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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경의 알고 싶은 것들의 결말(6) 인플레이션 시대의 종언?] 뉴노멀 시대 누워버린 필립스 곡선

[조원경의 알고 싶은 것들의 결말(6) 인플레이션 시대의 종언?] 뉴노멀 시대 누워버린 필립스 곡선

각국이 돈 풀어도 물가 낮고 실업률도 안정적… 수요 자극 위한 적절한 임금 인상 필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제롬 파월(오른쪽) 미 연준 의장. / 사진:연합뉴스
미국 증시는 신고가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한국·인도네시아·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고 주요국 증시는 10~30%대로 올랐다. 주요국 시장의 장기 채권 역시 플러스 수익률을 기록했다. 국내 증시도 저조한 성장률 가운데서도 미중 무역분쟁의 1차 협상 타결과 영국 보수당의 총선 압승 후 안정을 찾고 있다. 정부의 강력한 규제에도 서울을 중심으로 부동산시장은 강세를 이어갔다. 넘치는 유동성이 원동력이다. 이렇게 유동성이 넘치고 고용 사정도 유례 없이 좋은 데도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물가는 그다지 높지 않다. 지난해 4분기 이후 물가안정으로 세계 중앙은행들이 비둘기파적으로 변했고, 그런 기대감이 자산시장 강세 요인으로 작용했다.

에드먼드 펠프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연구했다.
취임 초기만 해도 서슬퍼렇던 파월 미 연준 의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갈등을 빚으면서도, 내년 금리 인하는 없을 것이라며 경기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증시를 달아오르게 만들어야 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금리를 계속 내리라고 압박할지 모를 일이다. 그 배경에는 미국의 고용 호조에도 물가 압력이 크지 않은 현실이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통상적으로 유동성이 풍부하면 물가상승 압력이 커야 한다. 이쯤에서 자신의 이론이 먹히지 않아 좌절해 버릴 경제학자 빌 필립스를 불러보자.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 애컬로프는 거시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이 필립스 곡선이라고 강조했다. 뉴질랜드 출신 경제학자 필립스가 제시한 이 그래프는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이 마이너스의 상관관계임을 제시한 것이다. 이 곡선은 실업률이 떨어지면 물가가 오르고, 실업률이 높아지면 물가가 하락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빌 필립스가 울고갈 현상?
사실 실업과 인플레이션은 정부나 국민에게 고통거리다. 국민 생활 고통지수는 미저리 지수(Misery Index)라고 한다. 이는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을 합한 것으로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적 어려움을 계량화해서 수치로 나타낸 것이다. 물가상승률이 6%이고 실업률이 7%이라면 국민고통지수는 13%이다.

필립스 곡선의 탄생으로 각국 정부는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을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실업률이 너무 높으면 세금 감면이나 소비 촉진, 이자율 인하 같은 확장 정책을 구사하고, 인플레이션이 심각할 때는 세금을 인상하고 지출을 줄이며, 이자율을 높이는 수요 줄이기 정책에 나선 것이다. 1960년대까지 각광받던 필립스의 이론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여러 지역에서 실업률 증가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으로 이론적 문제점이 지적됐다. 종전의 필립스 곡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수요의 관리를 통한 해법은 유효하지 않게 된다. 물가와 실업률이 모두 높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상황을 개선하면 다른 쪽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이 경우 공급 충격을 상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생산기술의 발달로 생산비용이 줄어 재화의 가격을 낮출 수 있다. 가격이 하락하면 시장 수요가 늘어 경기가 차츰 활발해진다. 경기가 회복 국면에 들어서면 기업의 투자가 늘어 일자리가 늘어난다. 그래서 생산기술의 발달이 스태그플레이션의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이는 필립스 커브를 좌측으로 옮겨 더 낮은 물가 상승률과 더 낮은 실업률의 상황이 도래하게 한다.

벤 버냉키 전 미 연준 의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 미국 고용시장이 개선 조짐을 보일 때까지 ‘사실상 무기한’ 매달 400억 달러 규모의 주택담보증권(MBS)을 사들이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어쩌면 빌 필립스가 제공한 필립스 곡선의 문제의식에 연유한 것이리라. 벤 버냉키의 주장과 반대로 실업문제를 변형된 통화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고, 실업의 문제는 임금의 문제라는 주장이 대두됐다. 실업률은 노동 시장에서 임금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지 중앙은행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주장이다. 아울러 실업률과 물가 사이에 안정적인 함수관계가 있다고 본 빌 필립스의 주장은 최근 통계를 보면 무색해지게 됐다.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실업률 간의 음(-)의 관계를 보여주는 필립스 곡선이 위기 이전 10년간은 비교적 안정적인 음(-)의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위기 이후에는 양상이 달라져 보인다. 연준이 양적완화 정책을 통해 위기 극복과 경기 회복을 동시에 이루었음에도 물가상승 압력은 크지 않았다. 물가와 실업률과의 반비례 관계가 부정되는 사례다. 이런 사례는 또 있었다. 1991년 이후 113개월간의 장기 호황을 설명하기 위해 비즈니스위크는 신경제(New Economy)란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 1990년대 인플레이션 없이 장기 호황을 누린 미국의 경제 모델에 붙인 이름이다. 당시 컴퓨터 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생산성이 계속 증가하면서 임금상승률보다 생산성 증가율이 높아졌다. 인플레이션 없는 지속성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나라마다 상이한 여건과 수요 요인으로 필립스 곡선의 기울기가 다르기도 하고 공급 조건이 달라지면 필립스 곡선 자체가 움직이기도 한다. 예컨대 2000년대 들어 한국의 경우 자본집약적 수출의존도가 확대됐다. 세계화와 경제 개방의 진전도 있었다. 그래서 국내 수요 요인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게 됐다. 그 결과 성장률과 물가 간의 탄성치 하락 속도가 빨라져서 필립스 곡선의 기울기가 완만해졌다. 경제 성장으로 수요가 늘어도 물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작아지고 있다는 주장이 그래서 가능하다. 성장에서 수출의존도가 높아지는 데다 정보통신기술 등 자본집약적 산업 위주로 수출이 이뤄지다 보니 성장 확대가 고용 증대, 임금 상승, 기업 비용 증가, 제품 가격 인상으로 연결되는 고리가 약해졌다. 성장이 이뤄지면 고용이 늘고, 이에 따라 임금이 올라 기업 입장에선 비용 증가로 이윤을 맞추기 위해 가격을 올렸으나 성장이 되도 고용이 이뤄지지 않으니 가격을 올릴 요인도 크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세계 경제의 공급 측 요인, 즉 곡물이나 원자재 가격 상승이 각국의 물가상승률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여하튼 온라인 경제의 발달과 세계화로 필립스 곡선은 점점 더 눕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먹히지 않는 필립스 곡선
최근 우리나라 고용시장은 고용률만 놓고 보면 상당히 호조이다. 고용률은 23년 만에 최고를, 실업률은 6년 만에 최저를 각각 기록했다. 정상적인 필립스 곡선과 반대되는 현상이 발생해 빌 필립스를 무안하게 만들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 증감률이 4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물가에 수출 가격 하락이 겹쳤기 때문이다. 소비자물가와 달리 GDP디플레이터에는 국내에서 생산한 수출품이 들어간다. GDP디플레이터는 명목 GDP를 실질 GDP로 나눈 값이다. GDP를 구성하는 투자, 소비, 수출입 등 경제 전체의 물가수준을 반영해 ‘GDP 물가’로도 불린다. 소비자물가가 가계 지출 비중이 큰 460개 품목에 가중치를 붙여 산출하는 반면 ‘GDP 물가’는 모든 물가 요인을 포괄하는 종합 지표여서 체감경기와 밀접하다. 거시경제 진단 때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3분기 수출 디플레이터는 전년 동기 대비 -6.7%를 기록했다. 이는 3년 전인 2016년 3분기 이후 가장 큰 낙폭이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제조업 물가도 같은 기간 7.4% 떨어졌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2분기(-11.9%) 이후 최대 낙폭이다. 중국 등 다른 나라와 경쟁이 심해지면서 우리의 수출 주력 제품 경쟁력이 약해져 제값을 받기 어려워진 게 수출 물가 하락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추세는 좀 더 이어질 전망으로 갑작스러운 GDP 디플레이터의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혹자는 경기 침체 속에서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디플레이션 공포가 도래하는 것은 아닌지 문제를 제기한다. 디플레이션은 ‘앞으로 물건 값이 더 싸질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생각에 기반을 두어 소비심리를 더욱 악화시킬지 두려움이 앞선다. 신용평가사 S&P는 2020년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위협 요인 중 하나는 디플레이션이라고 경고했다. S&P는 우리나라의 경기가 바닥을 지난 것 같지만 수퍼 예산편성에 따른 재정지출 확대에도 경제성장률과 물가는 낮은 수준에 머물고, 금리는 더 내려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S&P는 글로벌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한국의 물가상승률이 아주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투자도 부진한 만큼 디플레이션 경고음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디플레이션 상황에 맞서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얼마까지 낮출 수 있을까? S&P는 한국은행이 통화완화 효과를 내려면 정책금리를 더 낮춰야 하는 상황에 몰려 있다며, 한두 차례 더 기준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이 크다고 관측했다. 물가상승 압력이 크지 않음을 제기한 대목이다. 이 와중에 미중 무역 분쟁 1차 협상이 타결된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일본에서부터 미국과 유럽에 이르기까지 인플레이션 압력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일본은행, 미 연준, 유럽중앙은행을 비롯한 대표 중앙은행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중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풀었는데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기묘한 일이다. 일본의 실업률이 26년 이래 가장 낮고, 미국의 실업률도 근 50년 만에 가장 낮은 데도 임금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게 세계 경제의 만성적인 수요 부족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세계는 수요 진작을 위해 지금의 상황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나타난 세계적인 경기 반등이 약화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미국, 일본, 유럽에서 취한 대규모 양적완화 조치는 경제를 살리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전반적 소득은 살아나지 못했다. 일본은행은 1999년 이후 기준금리를 제로 부근으로 유지해왔다. 가끔은 그 아래로 내리기도 했다. 다시 성장이 시작되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2년 일련의 개혁 조치에 착수했지만, 일본 노동자들의 임금은 인플레이션과 마찬가지로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각국 정부가 수요 진작의 책임을 중앙은행에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경쟁력과 생산성 제고에 필요한 수급 상황의 개선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일본이 구조적 개혁보다 통화 부양책에 의존했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선 선순환적 리플레이션(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 심한 인플레이션까지는 이르지 않은 상태) 주기를 일으킬 수 있게 임금을 올려줄 용기를 내지 못했다. 미국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연준의 공격적 금리 인하나 1조5000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감세 조치 어느 것도 국민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 모두 ‘낙수 경제’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차 입증해주고 있다. 이제 통화정책이나 재정 정책만으로 경제 성장을 제고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세계는 인식해야 한다.
 에드먼드 펠프스의 필립스 곡선 반론
노벨경제상을 탄 에드먼드 펠프스는 글로벌 경제의 구조적인 역학관계를 종합적으로 보고 진단하는 방법을 사용한 학자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2006년 그의 노벨상 수상과 관련해 거시경제 정책의 장기와 단기 효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넓힌 공로를 인정했다. 그는 완전고용과 물가안정 그리고 경제성장 사이의 상호 충돌을 해결하는 데 언제나 어려움을 겪어왔다며 도대체 어떻게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연구했다.

펠프스는 필립스 곡선을 부정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필립스 곡선 이론에 ‘물가상승 기대심리’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물가는 실업률과 함께 물가상승 기대심리에 영향을 받으며 장기적으로 실업률은 물가가 아닌 노동시장의 기능에 따라 좌우된다고 보았다. 통화정책의 효과는 단기적일 뿐이고 고용주에 대한 보조금 등 임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재정정책으로 중산층을 육성하는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펠프스는 저임금 노동자를 위한 차별화된 고용 보조금 제도가 빈곤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빈곤이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의 원천이 되고 있다면서 취약계층에서 벌어지는 빈곤의 악순환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저임금 근로자에 대한 보조금이나 세금 혜택을 제시한 것이다.

세계 주요국이 양적완화를 실시했음에도 소득은 크게 늘지 않고 자산시장의 양극화만 조장했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에드먼드 펠프스의 인본적 시장경제를 생각하면 어떨까? 그는 완전한 자유방임 상태의 시장경제는 취약계층에게 야수와도 같은 위험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정부가 고용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산업에 대한 진입장벽을 파격적으로 낮출 것을 주문했다. 그는 정부가 각종 규제와 예외로 만들어진 진입장벽을 쌓아올려 유명 기업을 도와왔다고 평가하며 거대 기업들이 포진한 산업군에서 새로운 산업은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고 역설했다.

인터넷의 발달은 유통단계를 축소시켜 물가를 하락시킨다. 한국은행은 2013년 이후 우리나라 물가상승률이 세계화에 따른 국가별 분업이나 전자상거래 확산 같은 세계적인 요인에 이전보다 더 큰 영향을 받는 것으로 분석했다. 한국은행의 ‘글로벌 요인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례없는 완화적 통화정책 대응에도 주요국 인플레이션은 장기간 물가목표를 하회하며 하향 동조화 현상을 보였다. 세계적인 저인플레이션 지속 현상은 글로벌 공급망 확충, 온라인 거래 확산 같은 구조적 요인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영향이 확대됐을 가능성이 있다. 한은이 물가상승률에서 경기순환적 요인과 불규칙 요인을 제거한 ‘추세 인플레이션’을 구해본 결과, 우리나라는 2001~2008년 사이 2.5%였는데 2011~2018년은 1.7%로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21개국 평균치는 같은 기간 2.0%에서 1.4%로 하락했다. 동 보고서는 “글로벌 요인이 개별 국가의 추세 인플레이션에 미친 영향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소규모 국가에서 비교적 큰 것으로 나타났다”며 “글로벌 요인의 영향은 대외 연계성이 높을수록 더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2013년 3분기 이후 우리나라에 대한 글로벌 추세 인플레이션 영향력은 더 커졌다. 2001년 2분기~2013년 2분기 양측의 상관계수는 0.5였지만 2001년 2분기~2019년 1분기 상관계수는 0.91까지 높아졌다. 세계 공장의 역할을 한 중국을 보자. 세계 제조업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8%에서 2018년 25%로 확대됐고, 미국, 일본, 독일, 영국 등 기존 선진공업국의 비중은 축소됐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그 이유는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하여 노동집약적 상품을 세계에 대규모로 공급했다는 점에만 있지 않다. 개혁개방 정책 실시 이후, 외국인 투자자들은 13억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앞다퉈 중국으로 진출했다. 그 결과 선진국 기업들의 제품 다수가 중국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제조업 상품들이 브랜드만 선진국 기업일 뿐 실상은 ‘Made in China’였다. 이제 그 공급망이 더 싼 베트남 등으로 이동하고 있고 4차 산업혁명의 발달로 선진국에서도 더 싸게 공급할 기반이 마련됐다.

지금의 저물가 부분이 우려스럽게 느껴지긴 한다. 하지만 경제학적으로 논의하는 디플레이션과는 아직 괴리가 있을 수 있다. 당장 디플레이션이 올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인플레이션의 시대는 여러 요인에 의해 종말을 고하고 있을 수 있다. 이쯤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디플레이션은 수요 부진에서 온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한 포용적 성장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물가 하락이 기술 발전과 세계화에 따른 공급적인 측면에서 더 문제가 많아 보인다면 그건 꼭 위협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현 단계에서 친노동적 정책으로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이 가능한지 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처방은 각국의 사정에 따라 다르게, 다양하게 추진될 수 있다. 소비수요를 충분히 자극시키기 위해서는 임금 인상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계화 시대에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손상시키지 않아야 하는 문제와 양립이 가능해야 한다.
 수요 요인과 공급 요인의 혼재
적정한 임금 인상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인 타임(In Time)]은 시간은 곧 화폐인 세상을 묘사했다. 세상에서 지폐와 동전이 모두 사라지고 시간만이 돈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일해서 시간을 벌고, 번 시간으로 소비를 한다. 주어진 시간을 모두 다 쓰고 잔여시간이 제로(0)가 되는 순간 누구나 심장마비로 죽는다. 이런 세상에서 시간이 별로 없는 사람은 결국 가난한 사람이다. 주인공 윌 살라스는 48시간 이상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는 가난뱅이였다. 어느 날 그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있던 부자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 100년이란 시간을 받게 된다. 너무 기뻐 꽃을 사들고 어머니의 귀가를 기다리지만 그날 어머니는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버스비가 갑자기 1시간에서 2시간으로 오른 탓에 생명줄인 시간이 바닥나 버렸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아득한 옛날 같지만, 금융위기 직후에도 우리는 그걸 겪었다. 인플레이션보다 더 두려운 게 디플레이션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영화 [인 타임]에서 어머니를 잃은 살라스는 무작정 한 대형 시간은행의 은행장을 찾아가 협박하며 금고 안에 있던 100만년을 시중에 유통시키라고 절규한다. 그러자 은행장은 그렇게 되면 시스템이 파괴되고 다음 세대 삶의 균형까지 무너진다고 말한다. 인플레이션의 위험성을 말하는 영화와 달리 현실은 유동성을 엄청나게 살포하는 데도 물가가 오르지 않은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필립스 곡선은 그래서 부침이 많은 주제가 되고 있다.

※ 필자는 국제경제 전문가로 현재 기획재정부 국장(국립외교원 파견)이다. 대한민국 OECD 정책센터 조세본부장, 대외경제협력관, 국제금융심의관 등을 지냈다. 저서로 [한 권으로 읽는 디지털 혁명 4.0]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 [나를 사랑하는 시간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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