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과 대립하는 트럼프 속내] “돈 많이 주는데 왜 내 말 안 들어”
[유엔과 대립하는 트럼프 속내] “돈 많이 주는데 왜 내 말 안 들어”
코로나19로 WHO와 앙숙 된 미국… 계산기 먼저 두드리는 사고방식 드러내 ‘미국 제일주의’를 앞세워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급기야 코로나19 팬데믹(전 세계적인 범유행) 와중에 글로벌 보건의료 담당 유엔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에 대한 자금 지원 중단을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4월 14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WHO의 그릇된 대응으로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며 이 기구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미국의 자금 지원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는 이날 WHO에 대한 평가 작업에 60∼90일이 걸릴 것으로 말했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WHO에 대한 미국의 자금 공급이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과 치열하게 싸워야 할 시기다.
트럼프는 “WHO가 기본적 의무 이행에 실패했으며 그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국이 중국인 입국금지를 취하자 WHO가 이를 비난했던 조치는 생명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입장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WHO가 현장에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의료 전문가들을 중국에 보내 제대로 일을 하고 중국의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제대로 했다면 사망자를 아주 작은 규모로 줄이고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을 것”이라며 “전 세계적인 경제 피해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WHO가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중국에 편향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WHO의 돈줄을 끊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코로나19 확산의 책임이 미국이나 유럽국가가 아니라 중국과 중국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온 WHO에 있다고 선언한 셈이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미국은 WHO에 매년 4억∼5억 달러를 지원했는데 중국은 약 4000만 달러만 낸다”는 말도 했다. 미국이 유엔기구에 대한 지원을 주고받기의 비즈니스로 생각하는 트럼프의 생각을 드러냈다.
로이터 통신은 미국이 실제로 WHO에 대한 최대 기여국이라고 보도했다. 2017~2018년 미국의 WHO 분담금은 4억 달러 이상인 반면 중국의 분담금은 4400만 달러로 그 10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올해를 기준으로 하면 미국이 WHO에 부담하는 돈은 트럼프가 언급한 것보다 더 많다. WHO의 2018∼2019년도 예산 자료에 따르면 미국 기여금은 8억9300만 달러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다. 이 가운데 의무 분담금은 2억3691만 달러이며, 의무 분담률도 전체 기여국 가운데 가장 높은 22%에 이른다. 트럼프는 미국이 WHO에 엄청난 돈을 내고 있는데, 미국과의 무역에서 엄청난 흑자를 보고 있는 중국은 적은 액수만 기여한다는 불만을 내놓고 한 셈이다. 결국 트럼프가 취임 이래 앞세워왔던 ‘미국 제일주의’를 얼토당토않게 코로나19 상황에서 WHO에 적용한 것이나 진배 없다. 트럼프는 취임 뒤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하는 등 국제 협약이나 규범을 내놓고 무시해 왔다. 세계무역기구(WTO)도 미국 편을 들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해왔다. 유엔과 산하 기관에 대한 미국의 자금 지원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보여왔다. 특히 군사동맹인 나토 회원국에도 방위비를 예산의 2% 이상으로 늘리라는 압박을 가해왔다. WHO에도 같은 인식을 드러낸 셈이다.
트럼프는 코로나19 확산의 책임론을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WHO를 희생양으로 삼은 게 아니냐 하는 의심도 받을 수 있다. 11월 재선을 위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내에서 코로나 19가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사망자가 늘자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여론을 피하려고 WHO를 제물로 삼고 있다는 지적이다. 트럼프는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코로나는 독감 정도” “미국은 세계에서 전염병에 가장 잘 대응한다”라며 큰 소리를 친 적도 있어 자칫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책임론을 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로선 최악의 시나리오다.
트럼프는 앞서 7일 코로나19 태스크포스(TF) 브리핑에서 자금 지원 보류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트럼프는 “WHO는 아주 중국 중심적인 것 같다”며 “무엇을 위해 돈을 내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8일 WHO의 테오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은 “바이러스를 정치화하지 말라”며 “그렇게 하면 시체 박스를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시체 박스를 언급한 그의 말실수가 트럼프의 결정을 이끌었을 가능성도 커 보인다.
트럼프의 조치에 대한 미국 내외의 반응은 한마디로 트럼프에 ‘적대적’일 정도다. CNN과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조치가 자신에게 쏠린 코로나19 부실 대응 책임론을 WHO에 전가하려고 시도한다고 비난했다. 미국의사연합(AMA)도 성명을 발표해 “팬데믹과의 싸움에선 국제 협력과 과학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며 “WHO 자금지원 삭감은 위태로운 상황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위험한 조치”라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전격 발표에 WHO는 즉각 유감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트럼프의 발표가 나온 다음날인 15일 WHO 사무총장은 스위스 제네바의 WHO 본부에서 화상 언론 브리핑을 열고 “유감스럽다”면서도 “미국은 WHO에 오랫동안 후한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란다”라고 유화 제스처를 보였다. 유엔의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물론 사재를 털어 국제백신개발 사업을 펼쳐온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도 “위험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트럼프의 조치에 대해 중국은 이 조치가 “방역 능력이 취약한 국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미국에 WHO에 대한 의무를 다할 것을 촉구했다. 러시아는 “코로나19의 책임을 중국에 씌우려 한 것은 무례한 일”이라며 미국에 대해 “이기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럽연합(EU)과 독일·프랑스도 “바이러스엔 국경이 없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트럼프로선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셈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유엔과 산하 국제기구에 얼마나 많은 자금을 지원해왔을까? 미국외교협회지(CFR)의 4월 2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2017년 모두 100억 달러를 유엔과 각 산하기구의 예산과 경비로 지원했다. 사실상 미국은 유엔의 자금줄인 셈이다.
미국이 지원하는 금액 순으로 상위권 조직을 정리하면 식량 원조를 통해 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 발전을 돕는 세계식량계획(WFP)이 25억1066만 달러로 가장 많고 유엔군을 파견해 평화유지 작전을 펴는 유엔평화유지작전국(DPKO)이 22억3999만 달러로 그 다음이다. 분쟁·기아 등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보호하고 돕는 위해 유엔난민기구(UNHCR)에 14억4236만 달러를,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인도주의 개발원조를 하기 위한 유엔아동기금(UNICEF)에 8억2778만 달러를 각각 지원한다. 미국으로선 식량·평화유지·난민·아동의 4대 아이템이 ‘돈 먹는 하마’인 셈이다.
효율이 떨어지는 거대 관료기구라는 평가를 받는 유엔본부에도 7억3895만 달러, 보건의료 전문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에는 5억1119만 달러의 자금을 각각 공여했다. WHO는 미국이 지원하는 유엔기구 중에서 액수로는 6위에 해당한다. 자금 지원 규모는 기구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글로벌 사회는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전염병 재앙을 당하고 있다. WHO에 필요한 자금을 늘리면서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촉구할 때이지 자금줄을 끊어 활동을 얼어붙게 할 때가 아니다.
국내실향민·난민·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이주자들의 이동을 논의하고 편의 제공을 담당하는 국제이주기구(IOM)에 4억9130만 달러를, 유엔난민기구가 맡지 않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구호를 담당하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사업기구(UNRWA)에 3억6426만 달러를 각각 지원했다. 원자력의 평화적이고 안전한 이용을 추구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운영에는 1억9857만 달러의 미국 자금이 들어간다. 인류 공영이라는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유엔과 산하조직은 미국의 거대한 자금 지원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물론 유엔과 산하기구들은 회원국이 납부하는 분담금으로 운영되는 게 원칙이다. 경제 규모가 크고 유엔본부를 자국의 뉴욕에 유치한 미국이 영향력을 고려해 많이 내는 셈이다. 일부 유엔 조직은 미국에 대한 의존율이 유난히 높다.
전체 예산에서 미국의 지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부서는 30%를 넘는 곳도 있다. HIV에이즈의 글로벌 감염 대책을 담당하는 유엔에이즈합동계획(UNAIDS)은 전체 예산의 34.1%가 미국 지원금이다. 세계식량계획이 미국으로부터 지원받는 25억1066만 달러는 전체 예산의 32.8%를 차지한다.
미국 지원이 예산의 20%대를 차지하는 기구로는 유엔난민기구가 27.6%,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27.5%, 유엔평화유지작전국이 26.1%,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사업기구가 24.3%, 국제이주기구가 24.1%를 각각 차지한다.
약물 규제와 마약 범죄 예방이 목적인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가 전체 예산의 16.4%, 노동문제를 다루는 전문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가 14.7%, 식량과 영양을 담당하는 식량농업기구(FAO)가 14.3%, 유엔본부가 13%, 세계보건기구가 12.8%를 각각 미국의 지원에 의존했다.
미국은 이렇게 유엔과 국제기구를 알뜰하게 지원해왔지만 자신들의 뜻을 거스를 경우 단호하게 조치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7년 10월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탈퇴 선언이다. 발단은 유네스코가 2011년 팔레스타인을 정회원국으로 받아들인 사건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 중인 이스라엘이 펄쩍 뛰었고 미국은 이스라엘 편을 들었다.
미국 PBS 방송에 따르면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연 6억 달러로 유네스코 예산의 22%에 이르던 미국 분담금을 연 8000만 달러로 대폭 축소했다. 미국이 이렇게 반발했지만 유네스코는 2016년 동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와 이슬람 공동성지 관리 문제에서 팔레스타인 편을 드는 등 미국·이스라엘과 수시로 충돌했다. 오바마는 분담금 축소로 대응했지만 2017년 1월 취임한 트럼프는 더욱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2017년 7월에는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 구시가지 유적을 이스라엘이 아닌 팔레스타인의 유산으로 등재하자 트럼프 행정부는 대응 수위를 높였다. 2017년 10월 트럼프 행정부의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유네스코의 반이스라엘 성향에 항의하기 위해 탈퇴를 결정했다고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보도했다.
미국은 탈퇴를 압박했지만 유네스코가 자세를 바꾸지 않자 행동에 나섰다. 결국 미국은 2019년 1월 1일 이스라엘과 함께 유네스코에서 공식 탈퇴했다. 탈퇴 직전인 2017년 미국은 유네스코 전체 예산의 8%를 부담했다고 미국외교협회(CFR)는 보도했다.
미국은 냉전 시대인 1980년대에도 유네스코가 친사회주의, 친진보, 친소련의 입장에서 이념적 편향성을 보인다고 주장하며 탈퇴했다. 결국 2003년 재가입했지만 이번에는 이스라엘 정책을 둘러싼 불만 때문에 다시 유네스코에서 발을 뗐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유네스코에서 WHO로, 이유가 친소련에서 친중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유네스코 탈퇴 당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트럼프의 재선과도 관련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의 글로벌 확산 속에서 WHO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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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WHO가 기본적 의무 이행에 실패했으며 그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국이 중국인 입국금지를 취하자 WHO가 이를 비난했던 조치는 생명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입장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WHO가 현장에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의료 전문가들을 중국에 보내 제대로 일을 하고 중국의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제대로 했다면 사망자를 아주 작은 규모로 줄이고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을 것”이라며 “전 세계적인 경제 피해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WHO가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중국에 편향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WHO의 돈줄을 끊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코로나19 확산의 책임이 미국이나 유럽국가가 아니라 중국과 중국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온 WHO에 있다고 선언한 셈이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미국은 WHO에 매년 4억∼5억 달러를 지원했는데 중국은 약 4000만 달러만 낸다”는 말도 했다. 미국이 유엔기구에 대한 지원을 주고받기의 비즈니스로 생각하는 트럼프의 생각을 드러냈다.
로이터 통신은 미국이 실제로 WHO에 대한 최대 기여국이라고 보도했다. 2017~2018년 미국의 WHO 분담금은 4억 달러 이상인 반면 중국의 분담금은 4400만 달러로 그 10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올해를 기준으로 하면 미국이 WHO에 부담하는 돈은 트럼프가 언급한 것보다 더 많다. WHO의 2018∼2019년도 예산 자료에 따르면 미국 기여금은 8억9300만 달러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다. 이 가운데 의무 분담금은 2억3691만 달러이며, 의무 분담률도 전체 기여국 가운데 가장 높은 22%에 이른다.
표심 의식한 트럼프 WHO에 책임 전가
트럼프는 코로나19 확산의 책임론을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WHO를 희생양으로 삼은 게 아니냐 하는 의심도 받을 수 있다. 11월 재선을 위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내에서 코로나 19가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사망자가 늘자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여론을 피하려고 WHO를 제물로 삼고 있다는 지적이다. 트럼프는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코로나는 독감 정도” “미국은 세계에서 전염병에 가장 잘 대응한다”라며 큰 소리를 친 적도 있어 자칫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책임론을 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로선 최악의 시나리오다.
트럼프는 앞서 7일 코로나19 태스크포스(TF) 브리핑에서 자금 지원 보류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트럼프는 “WHO는 아주 중국 중심적인 것 같다”며 “무엇을 위해 돈을 내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8일 WHO의 테오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은 “바이러스를 정치화하지 말라”며 “그렇게 하면 시체 박스를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시체 박스를 언급한 그의 말실수가 트럼프의 결정을 이끌었을 가능성도 커 보인다.
트럼프의 조치에 대한 미국 내외의 반응은 한마디로 트럼프에 ‘적대적’일 정도다. CNN과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조치가 자신에게 쏠린 코로나19 부실 대응 책임론을 WHO에 전가하려고 시도한다고 비난했다. 미국의사연합(AMA)도 성명을 발표해 “팬데믹과의 싸움에선 국제 협력과 과학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며 “WHO 자금지원 삭감은 위태로운 상황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위험한 조치”라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전격 발표에 WHO는 즉각 유감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트럼프의 발표가 나온 다음날인 15일 WHO 사무총장은 스위스 제네바의 WHO 본부에서 화상 언론 브리핑을 열고 “유감스럽다”면서도 “미국은 WHO에 오랫동안 후한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란다”라고 유화 제스처를 보였다. 유엔의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물론 사재를 털어 국제백신개발 사업을 펼쳐온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도 “위험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유엔 자금줄 끊은 미국에 세계여론 비난 화살
그렇다면 미국은 유엔과 산하 국제기구에 얼마나 많은 자금을 지원해왔을까? 미국외교협회지(CFR)의 4월 2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2017년 모두 100억 달러를 유엔과 각 산하기구의 예산과 경비로 지원했다. 사실상 미국은 유엔의 자금줄인 셈이다.
미국이 지원하는 금액 순으로 상위권 조직을 정리하면 식량 원조를 통해 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 발전을 돕는 세계식량계획(WFP)이 25억1066만 달러로 가장 많고 유엔군을 파견해 평화유지 작전을 펴는 유엔평화유지작전국(DPKO)이 22억3999만 달러로 그 다음이다. 분쟁·기아 등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보호하고 돕는 위해 유엔난민기구(UNHCR)에 14억4236만 달러를,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인도주의 개발원조를 하기 위한 유엔아동기금(UNICEF)에 8억2778만 달러를 각각 지원한다. 미국으로선 식량·평화유지·난민·아동의 4대 아이템이 ‘돈 먹는 하마’인 셈이다.
효율이 떨어지는 거대 관료기구라는 평가를 받는 유엔본부에도 7억3895만 달러, 보건의료 전문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에는 5억1119만 달러의 자금을 각각 공여했다. WHO는 미국이 지원하는 유엔기구 중에서 액수로는 6위에 해당한다. 자금 지원 규모는 기구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글로벌 사회는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전염병 재앙을 당하고 있다. WHO에 필요한 자금을 늘리면서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촉구할 때이지 자금줄을 끊어 활동을 얼어붙게 할 때가 아니다.
국내실향민·난민·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이주자들의 이동을 논의하고 편의 제공을 담당하는 국제이주기구(IOM)에 4억9130만 달러를, 유엔난민기구가 맡지 않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구호를 담당하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사업기구(UNRWA)에 3억6426만 달러를 각각 지원했다. 원자력의 평화적이고 안전한 이용을 추구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운영에는 1억9857만 달러의 미국 자금이 들어간다. 인류 공영이라는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유엔과 산하조직은 미국의 거대한 자금 지원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미국 지원금에 의존하는 유엔 기구들
전체 예산에서 미국의 지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부서는 30%를 넘는 곳도 있다. HIV에이즈의 글로벌 감염 대책을 담당하는 유엔에이즈합동계획(UNAIDS)은 전체 예산의 34.1%가 미국 지원금이다. 세계식량계획이 미국으로부터 지원받는 25억1066만 달러는 전체 예산의 32.8%를 차지한다.
미국 지원이 예산의 20%대를 차지하는 기구로는 유엔난민기구가 27.6%,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27.5%, 유엔평화유지작전국이 26.1%,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사업기구가 24.3%, 국제이주기구가 24.1%를 각각 차지한다.
약물 규제와 마약 범죄 예방이 목적인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가 전체 예산의 16.4%, 노동문제를 다루는 전문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가 14.7%, 식량과 영양을 담당하는 식량농업기구(FAO)가 14.3%, 유엔본부가 13%, 세계보건기구가 12.8%를 각각 미국의 지원에 의존했다.
미국은 이렇게 유엔과 국제기구를 알뜰하게 지원해왔지만 자신들의 뜻을 거스를 경우 단호하게 조치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7년 10월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탈퇴 선언이다. 발단은 유네스코가 2011년 팔레스타인을 정회원국으로 받아들인 사건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 중인 이스라엘이 펄쩍 뛰었고 미국은 이스라엘 편을 들었다.
미국 PBS 방송에 따르면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연 6억 달러로 유네스코 예산의 22%에 이르던 미국 분담금을 연 8000만 달러로 대폭 축소했다. 미국이 이렇게 반발했지만 유네스코는 2016년 동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와 이슬람 공동성지 관리 문제에서 팔레스타인 편을 드는 등 미국·이스라엘과 수시로 충돌했다.
국제 쟁점 때마다 이스라엘 편들며 유엔과 충돌
미국은 탈퇴를 압박했지만 유네스코가 자세를 바꾸지 않자 행동에 나섰다. 결국 미국은 2019년 1월 1일 이스라엘과 함께 유네스코에서 공식 탈퇴했다. 탈퇴 직전인 2017년 미국은 유네스코 전체 예산의 8%를 부담했다고 미국외교협회(CFR)는 보도했다.
미국은 냉전 시대인 1980년대에도 유네스코가 친사회주의, 친진보, 친소련의 입장에서 이념적 편향성을 보인다고 주장하며 탈퇴했다. 결국 2003년 재가입했지만 이번에는 이스라엘 정책을 둘러싼 불만 때문에 다시 유네스코에서 발을 뗐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유네스코에서 WHO로, 이유가 친소련에서 친중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유네스코 탈퇴 당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트럼프의 재선과도 관련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의 글로벌 확산 속에서 WHO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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