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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흉물’이 최첨단 금융센터로

‘서울의 흉물’이 최첨단 금융센터로

역시 임자는 따로 있었다. 무려 10년 동안 공사중단, 설계변경을 거듭하며 철골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도심의 흉물로 방치돼 있다 93년 3월 사업주가 바뀌면서 공사가 재개됐던 서울 무교동 유진관광빌딩이 오는 6월 말 최첨단 국제금융센터로 모습을 드러낸다. 무려 14년간에 걸친 건축기간이 말해주듯 이 빌딩이 들어서기까지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건물의 건축주인 유진관광㈜은 당초 재일교포 사업가인 곽유지씨가 75년 당시 지금의 빌딩 건축부지에 개업한 엠파이어관광호텔(10층)이 모체. 일제 때 일본으로 건너가 빠친코와 부동산을 통해 돈을 모은 곽씨는 80년대 초 서울에 올림픽이 유치되자 엠파이어호텔 자리에 초대형 관광호텔을 건립할 계획을 추진, 84년 7월 서울시로부터 도심재개발사업(무교 3지구) 시행인가를 받아 냈다. 이 과정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씨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특혜시비를 낳기도 했다. 어쨌든 곽씨는 사업시행인가를 받자마자 엠파이어호텔을 휴업하고 철거했다. 87년에는 싱가포르·홍콩의 샹그리라호텔체인과 합작계약을 체결, 호텔 이름도 유진샹그리라호텔로 명명했다. 88년 초에는 인접 무교 12지구 재개발사업지구를 인수, 사업부지를 2천6백평으로 늘려 지하 8층·지상 34층 객실 5백6실의 특급호텔 건립계획을 확정했다. 12지구 인수과정에 다소 진통은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사업은 잘 진행돼 나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업실무를 맡겼던 조카 곽모씨가 50억원을 횡령하고 해외로 달아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업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뱅커전용 마케팅전략 맞아 떨어져 당초 올림픽 이전에 완공하기로 했던 호텔사업이 지지부진하자 샹그리라측이 합작계약을 해지, 철수했고 90년 5월에는 지하주차장 불법 증축을 둘러싸고 서울시 공무원에게 수천만원의 뇌물을 준 사실이 발각돼 당시 서울시 종합건설본부장을 비롯한 국장급 공무원 4명이 구속되고 1명이 면직되는 파문이 일어났다. 이 여파로 사건 당시 7층까지 골조공사만 일부 진행된 상태에서 1년 가까이 공사가 중단됐고 다시 공사가 재개돼 25층까지 골조공사가 진행됐으나 92년에 8층 부분의 불법증축 사실이 드러나 또 중단되면서 도심의 흉물로 방치돼 왔다. 유진관광빌딩이 이렇게 홍역을 치르고 있을 때 바로 맞은편 국제극장 자리에는 비슷한 시기에 롯데관광그룹이 추진한 광화문빌딩이 들어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롯데관광은 김기병 회장이 71년 롯데 이름만 빌려 창업한 회사로 동화면세점·태흥건설 등 9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그룹. 김회장 부인이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막내 여동생인 정희씨여서 창업 때 롯데 이름을 따왔다. 김회장은 태흥건설을 통한 광화문빌딩 건설 경험을 살려 지지부진하던 유진관광호텔 건설사업에 뛰어 들기로 하고 93년 3월 곽씨로부터 유진관광㈜을 계열사 명의로 인수했다. 김회장은 당초 땅을 인수하기로 했다가 세제상의 걸림돌 때문에 법인을 그대로 인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인이 바뀌면서 이 빌딩에도 행운이 뒤따랐다. 95년 건축법 규정의 개정으로 건물용적률 기준이 크게 완화되자 유진관광측은 설계를 변경, 건물 연면적을 20.8% 늘려 허가를 받았다. 건물 높이는 34층에서 30층으로 줄어 들었지만 연면적이 늘어나 결과적으로 투자효율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와 함께 당초 호텔 건립 목적의 건물 용도를 업무시설로 변경, 95년 11월 서울시로부터 재허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9∼25층까지 골조를 모두 철거하고 재시공해야 했다. 8층까지는 층고가 3.8m로 업무시설 전용에 문제가 없었지만 객실용으로 지어진 9층 이상은 3.5m에 불과했기 때문. 이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지어진 이 빌딩은 시기적으로 국내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불황의 늪에 빠져 도심 빌딩의 사무실이 남아 돌아가는 시점에 완공돼 분양에 상당한 고충을 겪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서울파이낸스센터로 명명된 이 빌딩은 처음부터 국내 기업이 아닌 외국계 금융기관 유치를 목적으로 지어진데다 IMF사태의 여파로 국내금융시장이 완전 개방되고 외환시장이 확대되면서 오히려 호기를 맞고 있다.

IMF 特需로 외국계은행 속속 입주 국내에 이미 진출해 있는 외국계 은행들이 늘어나는 업무수요에 맞춰 사무실을 확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신규 진출하는 은행들도 사무실을 찾고 있지만 이들의 입맛에 맞는 첨단빌딩이 4대문 안에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본점이 밀집한 우리나라 금융의 총본산 명동에 인접한 입지적 강점에다 처음부터 뱅커 전용으로 지어진 인텔리전트빌딩이라는 점이 부각돼 결과적으로 IMF사태의 덕을 보게 된 것이다. 유진관광(주) 이재평 상무는 “파이낸스센터라는 개념은 2년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을 계기로 국내 금융시장이 세계화될 것에 대비해 설정했는데 IMF사태로 국내 금융시장이 완전 개방되면서 예상보다 빨리 현실과 맞아 떨어졌다”고 말했다. 서울파이낸스센터 마케팅을 맡고 있는 한국부동산컨설팅 정광영 사장은 “환차익을 겨냥해 임대가 아니라 1개 층을 아예 매입하겠다는 외국계 은행도 있다”고 귀띔한다. 달러를 들여와 원화로 계약하는 이들 외국은행은 달러당 환율 1천5백원대에 매입하기 때문에 만약 환율이 1천2백원대의 안정권에 진입하면 건물 값이 오르지 않더라도 25%의 달러를 더 가져갈 수 있다. 게다가 이 건물이 4대문 안에 들어서는 가장 최첨단 건물로 외국은행들이 요구하는 설비수준을 만족시켜 주는 거의 유일한 빌딩이라는 점 때문에 분양은 예상외로 순조롭다. 모든 빌딩이 임대료를 내리고 있는 시점에 인접한 기존 빌딩보다 20∼25% 비싼 조건을 내걸고 분양하고 있는 것도 이런 자신감 때문이다. 외국계 기업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분양가 구조도 국내 다른 빌딩과는 다르다. 지상층인 1, 2층을 제외한 3∼29층까지는 고층일수록 가격이 비싸다. 임대료는 평당 8백50만(3층)∼9백50만원(29층), 매매가는 1천9백만(3층)∼2천1백만원(29층). 건물 1∼5층은 이미 동화은행 본점이 입주하기로 돼 있고 계열사인 동화면세점 본사가 입주할 27층을 제외한 다른 층도 외국계 은행·펀드·컨설팅사들이 입주 예약을 해 둔 상태다. 이들이 모두 입주하게 되면 연간 5천만 달러의 외화유입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4년간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공무원 여러명이 다쳐 서울시 공무원들에게는 쳐다보기조차 싫은 ‘5공의 망령’으로 낙인 찍혀 있지만, 시청에서 고개만 돌리면 바로 쳐다 보이는 자리에 들어선 이 건물이 외화벌이의 효자가 될 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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