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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이름 변천사] 하나은행이 우리은행 될 뻔

[은행 이름 변천사] 하나은행이 우리은행 될 뻔

1991년 7월 15일 하나은행의 개업식 모습. ‘우리은행’ ‘상아은행’ ‘한아(韓亞)은행’ 등 다양한 논의를 거쳐 은행 최초의 순한글 이름인 ‘하나은행’이 탄생했다.
역사속으로 사라졌던 ‘조상제한서’의 이름 중 하나가 최근 부활했다. 조상제한서란 1990년대 우리나라 금융을 좌지우지하던 5대 은행(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의 머리글자를 설립연도 순으로 나열한 것이다.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에서 성덕선의 아버지 성동일이 다니던 곳도 이들 중 하나인 한일은행이었다.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에서 기업 금융으로 승승장구했지만 외환위기 이후 부실을 겪으면서 신생 은행에 흡수돼 지금은 이름조차 사라졌다.

이들 중 제일은행의 이름이 되살아났다. 한국SC은행은 4월 6일 브랜드 명칭을 ‘SC제일은행’으로 변경했다. SC제일은행 관계자는 “등기상의 이름은 그대로 두고, 브랜드명만 바꾸는데도 영업점 간판 교체 등 순차적으로 60억~70억의 비용이 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SC제일은행이 추가 비용이 드는데도 브랜드명을 변경하는 이유는 뭘까. SC그룹은 2005년 제일은행을 인수한 뒤 ‘SC제일은행’이란 이름을 썼다. 그러다 2012년 1월, 한국스탠다드차타드 은행으로 회사명을 변경하면서 ‘제일’이란 글자를 떼어냈다. 글로벌 금융 그룹인 만큼 세계 어디서나 공통된 이름을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그룹 차원의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국내 소매 금융만 놓고 봤을 땐 사정이 달랐다. 국내 소비자에게 친숙한 ‘제일’이란 이름을 빼니 외국계 회사란 이미지가 너무 강해졌다. SC제일은행 측은 “내부 조사 결과, 제일은행 시절부터 거래해온 전통 고객이나 최근 거래를 시작한 고객뿐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제일은행에 대한 브랜드 인지도와 친밀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에 SC제일은행은 본사를 설득해 한국SC은행의 이름에만 ‘제일’이라는 글자를 추가하기로 했다.
 은행명은 신뢰감·친밀감 높이는 역할
소매 금융이 중요한 국내 은행산업에서 ‘이름’은 중요하다. ‘이름’은 은행에 대한 신뢰감과 친밀성을 높여 고객을 끌어들이는데 도움을 준다. 이 때문에 은행 이름에는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은행의 다양한 전략이 숨어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구자현 연구위원은 “외국계 은행이 현지화하거나 반대로 국내 은행이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할 때 주요 전략 중 하나가 이름을 바꾸는 것”이라며 “이름을 통해 자신이 가진 단점을 보완하거나, 특정 고객층을 공략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91년 탄생한 옛 하나은행(현 KEB하나은행)은 신생 은행이라는 약점을 이름을 통해 강점으로 바꾼 경우다. KEB하나은행 관계자는 “신생 은행다운 새롭고 참신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순우리말로 된 은행 이름을 짓자는 원칙을 세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하나은행의 이름이 한때 우리은행이 될 뻔하기도 했다. 하나은행의 사료에 따르면 은행 출범을 앞두고 가장 먼저 거론된 이름이 ‘우리은행’이었다.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일상화된 단어를 고유명사화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논의가 무산됐다. 사내 공모를 통해 이름을 모집한 후 400명을 대상으로 선호도 조사를 한 결과 ‘상아’란 이름으로 의견이 모였다. 하지만 다소 무게감이 없다는 지적에 따라 ‘한아(韓亞)’라는 이름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KEB하나은행 관계자는 “한자를 사용하면 참신한 이미지를 줄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아 결국 하나란 이름이 확정됐다”며 “이로써 국내 금융회사 최초의 한글이름이 탄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앞서 1982년 설립된 신한은행도 이름을 통해 신생 은행의 약점을 보완했다. 신한은행의 이름에는 ‘새로운(신) 한국을(한) 만들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자본금 250억원의 작은 은행으로 출발했지만 새로운 한국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거창한 이름으로 작은 은행의 이미지를 극복했다는 설명이다.

한편 정작 ‘우리’란 이름을 쓴 우리은행은 이름을 바꾼 이후 소송에 휘말렸다. 국민·신한은행 등 시중 8개 은행은 2005년 “우리은행이 소비자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은행 직원 간 의사소통에도 혼란을 초래한다”며 특허법원에 상표 등록 무효 소송을 냈다. 대법원은 “‘우리’라는 단어는 한정된 특정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8개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은 우리은행이 상표에 대한 독점권이 없다는 의미지 ‘우리’라는 상호를 쓸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어서 8개 은행의 소송은 실익 없이 끝났다. 다른 은행도 이 이름을 쓸 수는 있지만 이미 ‘우리’라는 이름이 우리은행의 브랜드로 굳어져 있어 쓸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부터 다른 은행 직원들이 자신이 근무하는 은행과 ‘우리은행’을 구분하기 위해 우리(Woori)은행을 ‘워리(worry)’은행이라 부르는 관행이 생겨났다.

우리은행은 ‘우리’라는 브랜드와는 별도로 지난해 5월 ‘위비 뱅크’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선보였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Woori Internet Bank’의 이니셜과 꿀벌(Bee)을 합쳐 위비라는 캐릭터 이름과 브랜드를 만들었다”며 “모바일에 익숙한 세대에게 쉽고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정 대상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이 숨어 있는 셈이다.

KB국민은행은 ‘국민’이라는 서민적 이미지에 글로벌 이미지를 결합했다. 1963년 서민금융전담 국책은행으로 출범한 국민은행은 98년 ‘나라사랑 금 모으기 운동’을 주도하는 등 ‘국민’이란 이름에 맞는 금융회사의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서민경제를 위한 은행, 국민을 위한 은행이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ISA에 ‘국민 통장’ 별칭 붙자 국민은행 반색
하지만 ‘국민’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글로벌 금융회사의 이미지는 약했다. 이 은행은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2001년 국민은행이란 이름 앞에 영문 이니셜을 내세웠다. KB국민은행 측은 “해외 시장으로 영역을 확대해나가겠다는 은행의 의지를 담은 것”이라 설명했다. 최근 이 은행은 ‘국민’이라는 이름 덕분에 속으로 은근한 쾌재를 부르고 있다. 금융당국이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출범하면서 ‘국민 통장’이라는 별칭을 붙였기 때문이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국민통장이라는 이름이 소비자로 하여금 KB국민은행 상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어 다른 금융회사에서 못마땅해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상품 판매에서 이름이 주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구자현 연구위원은 “저금리 탓에 고객에게 줄 수 있는 실질적인 이익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은행은 고유한 정체성과 특화된 서비스로 고객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며 “고객에게 친근감을 주거나 상품이나 서비스 제공에 있어 차별화된 이미지를 선보일 수 있는 브랜드 개발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 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 김경진 기자 kjin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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