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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혁 다가오는 전력산업] 설비 강화-예비전력 비축 일변도에서 벗어나야

[대변혁 다가오는 전력산업] 설비 강화-예비전력 비축 일변도에서 벗어나야

예측 시스템과 운영 시스템 고도화 필요… “고품질 전기에 대한 인식 변화 절실”
한국전력거래소 전력수급 상황실에서 관계자들이 운영예비력이 400만kW 이하로 떨어져 ‘관심’ 단계로 내려간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다. 운영예비력은 2시간 이내에 공급할 수 있는 여유 전력(여름철·겨울철은 20분 이내)을 가리킨다. / 사진:연합뉴스
우리나라 전기 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우리나라 호당 정전시간(분/년)은 2016년 9.6분으로 독일의 15분(2012년)보다 낮으며, 설비 노후화가 문제인 미국(138분, 2012년)과 비교해 월등히 낮다. 전자제품 수명에 영향을 주는 규정 전압 유지율 역시 99.9% 수준으로 물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치에 근접해 있다. 이에 세계은행이 전기 공급 절차와 시간, 비용, 공급 신뢰도 등을 고려해 발표하는 전기 공급(Getting Electricity)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내며 세계 최고 수준을 구가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기 품질이 높은 이유는 국내 전력 구조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전력의 절반은 산업용으로 쓰이고 있다. 산업용 전기 수요가 크면 전기 공급 중단이 야기하는 손실 비용 역시 커져 전기 품질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가령 반도체 공장에 끊임없이 전기를 공급하는 일은 주로 잠잘 때만 집에 있는 1인 가정에 안정적인 전기를 공급하는 것과 그 가치가 다르다. 지난 해 3월 삼성전자 평택공장에서 발생한 40분의 정전 사고로 삼성이 입은 손실은 500억원에 달했다. 가정용 전기 공급이 40분 중단되는 것으로는 발생할 수 없는 손실이다.
 산업용 전력 수요 많아 고비용 구조 굳어져
우리나라 전력 수요 비중은 가정용·상업용·산업용 각각 15:30:50 정도로 산업용 비중이 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전기 수요 비중이 대체로 30(가정용):30(상업용):30(산업용) 수준인 것과 대조된다.

문제는 비용이다. 고품질을 지향하면 지향할수록 더 많은 자본을 투입해야 한다. 전력 품질 비용은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물리적으로 보이는 장치 즉, 설비에 관련된 비용이다. 전력선로 보강, 안전 보강, 발전 다중성(redundancy) 강화를 위해 필요한 설비를 구축하는 일에는 모두 돈이 든다. 두 번째는 간접 비용, 즉 전기 공급 운영을 위해 추가되는 비용이다. 전기 공급 운영을 위해선 많은 예비력(예비전력)을 준비해 언제든 투입 가능하게 대기해야 한다. 또 발전, 송전, 배전에 여유 용량을 남겨두고 전력 거래를 진행해야 유사시 대비가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도 상당하다. 결국 우리나라는 돈을 들어 전력 품질을 높여왔다.

특히 국내 전력산업은 고품질 전기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예측 시스템과 운영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노력보다 공급 용량을 확대하고 예비전력을 더 많이 확보하는 방향을 고수하는 게 대표적이다. 2011년 발생한 정전과 후속 대처를 보면 우리나라 전력 산업이 고품질을 위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쏟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지난 2011년 9월 15일 대정전 직전까지 가는 위기일발의 순간이 있었다. 오후 3시 11분부터 7시 56분까지 4시간 45분 동안 전국에서 시차를 두고 순환 정전이 발생했다. 사거리 교통 신호등이 꺼지고 수산시장, 대형마트, 편의점의 냉장고가 꺼졌다. 승강기가 멈춰 서고 병원 응급실의 응급치료 장치의 작동이 멈추기도 했다. 사전에 준비, 대기해야 했었던 비상발전기 다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피해가 더 커지기도 했다. 정부 당국이 사고 신고를 기반으로 추산한 정전 피해 비용은 620억원이라 발표했지만 실제 피해 비용은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순환정전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원인은 수요 예측 실패였다. 추석 연후 직후, 예상하지 못한 늦더위로 냉방 수요가 급증했다. 예측 기온은 28도 수준으로 최대전력수요를 64GW로 봤지만 실제로는 기온이 33도까지 이르면서 67.2GW의 최대전력수요가 발생했다. 또 다른 원인은 미진한 전력설비 관리체계였다. 관계 당국에서는 전력 공급 능력을 70.7GW라고 판단했지만 실제로는 2시간 이내로 가동이 불가능한 발전기 출력 오차를 고려하지 못해 3.2GW의 발전 공급 능력 오차가 발생했다. 당일 오전 10시 30분, 전력거래소는 이미 예측 실패로 발생한 잠재적 정전의 가능성을 감지했고, 활용 가능한 예비전력까지 거의 소진한 오후 3시경 대정전을 피하기 위해 전국 13개 지역 급전소를 통해 순차적으로 전기 공급을 중단하는 단전을 실시했다.
 수요 예측 실패로 ‘9·15 순환정전’ 사고 겪어
사실 100% 완벽한 시스템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예측은 말 그대로 미래 상황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추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 고온으로 수요 예측 실패가 발생했으나 대정전을 피하기 위한 노력은 인정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 한 전문가는 “상공에 있는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 수동으로 비상착륙을 했는데 일부가 다치고 비행기가 고장 났지만 전체 생명을 구한 적절한 조치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9·15 순환정전’ 사고 이후, 지식경제부 장관이 사임을 표명하고 한국전력의 사장과 전력거래소 이사장이 옷을 벗었다. 관련 부서 책임자와 실무자도 모두 징계를 받았다.

징계 이후 우리나라의 대응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는 순환정전의 원인이 된 수요 예측 실패와 전력설비 관리체계 개선에는 나서지 않았다. 대신 공급용량을 확대하고 예비전력을 더 많이 확보하는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9·15 순환정전 사고 이후 가장 빠른 응답 특성을 지니는 값비싼 주파수 조정예비력의 최소 용량은 1000MW에서 1500MW로 증가했다. 동·하계 전력 수급대책 기간에는 20분 안에 작동하는 대기·대체 예비력을 평소 1000MW에서 1500MW 이상으로 그 기준을 올렸다. 또 전력 수급대책 기간에는 비상시 빠르게 활용 가능한 전체 7개 양수발전소의 상부 댐을 만수위로 유지하고 있다. 특히 2011년 23GW였던 석탄발전소 발전량은 2018년 34.8GW를 넘어섰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 안정적인 발전 수단으로 꼽히는 석탄 발전 설비를 대거 허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경제성에 대한 고려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원인에 대한 처방도 틀렸다. 수요 예측 실패와 전력설비 관리체계 미비로 발생한 순환정전을 막기 위해선 예측 시스템과 운영 시스템을 고도화해야 하지만, 재차 용량을 늘렸다.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2017년 12월 정부가 재생에너지 ‘3020이행 계획’을 발표하면서, 2016년 7%인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2030년까지 20%로 높이겠다는 목표를 밝혔다는 데 있다. 독일, 일본, 미국, 호주, 중국 등 주요 선행 국가가 앞장서는 재생에너지 확장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야심 차게 동참하겠다는 선언이지만, 우리나라는 재생가능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능력이 거의 없다. 위기에 언제나 고비용 투자로 대응해왔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을 15.1GW에서 2030년 63.8GW로 확대하고 신규 설비 95% 이상을 태양광, 풍력 등 청정에너지로 공급하겠다는 목표만 제시한 상태다.

공급 안정성이 높은 기존 화석연료나 원자력 발전설비와 다르게 재생에너지는 태양과 바람이라는 자연 특성에 따라 변동한다. 즉, 재생가능에너지는 공급 안정성이 낮다. 재생에너지 보급이 확대될수록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라는 운영기술 문제는 더욱 중요해진다. 우리나라는 대정전 문턱까지 가는 사고를 겪었지만 전력계통 운영정보는 여전히 공개하지 않고 있다. 특히 운영기술 고도화보다는 여유 전력의 충분한 확보라는 비효율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간헐적이고 불확실한 재생에너지가 확장될수록, 설치용량의 중요성보다는 불확실성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실시간 운영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사물인터넷과 초연결, 그리고 인공지능(AI)은 과거와 완전히 다른 운영 능력 고도화를 지원하지만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사전 준비도 없다.

이제는 수요도 전력산업에서 제어 가능한 자원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를 수요반응(Demand Response)이라고 하는데, 전력 수급 상황에 따라 빠르게 수요를 변화시켜 전체 시스템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일정 규모 이상의 수요 자원만 제한적인 상황에서 활용되는 수준이지만 다양한 종류, 규모의 전력 수요 자원이 정보통신기술(ICT) 덕에 집단적·개별적으로 경제적 유익과 전력 수급 상황에 따라 활발하게 활용될 전망이다. 과거 중앙집권적인 제어 체계에서 대형 발전기 수십개를 제어해서 전력품질을 유지했다면 앞으로는 수천, 수만개로 분산된 에너지원을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작동시켜 전체 효율성과 안정성을 확보하는 방식이 보편화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과거부터 지금까지 고수해온 ‘대형 발전기 건설’과 ‘여유 용량의 유지’는 더 이상 적합한 방식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고품질 전기 필요한 곳에만 관련 설비 구축해야
소비자 역시 ‘고품질’ 전기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앞으로는 ‘고품질 전기’가 필요한 곳에서 전력저장장치, 재생에너지 등을 스스로 구축하는 마이크로 그리드(Micro Grid)가 확산될 것이다. 중앙집중화된 전력시스템으로 모두에게 고품질 전기를 제공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반도체 공장, 군부대, 응급시설 등 특별히 고품질 전기가 필요한 곳에 차별적으로 관련 설비를 구축하는 형태가 서서히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처럼 전기를 만들고, 사용하는 방식은 과거의 것이 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다수가 변화의 바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전력산업의 대변혁은 우리 앞에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이제 생각의 틀을 바꿀 시간이 왔다.

- 김선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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