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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스테이지] 윤석화의 ‘자화상I’-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연극 소멸의 시대에 다시 '소극장'에 서다
‘윤석화 아카이브 프로젝트’…‘자화상’ 3부작의 첫 편(11월 21일까지) 진행
‘하나를 위한 이중주’, ‘목소리’, ‘딸에게 보내는 편지’ 중 클라이맥스들로 90분

 
 
연극 '자화상' [사진 산울림소극장]
 
“연극이란 뭘까요?” “대답되어질 수 없는 질문을 세상에 던지는 것이죠.”  
 
5년 전, 데뷔 40주년을 맞은 연극인 윤석화와 나눴던 대화 한토막이다. ‘대답되어질 수 없는 질문’이라…. 멋진 말이었지만, ‘질문’이란 것이 너무 거대해 실체가 잡히지 않았다. 그럼 윤석화의 연극은 대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단 말인가.
 
당시만 해도 연극은 비교적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여기저기서 대형 신작 소식이 끊이지 않았고, 해외 유명 극단과 교류도 활발했고, 소극장 생태계도 나름대로 돌아갔으며, 원로급들도 건재했다.
 
그런데 5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미투’, ‘블랙리스트’ 등 각종 사태를 거치며 연극을 둘러싼 물리적, 사회적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팬데믹 여파로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디지털 미디어 세상에서 연극의 설자리는 어디까지 옹색해질까. 요즘은 연극에서조차 연극이 사라지고 배우가 사라진 세상을 그리곤 한다.
 
이런 시국에 윤석화가 다시 산울림 소극장 무대에 섰다. 자신의 연극 인생을 돌아보는 ‘윤석화 아카이브 프로젝트’라는 타이틀로 기획한 ‘자화상’ 3부작의 첫 편(11월 21일까지)으로, 88년작 ‘하나를 위한 이중주’, 89년작 ‘목소리’, 92년작 ‘딸에게 보내는 편지’ 중 클라이맥스들만 발췌해 90분짜리 공연으로 만들었다. ‘연극인 윤석화’의 초석을 놓았던 산울림 소극장에서 만든 대표작들을 엮어 30여년 전 바로 그 자리에 돌아와 ‘연극의 이름으로’ 버티고 선 것이다.  
 
‘연극계 대부’로 불리는 연출가 임영웅이 1985년 세운 산울림소극장은 당시로선 드물게 여성들의 다양한 서사를 풀어내는데 주력했고, 윤석화는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산울림 황금기를 이끈 주역이었다. 갤러리에 전시된 당시의 공연현장 사진 속, ‘연극 전성시대’에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열기가 새삼스럽다.  
 
연극 '자화상' [사진 산울림소극장]
 
스크린 뒤에서 수어 무브먼트와 함께 ‘나는 배우입니다’로 시작되는 긴 독백을 읊조리며 막을 여는 무대는 자꾸만 멀어져가는 연극에 대한 윤석화의 지독한 짝사랑 고백과도 같다.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 바이올리니스트가 음악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의 고통을 호소하는 ‘하나를 위한 이중주’, 전화기 너머로 떠나가는 연인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붙잡으려 애쓰는 ‘목소리’, 이제 막 가슴에 멍울이 잡히기 시작한 열두살 딸에게 편지를 쓰는 척 자신의 젊고 예뻤던 시절에 미련 철철 넘치는 작별을 고하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세 작품 다 무언가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 앞에 선 여인의 내면을 비춘다. 그것이 음악이든, 연인이든, 젊음이든.  
 
사전 인터뷰 영상에서 ‘하나를 위한 이중주’ 초연 당시를 회상하며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파니에게 목숨과도 같은 음악이 자신에게는 연극으로 와 닿았다는 고백처럼, 윤석화의 ‘자화상’이 붙잡고 싶은 건 연극일 터다. 하지만 의문은 여기서 생긴다. 손바닥 안의 기기로 전세계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미디어 세상에서, 연극배우는 왜 연극을 할까.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윤석화가 70석짜리 소극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홀로 노래하고 춤추며 매일같이 90분짜리 자화상을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리고 또 그리는 이유는, ‘나는 배우입니다’라는 첫마디에 담겨 있었다. 한 사람의 배우를 위한 무대가 만들어진다는 것. 60대 노년에 꽃다운 시절에 나에게 바쳐진 무대로 돌아가 다시 그 순간을 살 수 있다는 것. 오직 연극배우에게만 허락되는 호사 아닌가. 그런 배우를 가진 관객도 호사이긴 하다.
 
연극 '자화상' [사진 산울림소극장]
 
세상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듯 한 윤석화만의 아우라 가득한 무대, 그 미련 철철 넘치는 짝사랑 고백을 뒤로 하며 문득 이런 노랫말이 떠올랐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윤도현 ‘가을 우체국 앞에서’) 2021년의 깊어가는 가을, 아름다운 산울림소극장에서 연극인 윤석화가 던진 ‘대답되어질 수 없는 질문’이다. 연극이 멀어져 갈수록, 그 질문은 더 또렷해진다.
 
 

유주현 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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