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그렉시트’ 사태를 피할 두 가지 묘안 - 예금에 세금 물리고 차용증 발행?

‘그렉시트’ 사태를 피할 두 가지 묘안 - 예금에 세금 물리고 차용증 발행?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운데)가 7월 7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로존 긴급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떠나고 있다.
지난 1996년 1월, 우성그룹이 부도를 냈다. 30대 그룹이 도산한 첫 사례였다. 대기업도 망할 수 있다는 전례가 만들어지자 금융 시장에 불신의 전염병이 번졌다. 한보·대농·진로·삼미·기아·한라 등 거대한 빚더미가 연달아 무너졌다.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는 그렇게 시작되어 경제 전체를 흔들었다.

지난 6월 말 그리스가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린 돈 15억 유로를 갚지 못했다. 사실상의 국가 부도다. 유럽 선진국들의 통화동맹 ‘유로존’의 회원국 정부에서 처음 생긴 일이다. 전례가 만들어졌으니 금융 시장의 눈초리는 자연히 그 다음으로 부실한 이웃나라들로 향한다. 그래서 유럽중앙은행(ECB)은 도미노를 차단하려고 돈과 말을 쏟아 붓고 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방화벽이 단단하다.

그리스 사태는 유로존 내부의 주권충돌 양상을 띤다. 그리스는 “채권단이 잘못 내린 처방(과도한 긴축) 때문에 경제가 붕괴되고 빚이 더 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를 거부할 주권이 그리스 국민들에게 있다고 한다. 채권단 역시 주권을 주장한다. 그리스에 빌려준 돈은 채권국 국민들의 세금이니 온전히 돌려받을 방법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반박한다. 그래서 둘의 이견은 절충되기가 쉽지 않다. 파국을 막기 위한 타협의 돌파구가 계속 모색되고는 있지만, 다른 한 켠에서는 제3의 대안들이 동시에 거론되고 있다.
 은행시스템 살리는 게 문제의 핵심
국가가 자기 나라 화폐로 빌린 돈을 부도 내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정부가 채권을 발행하고 중앙은행이 이걸 전액 인수하기를 반복하면 재정에 돈이 떨어질 수가 없다. 돈을 새로 찍어내 빚을 갚는 식이다. 인플레이션 문제가 생기겠지만, 국가가 도산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리스에게 중앙은행이 없다는데 있다. 그리스 중앙은행도 유럽중앙은행도 그리스 정부의 통제권 밖이다. 사정은 독일도 마찬가지다. ‘유로화’는 공통의 화폐일 뿐이지 19개 회원국 그 누구의 전용 화폐가 아니다. 유로화는 회원국들 모두에게 ‘외화’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리스 정부가 진 빚은 전액 외채다. 외부의 구제금융이 없이는, 재정을 개선하지 않고는 빚을 갚을 재간이 없다.

그리스 은행들의 형편도 똑같다. 불안감을 느낀 시민들이 예금을 대거 인출해 가고 있다. 현금이 떨어진 은행들은 중앙은행에서 돈을 빌려 예금을 내준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그냥 빌려주지는 않는다. 은행들이 부실해져 상환능력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리스 은행들의 상환능력이 의심받고 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그리스 은행들은 전체 자산 가운데 2%가량을 그리스 국채로 보유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가 부도를 내면 이 국채는 휴지 조각이 된다. 은행들은 큰 손실을 입는다. 자본이 대폭 감소한다. 이런 때 은행에 자본을 투입하는 게 정부다. 그러나 그리스 정부는 그럴 돈이 없다. 그러므로 국가의 부도는 곧 은행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한다. 유로존의 특징이다.

그리스 은행시스템이 마비되면 그리스로의 유로화 공급이 불가능해진다. 경제 전체가 무너진다. 돈을 유통시켜 경제를 살리려면 그리스의 독자적인 화폐 발행이 불가피하다. ‘디폴트는 곧 그렉시트(Grexit)’란 말이 그래서 나온다.

그런데 최근 도널드 터스크 유럽정상회의 의장은 “아마도 우리는 파산한 회원국과 동거하는데 익숙해져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 정부가 부도를 내더라도 그게 곧 유로존 탈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앞서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도 “그리스 국민투표가 긴축반대를 결정하더라도 유로존에는 계속 남을 수 있다”고 말했었다. 무슨 묘안이 있을까?

주목할 만한 뉴스가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실렸다. ‘8000유로를 넘는 고액 예금에 대해 30%가량의 일회성 세금을 물리는 방안을 그리스 은행들이 강구 중’이라는 것이다. 말이 세금이지 예금 일부를 몰수한다는 뜻이다. 지난 2013년 키프로스 재정위기 때도 적용된 방식이다.

예금은 은행의 부채다. 그 채무의 상당액을 탕감 받으면 자본이 늘어난 것과 똑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은행 자산 상당액이 부실화되어도 부채를 함께 떨어내면 은행의 건전성, 상환능력은 보전된다. 그렇다면 그리스 정부가 부도를 낸 뒤에도 은행시스템은 온전히 돌아갈 수 있다. 그리스에 대한 유로화 공급도 계속된다. 유로존 회원국 지위가 유지된다는 뜻이다.

이 경우 그리스 재정과 은행의 연결고리는 끊기게 된다. 그리스 정부는 협상에 쓸 볼모를 잃는다. 반대로 채권단은 서둘러 구제금융을 제공해야 할 긴박성이 사라진다. 따라서 그리스 정부가 구제금융 조건을 거부하며 계속 버티려면 스스로 재정수지를 개선해야 한다.

다만 ‘파산한 회원국 정부와의 동거’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그리스 경제는 정부지출에 유난히 크게 의존하는 특성이 있다. 재정에 균열이 생기면 경제 전반이 큰 충격을 받는다. 채권단 차원에서 별도의 총수요 보완이 지원되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그리스의 은행시스템은 다시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금융은 경제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화폐는 중앙은행이 발행한 채무증서다. 은행이 화폐를 제시하는 경우 중앙은행은 국채나 외화 등 가치가 있는 다른 자산을 내주어야 한다. 그리스 정부에게도 돌파구가 있다. 가장 흔하게 거론되는 것이 바로 정부가 발행하는 ‘차용증(IOU)’이다. 따라서 IOU는 중앙은행이 아닌, 정부가 직접 찍는 화폐다. 병용화폐이자 유사화폐이다.

그리스 정부는 이 IOU로 공무원에게 월급을 주고 연금을 지급하며, 각종 조달대금을 결제할 수 있다. 대신 이 IOU가 유사 화폐로서 제 기능을 하려면, 세금납부 수단으로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정부가 이런 식으로 화폐를 발행하면 당장 국내에서의 재정자금 소요는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다. 적자를 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인쇄기를 더 돌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 IOU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와 달리, 이 채무증서를 정부에 제시해도 다른 가치 있는 자산을 내주지는 않는다. 화폐의 가치가 다른 자산으로 보증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국유재산을 담보로 거는 수밖에 없다.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타협
따라서 이 IOU가 실제로 발행되면 액면대로 유통되기 어렵다. 암시장이 금세 형성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액면 100유로짜리 IOU는 50~70유로짜리 유로화 지폐로 할인되어 거래되기 쉽다. 이는 공무원 월급과 연금이 30~50% 삭감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스 정부가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일이 제 손에 의해 현실화된다. 그렇다면 조달업자들은 정부에 대한 납품 가격을 60~100% 인상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정부재정 수지가 대폭 악화된다. 유로화 현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IOU를 헐값에 사들일 게 분명하다. 세금을 내는데 쓸 수 있기 때문이다. IOU의 가치가 30~50% 할인된다면, 실질적인 세금 부담도 30~50% 절감된다. 채권단에게 마냥 유리한 구도인 것도 아니다. 그리스 재정과 은행을 분리하는 작업에는 큰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예금몰수를 강제할 권한이 유로존에게 있는지 여부도 논란거리다. 은행산업에 대한 권한과 책임은 여전히 회원국 정부에게 상당 부분 남아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채권단과 그리스에게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결국 타협을 통해 파국을 막는 길뿐이다..

- 국제경제 분석 전문 매체 Global Monitor 특약

-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임영웅 콘서트 티켓 팔아요”…8000만원 뜯어낸 30대 감형, 왜?

2웨딩 시즌 더 잘 나가…2030 여성 필수템된 '이 옷'

3휘발유 가격 5주째 상승세…“다음주에도 오른다”

4올리브영 입점했더니 매출 ‘껑충’…K-뷰티 생태계 재편

5“오거스타에서 샷을~” 제주 명품 테디밸리 골프앤리조트

6소상공인 공략에 최선 다하는 통신 3사

7중국에 17년간 참패한 韓 가전…C-커머스 확산에 더 어려워진 반등

8국내 뷰티 시장 점령한 CJ올리브영...해외 진출은?

9“중국차, 낯설지 않아”...이젠 집 앞까지 파고든다

실시간 뉴스

1“임영웅 콘서트 티켓 팔아요”…8000만원 뜯어낸 30대 감형, 왜?

2웨딩 시즌 더 잘 나가…2030 여성 필수템된 '이 옷'

3휘발유 가격 5주째 상승세…“다음주에도 오른다”

4올리브영 입점했더니 매출 ‘껑충’…K-뷰티 생태계 재편

5“오거스타에서 샷을~” 제주 명품 테디밸리 골프앤리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