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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뉴딜' 몸 단 정부, 공공기관은 지지부진

대기 줄만 9개월, 공공데이터 사업은 여전히 아날로그?
의료데이터 신청 1년새 27.6% 늘었는데…제공 건수는 되레 감소

데이터 공개를 통해 신규 일자리(2022년까지 20만7000개)를 창출하고 새로운 산업을 만들겠다는 게 정부의 계획인데, 공공기관이 “데이터 공개 자체가 조심스럽다”고 주장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6월 디지털 뉴딜 행사장에서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에게서 관련 브리핑을 듣고 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2년. 약학과 A교수가 연구에 필요한 의료 데이터를 모두 얻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A교수가 만성질환 관련 연구에 발을 내디딘 건 2017년. 국내 한 제약사와 3년 연구계약을 맺고 야심 차게 시작했지만, 5년차를 맞는 지금도 뚜렷한 결과물을 내지 못했다. 그새 인건비 등 연구비용도 만만치 않게 불어났는데, A교수 연구실이 이를 감당해야 했다.  
 
A교수가 5년 동안 결과물을 내지 못한 이유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관련 데이터를 제때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A교수의 연구는 대상자만 수백만명의 5년치 대규모 데이터가 필요했다. 이를 국민 건강 데이터를 다루는 공공기관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에 요청했는데, 심평원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가령 “필요한 데이터 크기를 2㎇(기가바이트) 이하로 줄여서 다시 신청하라”는 식이다. 데이터를 보관·전송하는 심평원 내부 서버에 한계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A교수는 “심평원이 요구한 데이터 크기에 맞춰 연구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했다”며 “그렇게 설계를 완료해 다시 요청서를 내더라도 심평원 내부에서 데이터 제공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이 기간만 3개월”이라고 한탄했다.    
 

오프라인 센터 방문해야 데이터 열람

 
그렇다고 A교수의 사례가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공공기관으로부터 건강 관련 데이터를 얻느라 연구 기간을 소모하는 의·약학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공공 의료데이터를 열람하는 데 보통 9개월가량 걸린다”고 입을 모은다. 데이터가 ‘21세기의 원유’로 꼽히는 만큼 의료 관련 데이터 수요는 늘어나지만, 이를 공급하는 공공기관이 민첩하게 대처하질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연구자들이 정부로부터 의료 데이터를 얻는 프로세스를 보자. 먼저 연구자가 국민건강보험공단(진료·건강검진 정보)이나 심평원(청구내역·의약품처방 정보)에 계획서를 제출한다. 이를 공공데이터 제공 심의위원회가 검토하고, 개인정보는 익명으로 처리하고 필요한 데이터만 추출한 뒤에 연구자들에게 제공한다. 
 
얼핏 간단한 과정처럼 보이지만, 데이터 제공 건수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지난해 데이터 제공 건수는 874건으로, 2019년(912건)보다 되레 줄었다. 데이터 신청 건수는 2019년 1225건에서 2020년 1562건으로 27.6%나 늘었는데도 그랬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부로부터 데이터 제공의 허가를 얻더라도, 연구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전국 11군데 빅데이터 분석센터)이나 심평원(사전 지정한 컴퓨터 240개 계정)을 직접 방문해야만 데이터를 열람할 수 있다. 데이터를 통째로 외부로 들고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공단·심평원 내부 PC에서 데이터를 분석한 뒤에 얻는 간단한 결과표만 반출할 수 있다.
 
이런 공급 시스템은 연구자들을 곤란한 상황에 빠뜨린다.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든 논문을 해외저널에 투고했는데, 저널 심사위원으로부터 논문의 수정을 요구받으면 당장 보완할 도리가 없다. 기초가 되는 데이터가 국민건강보험공단·심평원에만 있기 때문이다. A 교수는 “2005년 황우석 전 교수의 논문 조작 사건에서 보듯, 데이터의 투명성이 논문의 생명”이라며 “현재 방법으론 저널 심사를 통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공공기관의 소극적인 데이터 공개가 의료연구의 질을 끌어내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현장의 혼란상은 지난해 7월 정부가 발표한 디지털 뉴딜의 청사진과도 괴리가 있다. 정부는 의료·금융 등 산업 각 분야 데이터를 수집하고 활용 범위를 넓히겠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해 1월 국회는 개인정보보호법·신용정보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으로 이뤄진 ‘데이터3법’을 본회의 통과시키면서 보조를 맞췄다.
 
특히 3법 중 모법(母法) 격인 개인정보보호법에선 개인을 특정할 수 없도록 처리한 가명 정보를 본인 동의 없이 ‘통계 작성, 과학적 연구, 공익적 기록보존’ 등에 활용할 수 있게 했다. 해당 법에 따르면 민간투자 연구도 과학적 연구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사실상 공공데이터를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줬다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내년까지 일자리 20만개 만든다는데…

 
공공기관도 이런 정부 기조에 호응하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오는 6월부터 신약의 효능과 안전성을 평가할 때 국민건강보험과 심평원의 데이터를 쓸 수 있도록 했다. 기존에는 신약을 내놓는 제약사에서 직접 임상실험 하듯 투약 환자를 모집해서 조사해야 했다. 환자 한 명을 모집하고 관찰하는 데 드는 비용이 30만원으로, 이런 케이스를 많게는 3000건 확보해야 하는 까닭에 제약사의 부담이 적잖았다.  
 
그러나 비용 절감 효과에도 지난해 제약사의 데이터 신청 건수는 미미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밝힌 해당 건수는 10건가량. 공단 관계자는 “업계에서 아직 활용 방안을 못 찾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업계 주장은 달랐다.  
 
의료데이터 플랫폼 구축에 적극 관여한 제약사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제약사가 데이터를 요청하는 경우 여전히 공개되는 범위가 제한적이다. 의약품 상표는 가린 채 성분명만 제공하는 식이다. 상품명을 공개하면 타 제약사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다시 말해 데이터의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이런 사정 때문에 제약사가 학계 연구자에게 사업비를 지원하고 간접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하는 ‘스폰서 연구’ 관행이 여전히 만연하다”고 덧붙였다.  
 
물론 “공공기관이 데이터를 전면 개방한다고 해서 데이터 사업이 순항을 하는 건 아니다”는 반론도 설득력은 있다. 금융업계가 그 사례다. 신용데이터 정책을 총괄하는 금융위원회(이하 금융위)는 지난해 9월 개인의 온라인쇼핑 주문내역 정보까지 공개 범위 내에 묶었다가 홍역을 치렀다. 금융위 말대로라면, 개인이 구매한 옷의 브랜드는 물론, 사이즈와 색상까지 금융위의 허가를 받은 사업자(마이데이터 사업자)가 열람할 수 있었다. 이런 입장에 산업적·상업적 활용이란 명분으로 개인정보를 과도하게 수집한다는 반발이 전자상거래 업체 등 산업계 내부에서부터 나왔다. 국가인권위원회까지 나서 주문내역 열람을 ‘사생활 침해’로 규정하면서 금융위는 한 발짝 물러섰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관계자 역시 데이터 공개를 주저하는 이유로 개인정보 보호를 말했다. 예컨대 가명정보 처리를 하더라도 희귀 난치성 질환자는 나이·거주지 등 몇 가지 정보만으로 특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정보 보호 이슈는 의료업계 역시 앞으로 해결해야 할 이슈일 뿐이다. 데이터 공개를 통해 신규 일자리(2022년까지 20만7000개)를 창출하고 새로운 산업을 만들겠다는 게 정부의 계획인데, 공공기관이 “데이터 공개 자체가 조심스럽다”고 주장하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정부의 목표는 ‘데이터 강국’으로 거듭나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꾀하겠다는 것인데, 이런 복잡한 실타래를 풀지 못하면 결국 말뿐인 사업이 된다는 지적이다.
 
문상덕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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