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 거부(巨富)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유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⑪]
남강 이승훈 “총·칼보다 더 중요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
“그는 조선에 태어나고 조선을 위하여 울고 웃고 조선을 위하여 죽었다.” -조만식
“조선에 이런 위인이 있었음을 조선은 아는가? 모르는가?” -함석헌
남강(南岡) 이승훈(1864~1930)을 추모한 말이다. 1930년 5월 9일, 오산학교의 설립자 이승훈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 ‘민족대표 33인’으로 관서 지역을 대표하는 교육자이자 기독교계 지도자였던 그는 105인 사건(신민회를 해체하고 항일 의식이 높았던 평안도·황해도 지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날조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으로 6년, 3.1운동으로 3년간 수감되는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이승훈은 일제에 협력을 거부하고 민족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기울였다. 개인의 영달보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그의 헌신적인 삶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는데,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조차 ‘위대신산(偉大辛酸)한 생애’라는 부음기사를 낼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가 이승훈을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종교 지도자로 기억하지만, 그는 뛰어난 기업가이기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조선의 물가를 뒤흔들 수 있을 정도의 부자였다고 한다.
“위기가 와도 다시 일어선다”…불굴의 상인 정신
처음에는 온갖 허드렛일에 잔심부름하는 말단 사환에 불과했지만 성실함과 노력으로 이내 임일권의 총애를 받게 된다. 임일권은 그에게 판매 및 수금, 경리업무를 맡겼고, 유기제조공정도 익히게 했다. 그를 후계자로 삼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승훈은 자기 사업을 해보겠다며 독립해 보부상이 됐다. 그는 평안북도에서 생산한 유기를 유기값이 비싼 황해도 목화 산지에 팔고, 대금으로 받은 목화를 다시 목화값이 비싼 평안북도 지역에 파는 식으로 큰 수익을 남겼다.
그렇게 번 돈에다 평안도의 거부 오희순에게 빌린 돈을 합쳐 유기 공장을 차렸다. 처음 사업은 순조로웠다. 근로자들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여 생산성을 높였고 다양한 시도로 품질을 향상했다. 평양에 지점을 낼 정도로 번창했다.
한데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평안도 지역이 전쟁터로 변하면서 이승훈의 유기 공장과 상점도 잿더미가 된 것이다. 누가 봐도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승훈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우선 자산 현황 및 부채 명세를 상세하게 정리해 오희순을 찾아갔다. ‘당장은 형편이 못 되지만 당신에게 빌린 돈은 꼭 갚겠다’, ‘지금 내가 재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새로 사업 자금을 지원해줄 수 있는가?’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채무자들이 전쟁을 핑계로 도망가고 연락을 끊어버린 그때, 최악의 상황에도 신용을 지키겠다며 찾아온 이승훈을 보며 오희순은 크게 감동했다. 이승훈이 믿을만하다고 생각한 그는 기존의 부채를 탕감하고 마음껏 쓰라며 사업 자금을 융통해주었다고 한다. 오희원은 훗날 오산학교에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오희순의 지원으로 이승훈은 재기에 성공했다. 기존의 유기뿐 아니라 지물(紙物), 석유, 금계랍(퀴닌, 말라리아 치료제) 등의 서양 약의 총판이 됐고, 각종 잡화와 자재 유통일에 뛰어들었다. 조선 상업의 중심이었던 관서 지방의 물류·유통은 그의 손에 있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오산학교의 1기 입학생이자 독립운동가 김도태가 지은 [남강 이승훈전]에 따르면 이때 이승훈의 자본금이 70만 냥에 이를 정도로 큰 부를 일궜다고 한다. 당시 소 한 마리 값이 1냥이었다.
물론, 이승훈이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관서 지역에서는 엽전의 값어치가 싸고 영남 지역에서는 비싼 점에 착안하여 엽전 1만 냥을 부산으로 보냈는데, 엽전을 실은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해 침몰하고 만 것이다. 명태 어획량이 감소하여 이를 대체할 동태를 사들였지만, 이듬해 명태 대풍(大豊)이 찾아와 헐값이 된 일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군수물자로 피혁 제품 수요가 급증하겠다고 판단한 그는 소가죽을 대거 매입했다. 그러나 소가죽을 채 팔기도 전에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단기간에 종료됐다. 사업이 존폐의 갈림길에 설 정도의 타격이었지만 물류업으로 다룰 신상품을 발굴하는 등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이 밖에도 ‘태극서관’이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이탈리아의 파마양행과 직교역을 추진하는 등 사업 다각화로 위기를 극복한다.
일제 맞서 전략적 대응으로 조선 인재 일궈
이런 과정을 겪으며 이승훈은 ‘동맹과 전략적 제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일본의 시장지배력과 제품 생산력과 막강한 자본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최소한 경쟁이라도 해볼 만한 수준의 생산 규모와 유통망이 필요하다. 모든 면에서 열세인 조선 상인과 자본가들이 연합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승훈은 당시 수요가 많았던 자기(瓷器), 즉 사기그릇에 초점을 맞췄다. 유기그릇을 생산하고 유통한 경험도 있었지만, 그가 활동하던 평양은 고려자기의 발상지 중 하나로 자기의 품질에 대한 자긍심이 매우 높은 지역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대량 생산된 사기그릇이 조선의 시장을 잠식하면서 사기그릇 상인과 자기 제조 장인들이 몰락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훈은 1908년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 창립을 주도했다. 그가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 이 회사에는 자기 제조 신기술을 개발한 정인숙, 자금 동원력을 가진 객주 상인 윤성운, 무역상 김양수·임석규·김남호·이덕환, 도자기 회사를 경영한 경험이 있는 박경석 등이 참여했다. 관서 지역을 대표하는 자본가, 상인, 제조업자가 망라됐는데, 대부분 관서 지역의 식산흥업운동(경제적 자강 운동), 오산학교(교육), 신민회(항일·애국계몽운동) 관련 인사라는 점에서 민족적 성향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이승훈은 조선 시장의 경제주도권을 지키고 조선인의 상업 자생력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조선은 점차 망국의 길로 접어 들어갔고, 이승훈은 교육 사업에 관심을 돌린다. 그는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라고 역설했다고 한다.
이승훈은 오산학교 외에서 안창호의 대성학교 설립을 지원하는 등 조선의 젊은 인재들을 교육하는 일에 매진했다. 재산 대부분을 이 일에 투입한다. 일제의 탄압을 받아 큰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그가 일군 토양 덕분에 백인제, 한경직, 주기철, 김소월 같은 거인이 자라났고, 염상섭, 홍명희, 함석헌 같은 지성들이 뜻을 펼칠 수 있었다.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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