 이 기사가 실릴 무렵 알신도어는 묘기 농구단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에서 제시한 100만 달러의 종신 계약을 걷어찼다. 그는 “난 학업에 더 관심이 많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코트 안팎에서 사회정의와 평등에 대한 압둘-자바의 평생에 걸친 헌신의 시작뿐 아니라 주류 잡지와 스포츠에 생색 내는 듯한 인종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도 엿볼 수 있다. 흑인 운동선수들을 난관에 봉착하게 만드는 사고방식이다.
一 메리 케이 실링 뉴스위크 기자
뉴욕의 할렘 북쪽 디크먼 주택개발지구에서 외둥이로 성장한 알신도어는 공부할 때 자신만의 습관이 있었다. 재즈 아티스트 텔로니어스 멍크, 존 콜트레인, 찰스 밍거스, 마일스 데이비스의 위안을 주는 음악을 틀어놓는다. 알신도어의 모친은 “(UCLA에서) 음반을 틀기 시작하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방으로 몰려들었다”며 아들의 입장을 변호했다. “그러나 우리 애는 마음을 안정시켜 공부하려 했을 뿐이다. 침울하거나 외톨이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나 알신도어는 올해 캠퍼스 밖의 아파트에서 룸 셰어링을 시도한 뒤 결국 웨스트우드의 개인 주택으로 이주했다. 집에서 4000여㎞ 떨어진 곳에서 지내는 여느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그도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그는 뉴욕의 한 친구에게 “UCLA 캠퍼스를 타임스 스퀘어로 그냥 옮겨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리고 진지한 성격의 알신도어가 햇볕 따가운 캘리포니아 남부에 갖는 환멸이 커져간다. 그는 “캘리포니아주는 다른 지역 사람을 대상으로 게임을 한다”고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여기에는 마치 TV에 출연한 듯 연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분명 그들이 인위적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알신도어 자신도 요즘 많은 시간을 스폿라이트를 받으며 지낸다. 그는 갈수록 강렬해지는 조명에 대해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 변덕스럽고 종종 멍청한 대중에게 갈수록 많이 노출된다고 여긴다. 19세의 그는 진부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법을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 낯선 사람이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며 “키가 얼마냐”(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위쪽 날씨는 어떠냐?”(분명 이 질문을 5000번은 받았을 것이다)고 물으면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다. 한번은 뉴욕시에서 한 중년 여성이 자기 집 안마당의 기이한 털북숭이 동물 다루듯 우산으로 그를 쿡쿡 찔러댔다. 이번 시즌에는 또 다른 여성이 시애틀의 한 모텔 로비에서 그에게 몰래 다가가 “헤이!” 하고 소리치고는 깜짝 놀란 그 10대 청소년의 얼굴에 대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알신도어는 “여기 사람들은 내가 침울하고 사람을 멀리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뉴스위크의 존 레이크 스포츠 기자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그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환경은 진부한 잡담이나 우산으로 찌르기가 아니다. 대다수 흑인이 생활 속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매일 직면하는 인권 평등의 부정, 미묘한 할당제, 조건부 수용이다. 사람들은 216㎝의 알신도어를 항상 빤히 쳐다본다. UCLA 캠퍼스에서 아시아인이나 흑인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만 예외다(“그들은 키에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의 인간으로 나를 대한다”). 알신도어는 그런 시선들을 의식한다. 그러나 알신도어가 가끔 백인 여자와 함께 걸어가면 쳐다본다기보다 노려보는 눈길이 많다고 한 친구는 전한다. 알신도어는 “그런 데서 이질감이 생기는 것 같다”고 추측한다. “공평하지 않다. 몽고메리에도, 일리노이주 시세로에도, 롱아일랜드 그레이트 넥에도,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도 사방에 남부(인종차별)가 존재한다.”
알신도어는 얼마 전 어느 날 저녁 웨스트우드의 한 식당에서 자신과 몇몇 흑인 친구들이 계산서에 이의를 제기했을 때 경찰관이 거칠게 개입한 것도 “남부식 정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경찰은 당연히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단정했다”며 알신도어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일상대화에서 고상한 단어들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그의 어휘에는 “게슈타포(독일 나치 정권의 정치경찰) 방식”이나 “게토(유대인 거주지역)” 같은 어구도 포함된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알신도어는 역사학 전공자다) 농구 코트 밖의 삶에 눈이 뜨이면서 적개심과 인종적 긍지로 불타오른다. 아직은 ‘블랙 파워’를 공개적으로 옹호하지 않지만 미식축구의 지미 브라운, 농구의 빌 러셀, 복싱의 캐시어스 (무하마드 알리) 클레이와 많은 공통점을 발견한다. 먼저 스포츠 슈퍼스타로 입지를 굳힌 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역할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 선배 흑인들이다.
알신도어는 4개월 전 할리우드 레스토랑 앞에서 처음 만난 클레이를 환하게 미소 짓게 했다. 그는 헤비급 복싱 챔피언을 향해 “쌀람 알라이쿰(당신에게 평화를)”이라고 인사말을 했다. 무슬림인 클레이는 깜짝 놀라 “알라이쿰 알 쌀람(당신에게도 평화가)”라고 화답한 뒤 역할을 바꿔 거인 대학 농구선수에 맞서 주먹을 쥐어 보이며 조크를 던졌다. “자네하고는 붙고 싶지 않네. 나보다 리치가 길어.”
클레이는 알신도어의 지적인 ‘리치’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을지 모른다. 알신도어는 코란을 탐독 중이며 ‘말콤 X 자서전’을 지금껏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말한다. 또한 할렘의 커피숍에서 만난 극작가이자 수필가 르로이 존스의 반(反) 백인감정도 타당하다고 여긴다. 껌을 씹으며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농구 신동의 불안한 마음 속에는 UCLA 폴리 파빌리온 체육관의 대다수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생각이 많이 담겨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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