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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엘리엇 총성 없는 전쟁] 주총 결과 상관없이 엘리엇은 웃는다

[삼성-엘리엇 총성 없는 전쟁] 주총 결과 상관없이 엘리엇은 웃는다

폴 싱어 엘리엇매니지먼트 회장.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의 승자는 누가 될까. 애초 삼성물산 적정가치를 놓고 시작된 싸움은 국제 투기 자본(엘리엇매니지먼트)의 공격과 국내 기업(삼성그룹)의 방어라는 프레임이 형성되면서 숨막히는 여론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로서는 삼성·엘리엇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7월 17일 열리는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박빙의 표(의결권) 대결이 예상되는 가운데, 주총 결과와 상관없이 질긴 싸움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7월 17일 주총이 끝이 아니라는 얘기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현재 판세는 삼성그룹에 불리한 게 사실이다. 합병 통과에 필요한 우호지분 확보(주총 참석률 70% 때 46.7% 이상, 80%일 때 53.3% 이상)를 위해 삼성그룹 최고위 경영진과 삼성물산 임직원이 총동원되고 있지만, 녹록하지가 않다. 주총을 일주일 앞둔 7월 10일 현재 삼성 측이 확보한 확실한 합병 찬성 지분은 삼성 특수관계인 13.82%와 자사주를 KCC에 넘겨 의결권을 인정받은 5.96%를 합쳐 19.78%. 장고에 들어간 최대주주 국민연금(11.21%)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국내 기관(10.19%)이 모두 삼성의 손을 들어줘도 40%를 갓 넘는다. 삼성 측이 외국인 투자자(26.68%)는 물론 승패의 변수로 떠오른 소액주주(25.02%) 설득에 총력을 다하는 이유다.
 합병 무산되면…
이와 달리 믿어지지 않지만(?) 아무도 모르게 삼성물산 지분 4.95%를 사두고, 5월 26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발표 직후 추가 매수를 통해 삼성물산 2대 주주(7.12%)에 올라선 엘리엇은 다소 유리한 입장이다. 합병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일성신약(2.11%), 캐나다연기금(0.21%) 등 9%대 초반을 확보한 가운데, 외국인 투자자 지분 중 70~80%를 우호지분으로 확보하면 국민연금의 찬반과 상관없이 합병을 막을 가능성이 있다.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하거나 셰도우보팅(다른 주주의 표결에서 찬반 비율로 표를 나누는 것)에 나서면 게임은 의외로 싱겁게 끝날 수도 있다.

지난해 삼성중공업·삼성엔지니어링 합병이 무산된 데 이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까지 실패할 경우, 삼성그룹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된다. ‘신의 한 수’로 불렸던 이번 합병을 통해 최소의 비용으로 그룹 경영권을 공고히 하려던 셈법은 뒤틀리고, 오히려 헤지펀드에 그룹 전체가 휘둘리는 처지가 된다. 만약 합병이 무산되면, 엘리엇은 꽃놀이패를 쥐게 된다. 일단, 엘리엇은 집요하게 문제 삼았던 삼성물산의 합병비율 재조정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삼성 측이 “(합병 무산 이후) 플랜B는 없다”며 합병 재추진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지만, 삼성물산이 삼성SDS와 함께 그룹 승계의 핵심 계열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엘리엇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 몰릴 수 있다. 엘리엇의 요구(제일모직:삼성물산=1:0.35에서 1:0.95)만큼은 아니더라도 삼성물산 가치를 높여 합병을 재추진하는 것이다. 이때, 엘리엇은 상당한 차익을 남기고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삼성그룹이 합병 재추진을 보류한 후, 장기전에 돌입할 수도 있다. 그룹 차원에서 경영권 방어를 명분으로 삼성물산·삼성전자 지분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삼성물산 주가가 오르면 엘리엇이 자금 회수로 돌아설 수 있지만, 삼성그룹 입장에서는 막대한 비용을 쓰게 된다.

합병 무산으로 기세가 오른 엘리엇이 주식을 추가 매수하거나 2대 주주 자격으로 경영 간섭에 나설 경우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실제로 엘리엇은 7월 8일 삼성물산 주주 전체에 보낸 서신에서 “합병안이 실행되지 않을 경우 삼성물산의 현 이사회에 대해 정도에 맞는 경영과 기업지배구조에 관한 개선 실시를 요구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현 이사회 교체 관련 임시주총 소집도 고려하겠다”고 압박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리더십에도 손상이 갈 수밖에 없다. 새롭게 짜야할 승계 절차와 비용도 문제지만, 삼성그룹의 취약한 지배구조가 드러난 이상 다른 헤지펀드들의 공격 가능성도 열려있다.
 합병 성사되면…
합병이 성사되더라도 엘리엇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합병 후 삼성물산·제일모직 주가가 올라 엘리엇이 차익을 남기고 떠날 수도 있지만, 엘리엇의 그간 전략을 봤을 때 집요한 장기 소송전 모드로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엘리엇은 최근 삼성물산의 주요 주주인 삼성SDI와 삼성화재 지분 각 1%를 매입했다. 증권가에선 엘리엇이 삼성전자 지분을 매입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합병안이 통과되면, 엘리엇의 합병 법인 지분은 2.1% 정도로 줄지만 경영권을 뒤흔들 수 있는 충분한 지분이다. 상법에 따르면, 발행주식 1% 이상을 보유한 주주는 유지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사회 결정에 의해 불이익이 생길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면 주주가 그런 행위를 중지하도록 청구할 수 있는 권리다.

엘리엇이 합병 후 추가 매수를 통해 지분율을 3% 이상으로 끌어올리면, 6개월 후에는 회계장부 열람권과 이사해임 청구권도 갖게 된다. 삼성그룹 입장에서 곤혹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삼성이 특정 시점에 엘리엇이 만족할 수 있는 가격에 지분을 블록딜(주식 대량 매매)로 사들이고 문제를 매듭지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는다. 엘리엇이 ISD(투자자-국가 소송) 등 국제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국내법에 따르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 산정에 문제가 없지만, 합병 시점의 주가가 아닌 시가총액과 자산 규모 등을 반영하는 외국에서 소송이 제기되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때문에 삼성 측이 엘리엇이 요구해온 현물·주주배당 확대 등 선물을 안기면서 화해 모드를 조성할 가능성도 있다.

한편, 삼성물산 주총 결과와 상관없이 그간 미진했던 재벌 지배구조 개편 등 민감한 이슈들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실질적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함께, 쥐꼬리 만한 지분으로 거대 기업을 좌지우지하는 한국식 지배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도 더욱 힘이 실릴 것 같다.

또한 이번 합병 결정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 소액주주의 권리 강화와 경영 참여 확대 논의도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하루 아침에 정반대의 리포트를 내며 스스로 불신을 자초한 증권사와 평소에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하다 일순간 애국·민족주의 모드로 돌변한 일부 언론과 경제 전문가의 행태도 문제로 지적된다. 국내 기업의 주요 주주이자 국민이 가입자·수급자인 국민연금의 투자·의결권 관련 논란도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 김태윤 기자 kim.taeyun@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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