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외치고도 중복·분할 상장 발목
[밸류업 역행]②
밸류업 정책 역행하는 중복상장
대주주 프리미엄 대비 소외된 소액주주들…제도 개선 시급
[이코노미스트 정동진 기자]국내 기업들이 '밸류업(Value-Up)'을 외치면서도 물적분할 후 신규 상장을 강행하자 투자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기업들이 주주 가치 제고를 주장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주주 가치를 훼손하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몇년간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지주사의 핵심 계열사 분할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2023년 DB하이텍은 팹리스 사업부를 분할해 신설 법인 DB글로벌칩을 설립하며 물적분할을 강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주주 보호 조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논란을 빚었다. 지난해 두산그룹 역시 두산에너빌리티를 인적분할해 두산밥캣 지분을 보유한 투자회사를 신설하고 이를 두산로보틱스에 합병시키는 지배구조 개편을 시도했으나, 가격 산정 문제와 주주들의 강한 반발로 계획을 철회했다.
상장 예정인 대기업 계열사들…'밸류업 역행' 지적
최근 증권업계에서는 물적분할 후 상장까지 이어지는 ‘모자 중복상장’이 이뤄질 경우, 모회사 주식의 지분율이 희석돼 기존 주주들의 이익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 경우 당국이 추진하고 있는 밸류업 정책의 핵심인 주주가치 제고와 지속 가능한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 상장을 준비 중인 LG CNS와 DN솔루션즈, LS그룹 계열사들의 IPO들은 중복상장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알짜 사업부의 분리 상장은 결국 지주회사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액주주들은 기업들이 이러한 행보가 모회사의 가치를 희석시키고 기존 주주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한국거래소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밸류업 목표에 역행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물적분할 자체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물적분할은 1998년 기업 효율성을 높이고 외부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긍정적 의도로 도입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물적분할이 본래 취지와 달리 주주 가치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대표는 "대주주가 기업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보니 소액주주들의 권리가 차별받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며 "소액주주는 일종의 동업자에 가까운데, 이들을 무시하고 소모품처럼 여기는 풍조가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적분할 시행세칙 개정했지만…'면죄부' 역할?
금융당국은 물적분할로 인한 주주 보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2년 9월 상장규정 시행세칙을 개정했다. 개정안은 물적분할 기업이 5년 이내 상장을 추진할 경우, 모회사가 기존 주주와의 소통 등 보호 노력을 충실히 이행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규정은 5년이 지나면 주주 보호 장치를 마련하지 않아도 상장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면죄부 역할을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해 HD현대그룹은 HD현대마린솔루션 설립 후 주주 가치 제고 방안을 충분히 제시하지 않은 채 상장을 추진해 논란을 일으켰다.DB하이텍 역시 주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5년 내 상장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물적분할을 강행했다.
지난해 11월 IBK투자증권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시장의 중복상장 비율은 약 18%로 ▲일본(4.38%) ▲대만(3.18%) ▲미국(0.35%) 등과 비교했을 때 최소 4배가량 높다. 이는 해외 시장에서 주주가치를 보호하고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논의가 중요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김종영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리포트에서 "글로벌 스탠다드는 상장사가 중복상장을 제거해 주주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타 이머징 마켓인 대만, 중국과 비교하면 국내 중복상장 비율은 비정상적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해외 선진시장에서는 물적분할 대신 인적분할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데다, 소액주주들의 권리 보장에 힘쓰고 있다. 미국의 전자제품 회사 델(Dell)은 자회사 VM웨어를 상장한 뒤 주주들에게 1주당 0.44주의 자회사 주식을 지급하며 모회사의 지분 가치 하락 논란을 사전 차단했다. 제약회사 존슨앤존슨(Johnson & Johnson) 역시 지난 2023년 5월 켄뷰(Kenvue)를 분사하는 대신, 주주들에게 7% 할인된 가격에 자회사 주식을 구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일본 도쿄거래소 역시 유가증권 상장규정 제601조에서 '주주 권리의 내용과 행사에 부당하게 제한되는 경우 상장폐지를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물적분할로 인한 중복 상장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기업들이 중복 상장의 이유와 효과를 구체적으로 공시하도록 요구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상장 유지가 어렵다.
최근 금융위원회는 인적분할 시 자사주 활용을 제한하는 등 일부 개선책을 내놓고 있다. 또한 물적분할 관련 공시 기준을 강화하고, 물적분할 후 자회사를 상장하는 경우 모회사 일반주주(대주주 제외)에게 공모신주 중 20% 범위 내에서 우선배정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이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따라서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한 기업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정빈 신한투자증권 수석연구원은 "밸류업은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고 개선시키는 건데 복수 상장은 그걸 저해하는 요인"이라며 "이익을 복수 공시하게 될 경우 과대 계상을 야기할 수도 있고, 기업 가치도 중첩돼 할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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