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백과부’가 300억 기부 ‘백선생’ 되다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⑭]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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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백과부’가 300억 기부 ‘백선생’ 되다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⑭]

7세 때 아버지 여의고 궂은 일 마다 않고 돈 벌어
석회암 땅 미리 매입해 막대한 재산 이뤄
학교·공회당·도서관 건립에 현재돈 300억 기부

 
 
백선행 선생

백선행 선생

 
1933년 5월 9일,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언론은 백선행(白善行, 1848~1933)이라는 인물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백선행 여사 사회장(社會葬), 연도에 인산인해’, ‘혈혈단신의 피와 땀을 사회사업에 일관, 고(故) 백여사의 기구한 일생’, ‘백선행 여사, 그의 덕과 공적’, ‘실패를 돌려 성공으로, 근검에 산 팔십 평생’과 같은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한국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사회장이 치러진 백선행,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삼베 짜서 내다 팔고 돼지 기르고…악착같이 돈 모아

조선 헌종 14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백선행은 어릴 적에 평양으로 이사한 뒤에는 평생을 평양에서 살았다. 백선행의 어린 시절은 매우 고단했는데,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시집간 지 8개월 만에 남편과 사별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다. 이후 친정으로 돌아온 백선행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청대(靑黛)라는 천연염료를 만들고, 간장을 담그고, 삼베를 짜서 내다 팔았다. 식당을 돌아다니며 음식 찌꺼기를 얻어다가 돼지를 길렀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쳤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렇게 10년, 백선행과 그의 모친은 150냥짜리 집과 1,000냥의 현금을 갖게 된다.
 
이제 조금 살만해진 것일까? 하지만 백선행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백선행의 어머니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상주(喪主)가 필요했다. 요즘에야 아들이 없으면 딸이 상주가 될 수 있다지만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반드시 남자가 상주가 되어 상례와 제례를 주관해야 했다. 하여 먼 조카뻘 되는 사람을 어머니의 양자로 들여 상주를 맡겼는데, 이 사람이 아들로서 유산을 상속하겠다며 1,000냥이나 되는 현금을 모두 가로채 갔다. 겨우 집은 지켜냈지만, 백선행은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백선행은 절망만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예전처럼 염료를 만들고 돼지를 키우고 삼베를 짜며 다시 한푼 두푼 돈을 모았다. 하루 한 끼만 먹고, 거칠고 낡은 옷을 입으며 아끼고 또 아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땅을 샀고, 땅에서 난 이익으로 또 땅을 샀다. 백선행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사람이 계속 등장하고, 여자 혼자 사는 것을 노린 강도가 여러 차례 침입하기도 했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재산을 지켜냈다. 
 
이때 백선행은 “대문, 중문, 방문, 부엌문, 장지문, 들창 할 것 없이 외부인의 침범이 염려되는 장소는 모두 굵은 철창으로써 가로질러 막았다(잡지 〈동광〉 1931년 1월 1일자).”라고 한다. 이렇게 “철창 속에서 20여 년을 지냈는데” 그가 얼마나 위험 속에서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멘트 수요 폭발 예측하고 석회암 땅 매입해

그런데 이렇게 돈을 번 것만으로 ‘거부(巨富)’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장사와 노동을 하고 근검절약해서 수억, 수십억을 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수백억, 수천억 자산가가 되기란 어려운 법이다. 대규모 사업이든 투자든 큰돈을 버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백선행에게도 그런 계기가 있었다. 그가 사들인 땅을 무려 10배나 비싸게 판 것이다.  
 
개화기 이후, 서양인들이 시멘트를 가져와 건축물을 짓고, 그런 서양식 건축물이 점차 늘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백선행은 머지않아 시멘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리라 판단했다. 또한 수입만으로는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조선에도 시멘트 공장이 만들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한데 마침 평양에는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석이 풍부하다. 더욱이 시멘트 산업은 전형적인 원료 지향성 공업에 속하기 때문에 석회석을 채굴하는 광산 인근에 생산 공장을 건설해야 한다. 
 
이에 백선행은 석회암이 대규모로 묻혀 있는 평양 강동군 만달산 승호리 일대의 땅을 대거 매입했다. 당시 사람들은 석회암의 중요성을 몰랐고, 오히려 농사짓기 힘든 척박한 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백선행은 저렴한 가격에 토지를 사들일 수 있었다.  
 
바로 이 땅을 조선에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고자 했던 오노다(小野田)가 비싼 가격에 매입하면서 백선행은 10배가 넘은 차익을 얻게 된다(1919년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시멘트 공장인 ‘오도다 시멘트’가 설립되었다). 교통의 요지이자 대도시를 옆에 둔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가진데다가 양질의 석회암이 대량으로 묻혀 있었기 때문에, 오노다로서도 이 지역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백선행은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가격 흥정에 나섬으로써 유리한 위치에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백선행이 사기꾼에게 속아서 엉겁결에 산 땅을 운 좋게 비싸게 팔게 되었을 뿐이라도 격하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는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기 싫어했던 당시 가부장적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선행이 일관되게 보여준 배포와 결단력으로 봤을 때, 그가 세상의 흐름을 읽고 미래 가치에 투자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평양 내 학교에 기금…현재 가치 300억 넘는 돈

아무튼 이렇게 백선행은 큰돈을 벌었다. 남다른 안목과 과감한 투자 덕분에 일약 평양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의 반열에 오른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었다면, 그는 돈 많은 할머니로 남았을 것이다. 역사가 그를 기억하진 않았을 것이다. 젊은 시절 백선행이 돈에 집착했던 것은 조선이라는 사회에서 과부의 몸으로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만큼은 그에게 닥쳤던 고된 시련과 슬픔을 잊을 수 있어서이다. 백선행에게 돈은 자신을 지키는 보루였던 셈이다. 이랬던 돈이 자신을 지키고 자존감을 지켜주는 수준을 넘어서자, 이제 백선행은 모았던 돈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는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광성보통학교 등 평양 내 학교의 설립과 장학사업에 15만원 상당의 전답과 현금을 기부했다. 그러면서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선인을 위한 공회당과 도서관 건립 비용으로 65,000원, 이를 운영할 재단법인 비용으로 85,000원을 추가로 내놓았다(이때 지은 ‘백선행기념관’이 지금도 평양의 명소로 남아 있다). 30만 원, 현재 가치로 3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것이다.
 
공회당 개관식에서 한 백선행의 연설을 보자. “내가 쓰다 남은 돈이 있어 돌집 한 채 짓고 몇 학교에 돈을 좀 내었기로 소니 무엇이 훌륭하다고 찬하(攢賀)회를 한단 말이오? 세상 사람들이 참 부질없기도 하오. 사회에 돈을 내는 뜻이 무엇이냐고? 무식한 늙은이에게 뜻 같은 게 있을 리 있겠소? 자손 하나 없는 백 과부가 돈을 남기고 죽어서 친척 녀석들이 재산 싸움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그런 험한 꼴이 어디 있겠소? 그러니 내 생전에 세상에 좋다는 사업에 쓴다면 좋은 일이 아니오?” 나를 지키기 위해 돈을 모았고, 이제 그 목적을 달성했으니 남김없이 세상에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백선행의 뜻을 기려 평양 사람들은 그에게 ‘선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그전까지는 그냥 ‘백 과부’라고 불렸다), 그가 죽었을 때 평양 시민의 2/3가 나와 그가 가는 마지막 길을 전송해주었다. 백선행, 돈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 돈을 어떻게 불릴 것인가, 그리고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 사례다.
 

김다운 기자 kim.daw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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