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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대 벼락부자' 최창학의 황금광시대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⑳]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금광 발견으로 '천만장자' 등극
막대한 재산 환원으로, 조선의 3대 갑부 중 비난 피해

 
 
 
최창학이 사냥한 호랑이 위에 앉아있다. [사진 최창학 외손녀 양준심씨 제공]

최창학이 사냥한 호랑이 위에 앉아있다. [사진 최창학 외손녀 양준심씨 제공]

 
서울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 앞에는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건물 한 채가 자리 잡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가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집무실이자 거처로 사용했던 경교장(京橋莊)이다. 이승만의 이화장과 더불어 해방정국의 중심이었던 경교장은 일제강점기의 거부 최창학(崔昌學, 1891~1959)의 소유였다. 최창학이 지인인 독립운동가 김석황을 통해 이 집을 임시정부에 제공하였는데, 김구가 서거한 후 다시 가져갔다고 한다. 경교장은 최창학이 죽은 후 삼성그룹에 팔렸고 강북삼성병원의 현관으로 쓰이다가 2013년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 그렇다면 경교장의 본래 주인이었던 최창학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천만장자, 광산왕, 금광왕, 황금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잡지 [삼천리]에서는 그를 민영휘, 김성수와 함께 조선의 3대 갑부로 꼽았으며 “조선에서 가장 먼저 금광으로 부자라는 이름을 들은 이도 최씨요, 가장 돈을 많이 번 이도 최씨일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부자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태어난 최창학은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을 정도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배고픔이 한이 되었던 그는 “나의 평생소원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라며, 스무 살이 되던 해 괴나리봇짐과 곡괭이 하나를 짊어진 채 집을 나섰다. 그 후로 10년, 갖은 고생을 하며 평안북도 일대를 헤매던 그는 고향 부근에서 우연히 금맥을 발견했다. 최창학은 삼촌에게 돈을 빌려 채금(採金)을 시작하였는데 몇 달 만에 수백만 원을 보유한 거부가 되었을 정도로 금이 쏟아져 나왔다(한양의 좋은 집 한 채 값이 천 원이던 시절이다). 조선에 ‘황금광시대’ 열풍을 불게 만든 삼성(三成)금광의 출발이다.
 
이후 최창학은 삼성금광을 키워 일본 회사 미쓰이(三井)에 300만원(130만원이라는 기록도 있다)이라는 거금을 받고 팔았고, 그 돈으로 평안북도 삭주 지역에 새로운 금광을 물색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시련을 겪는다. 회사에 불이 나서 큰 손해를 입었는가 하면, 1924년 7월에는 무장 강도단이 쳐들어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머뭇거리고 두려워할 만한 상황이었을 텐데, 최창학은 오히려 통 큰 투자에 나섰다. 당시 이 사건이 터지자 삭주 일대의 금광, 광산주인들은 언제 또 위험을 겪을지 모른다며 자기 광산을 팔고 떠났다. 이를 최창학이 모두 사들인 것이다. 이 밖에도 최창학은 평안북도의 금광 수십 개를 인수하여 개발하였는데, 양질의 금광은 직접 경영하고 품질이 좋지 못한 금광은 임대하여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또한 새로 인수한 금광을 개발하여 일본 대기업에 되팖으로써 큰 차익을 거둔다.
 

‘위기’에 새로운 금광 인수해 막대한 수익  

한데 최창학은 일제강점기의 여느 부자들처럼 친일 행적을 보였다.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등 친일 단체에서 요직을 역임했고,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며 일제의 침략 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자신이 이룬 부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부분도 있었겠지만, 독립운동에 나서고 민족을 위해 헌신한 부자들도 있었음을 생각할 때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다만, 최창학에 대한 민중의 평가는 다른 친일 부자에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다. 1933년 10월 잡지 [삼천리]의 기사를 보자. “민영휘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인 양반계급에서 태어난 덕택으로 권세를 휘둘러 부를 쌓은 권세가요, 김성수 씨는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출생으로 비록 권세는 없었을지언정 이식(利殖)과 경리에 눈이 밝은 호농(豪農, 대지주)의 후예로 태어난 까닭에 수백 만의 재산을 세습한 행운아이고, 최창학 씨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나 갖은 고초와 시련을 맛보다가 호박이 굴러와 하루아침에 졸부가 된, 말하자면 제 3계급에 속하는 극히 미천한 불운아였던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조선의 3대 갑부 중 민영휘는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권력을 이용하여 막대한 재산을 불렸고, 호남 대지주의 아들인 김성수는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던 반면, 최창학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운이 좋아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민영휘와 김성수는 방법은 다를지언정 사람에게서 돈을 번 것에 비해, 최창학은 자연을 상대로 땅속에서 돈을 벌었다”라고 평가한다. 그로 인해 민영휘와 김성수는 질시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최창학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재물을 부러워할지언정 결코 그것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는데”, “자연을 착취한 재물은 사람을 착취한 재물처럼 불순하거나 잔인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친일파이지만 ‘사회사업’으로 명망 키워  

이에 더해 최창학은 ‘사회사업가’라고 불릴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삼성금광을 매각할 때 채권을 포기하는 형태로 지역 사람들에게 30만원을 기부하였으며, 광부로 일하던 사람들에게 곡식과 면포를 제공한 것이다. 또한 평안북도 조악공립보통학교 교사(校舍)를 지어 부지와 함께 기부하였고, 보성전문학교 증축비에 1만원, 경성공업학교 광산과 신설비에 3만원, 오산고등보통학교에 5만원을 희사하는 등 교육사업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하나 있는데 훗날 1957년 2월 7일, 최창학은 기부를 한 인연으로 오산고등보통학교(현 오산고등학교) 4대 이사장에 취임한다.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는 독립운동과 민족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기관이다. 비록 광복 후에 있었던 일이기는 하지만, 최창학이 이사장에 취임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여느 친일 부자와는 달랐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최창학의 삶에는 운이 크게 작용했다. 10년간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다지만, 금광이란 건 시간과 품이 들었다고 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창학이 삼성금광을 찾아낸 것은 어디까지나 운이었다. 만약 이 행운이 따르지 못했다면 최창학은 그저 평범한 광산 일꾼으로 사라져갔을 것이다. 하지만 운으로 붙잡은 기회를 최대한으로 키워낸 것은 분명히 그의 능력이었다. 위기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담대한 승부를 벌인 것, 광산의 가치를 키워 비싼 값에 되판 것에서 최창학의 탁월한 경영 수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든, 전략적으로 대응한 것이든 기부를 통해 본인의 명망을 키움으로써 부를 지켜내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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