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보다 ‘일하는 방식·보상체계 혁신’ 방안 필요” [임무송의 시사논평]
주 69시간 프레임에 걸린 '근로시간 개편안'
엇갈린 노사 반응...경제단체 '환영' vs 노총 '반발'
[임무송 인하대 초빙교수·일자리연대 운영위원장]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이 ‘주 69시간’ 프레임이라는 암초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4월 17일로 입법예고가 종료됐지만 후속 입법절차 대신 여론조사를 진행하는 것도 전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 바로잡을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는 초기에 쓴맛을 본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지금 필요한 것은 패착을 분석하는 복기의 시간이다. “아플수록 눈을 부릅떠서 실패를 보고, 필요하다면 적의 아이디어도 배워야 한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중)
정부의 개편안은 연장근로를 ‘1주 12시간’만 인정하는 제한을 풀어서 월 52시간, 분기 140시간, 반기 250시간, 연 440시간 내에서 노사 합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휴게시간 등을 제외한 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69시간까지 될 수 있으나, 단위 기간이 길어질수록 연장근로 총량을 줄이고, 근로일 간 11시간 연속휴식, 4주 평균 64시간 이내 근로 등 건강 보호 장치를 두고, 보상휴가제를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로 확대‧개편해 시간은 유연하게 쓰고 일하는 날은 줄이는 내용을 담았다.
'주 69시간 프레임' 근로시간 개편안, 노사 반응 엇갈려
노사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경제단체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반면, 양 노총은 주 69시간 근무제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이른바 ‘MZ세대 노조’도 공짜야근 척결을 요구하며 반대하자 입법 절차가 중단됐다. 급기야 정부의 법치 드라이브로 수세에 몰렸던 노동계는 최저임금, 7월 총파업 등 투쟁 전선을 확대하며 공세로 전환했다. 노동 개혁이 길을 잃었다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정부가 제시한 근로시간 개편안이 연장근로 규제 완화에만 초점을 맞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지난 2018년 2월 여야합작으로 통과시킨 주 52시간 규제법이 초래한 노동자 소득감소와 중소기업 경영난 해소가 시급한 과제인 것은 분명하나, 근로시간 단축 의지가 드러나지 않고 장시간 근로 체제 회귀로 왜곡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
실태 파악과 이해관계자 의견수렴 등 과정 관리도 치밀하지 못했고, 정부가 전문가를 내세워 개편안을 만드는 과정은 노사를 무시하는 엘리트 권위주의를 연상시켰다. 청년층 반발이 나온 뒤 전개된 대화와 설득은 입법예고 전에 이뤄져야 했다. 팀플레이도 미흡해 주요 당국자들이 내놓은 메시지의 혼란은 과연 개혁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했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개혁열차 운전자들에게 개혁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헌신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韓, 실근로시간 OECD 최상위권...노동생산성은 최하위권
근로시간 개편이 멈추자 노동개혁이 흔들린다. 난국을 타개할 묘책이 보이지 않으니, 복기의 시간이 길어질 듯하다. 주변을 돌아보면 일본은 이미 2018년에 ‘일하는 방식 개혁 입법’을 단행했다. 반면 우리는 산업화 시대의 프레임 싸움을 하고 있다. 1주 단위 연장근로 제한, 국제 기준(25%)보다 2배 높은 할증임금, 강력한 형사처벌 등 삼중 규제를 취하고 있음에도 실근로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상위권이고 노동생산성은 최하위권인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근로시간을 억지로 찍어누르면 온갖 편법이 난무하고, 생산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시간 단축은 고용축소와 소득감소를 가져올 뿐이다.
월, 분기, 연 단위 연장근로를 도입하고 노사에 선택권을 주는 것은 효율성 제고 차원에서도 필요하며, 보편적인 외국의 예시에 비춰보아도 옳다. 다만, 시간 단축 흐름이 역류하지 않도록 주당 연장근로에 상한을 두는 방안과 유연근로를 활성화하는 방안의 장단점을 살펴서 합리적인 조합을 만들어야 한다. 사무직 등에 대해선 시간 관리를 강화해 포괄임금제 악용을 막고, 시간 규제가 적합하지 않은 고임금 전문직은 미국, 일본과 같이 계약자치에 맡겨야 한다.
비효율적인 장시간근로를 탈피해 고성과 작업장 체제로 전환하려면 단지 근로시간제도를 일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과 보상체계를 혁신해야 한다. 적은 인력이 장시간 비효율적으로 일하면서 연장근로수당 부담을 줄이려고 통상임금체계를 왜곡하는 불합리한 관행을 청산해야 한다. 효율적으로 일하고 제대로 쉬면서 성과를 공정하게 보상받는 작업장 혁신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시간제도와 문화를 바꾸려면 노사의 준비와 노력이 긴요하다.
“근로시간 강제 단축, 부작용만 남아”
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인류’에게 시간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시간이 ‘돈’과 직결되고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경쟁력’의 핵심이 됐지만, 날아간 화살이 돌아올 수 없듯이 시간은 불가역적이며 인간의 실존은 시간적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시간여행을 꿈꾸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신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최소한 자기 시간의 지배권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더욱 절실하다. 그렇다면 근로시간의 주인은 누구이며, 국가는 시간으로 표시되는 개인의 일할 권리를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 것인가.
국가가 사적 자치의 영역인 근로시간을 규제할 근거는 강제근로 금지와 건강 보호에서 찾을 수 있다. 총량 한도 내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방안의 설계와 운용은 노동관계 당사자의 ‘시간주권’에 속하는 것이며, 자치에 대한 국가의 직접 개입은 자제돼야 한다. 한편 불합리한 장시간 근로를 견제할 권한과 책임을 가진 존재가 바로 노동조합(노조)이고 무노조 사업장에 근로자대표제 강화가 추진되는 이유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흘러가지 않는다. 법만 고치면 근로시간은 줄이고 삶이 나아지는 마법이 가능할 것처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지만, 경제가 받쳐주지 않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소득감소 없이 일하는 시간을 줄이려면 생산성을 올려야 한다. 선심 쓰듯이 법으로 근로시간을 강제로 단축하는 것은 효과는 없고 부작용만 남는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근로시간 규제 과속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안긴 고통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제4차 산업혁명, 혁신의 해일이 몰려온다. 산업화 시대의 획일적 규제를 개혁하고 근로시간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 지금은 자치의 시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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