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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ement | 함승민 기자의 ‘센터링 경제학’ ①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와 은둔 경영 - 세간의 관심 따돌리고 숨어서 지휘

Management | 함승민 기자의 ‘센터링 경제학’ ①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와 은둔 경영 - 세간의 관심 따돌리고 숨어서 지휘

2014 브라질 월드컵은 어떤 때보다 축구의 전술적 묘미가 빛난 대회였습니다. 아무래도 국가대표 간 실력 격차가 줄어들고 서로에 대한 정보가 많이 공개된 탓일 겁니다. 세계 각국의 축구 전술은 갈수록 세밀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전술적 측면에서 축구를 대하면 우리의 경제생활에 적용되는 여러 요소를 엿보게 됩니다. 리더십, 전략 수립, 위기 대응 등 경영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다양한 원리와 법칙을 이코노미스트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선사하는 그림 같은 센터링이 되길 바랍니다.
기존의 플레이메이커는 주로 스트라이커 바로 밑에 위치했다(왼쪽). 그러나 상대 수비형 미드필더(8·6번)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뒤로 물러난 딥라잉 플레이메이커가 탄생했다(오른쪽).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축구 선수가 올해 여름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박지성 선수 얘기다. 그는 현역 시절 많은 명장면을 남겼지만 특히 2010년 3월 열린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이하 맨유)와 AC밀란의 2009~2010 유럽 챔피언스리그 16강전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꼭 박지성의 팬이 아니더라도 이 경기는 세계 축구 전술사에 남을 명승부다. 바로 ‘박지성의 피를로 봉쇄’ 때문이다.

박지성은 공격형 미드필더다. 다만 같은 포지션의 다른 선두들에 비해 수비 능력이 좋고 활동량이 많은 조금은 독특한 공격형 미드필더이다.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도 이 점에 주목해 박지성을 주로 측면에 배치했다. 뒤에 위치한 동료 측면 수비수가 공격에 가담했을 때 생기는 빈 공간을 커버하는 역할을 부여하곤 했다.

그러나 이날 선발 명단에서 박지성은 자주 맡던 측면이 아니라 중앙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목적은 단 하나, 상대팀 AC밀란의 플레이메이커 안드레아 피를로를 봉쇄하는 것. 결과부터 말하면 퍼거슨 감독의 이 선택은 적중했고 맨유는 AC밀란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또 이 경기를 통해 축구계에서는 박지성을 두고 ‘수비형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아이러니한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인 안드레아 피를로(아래)와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박지성의 피를로 봉쇄 왜?이런 기형(?)적인 전술이 나온 배경에는 피를로라는 독특한 존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가 이른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라 불리는 역할의 선수이기 때문이다. 플레이메이커는 주도적으로 동료 선수에게 볼을 배급하고 득점 기회를 만드는 팀의 핵심선수를 말한다. 그리고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는 그중에서도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에 있는 말 그대로 ‘뒤로 내려앉은’ 플레이메이커다. 이탈리아에서는 ‘레지스타(지휘관)’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실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의 탄생은 ‘도망’에 가깝다. 기존의플레이메이커는 주로 스트라이커 바로 밑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위치해 공격을 주도했다(그림 참조). 4-4-2 포메이션이 유행하던 때 상대의 미드필더와 수비라인 사이에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를 배치해 빈 공간을 활용한 것이다.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4-2-3-1 포메이션이 많이 쓰이기 시작하면서역할에 한계가 왔다. 움직일 공간은 줄어들고 상대팀 두 명의 수비형 미드로부터 견제를 받기 시작해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다.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는 과도한 압박을 피하고 기본적으로 수비라인 바로 위의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에 선다.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상대편 선수들의 견제를 덜 받고,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갖고 볼을다룰 수 있다. 대신 공격수에게 줘야 할 패스의 거리가 멀어졌지만, 넓은 시야와 롱패스 능력으로 뒤에서부터 기회를 만들어 낸다. 박지성이 공격 진영까지 올라가 수비 역할을 한 것도 이때문이다.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는 기업에서의 은둔형 경영자와 비슷하다.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을 하는 경영자는 세간의 주목을 받기 쉽다. 기업의 실적이 좋을 때야 괜찮겠지만, 언론과 대중은 경영자의 부정적인 면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여기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소모적인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경영자의 이미지는 회사의 실적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견제를 애초에 피하기 위해 기업의 울타리 안으로 숨어든 것이 은둔형 경영자다. 이들은 눈에 띄는 공식 석상에는 참석하지 않고 언론노출을 피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기업의 전체 방향을 설정하고 사내 구석구석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은둔형 경영자는 일반적으로 오너 경영을 하는 기업에서 찾기 쉽다. 전문경영인의 경우 자신의 실적을 부각하거나 몸값을 올리기 위해 스포트라이트를 반가워하지만 오너 경영인에게는 그런 필요성이 적어서다. 특히 2, 3세 경영자 중에서는 여러 이유로 언론 집중 조명을 부담스러워 해 은둔 경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이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과거에는 은둔형 경자라고 불렸다. 하지만 이들의 은둔 경영이 경영에 전념하기 위한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형적인 은둔 경영은 벤처 출신의 IT 기업에 많다.

네이버의 이해진 의장, NXC의 김정주 회장,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이 의장은 언론 앞에 나서는 일이 매우 드물어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지난해 11월 일본에서 열린 라인 가입자 3억명 돌파 기념행사에 깜짝 등장 했는데, 이것이 12년만의 첫 대외활동이다. 그는 스스로 “대외활동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개발에 집중하기 위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 그는 이 역할을 맡아줄 인물을 곁에 뒀다. 한게임 합병 이후엔 김범수 대표(현재 카카오톡 이사회 의장)가, 지금은 김상헌 대표가 전면에 나서는 역할을 맡았다. 피를로라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옆에 그를 보호하기 위해 젠나로 가투소 같이 수비를 전담할 미드필더를 함께 배치한 것과 마찬가지다.



급변한 환경에 은둔 경영인 외출 잦아져그러나 최근 들어 은둔형 경영자들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듯하다. 이 의장은 지난해 깜짝 등장 이후 올해도 지속적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나고 있다. 김정주 회장 역시 지난해 15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따금 언론에 나와 경영전략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이에 대해 급변하는 국내외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글·텐센트·알리바바 등 글로벌 IT 공룡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와중에 우리 정부의 국내 IT업체 규제까지 높아지면서 안팎으로 치이는 상황에 적극 대응하려는 의지라는 것이다.

이는 후반 추가 시간 1점 차로 뒤지는 상황에서 뒤에 머물던 딥라잉 플레이메이커가 최전방으로 올라간 것과 같은 궁여지책이다. 변칙 전술은 때로는 이변의 동력이 되기도, 패배의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물론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IT 업계의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들의 바뀐 모습이 신의 한 수가 될지 또는 패착이 될지는 호각 소리가 울릴 때가 돼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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