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큰 폭탄보다 작은 '부실 뇌관' 더 겁난다
[분석]큰 폭탄보다 작은 '부실 뇌관' 더 겁난다
| 일러스트 조태호 | 공적자금·회사채 지원 같은 정부의 각종 ‘긴급수혈(자금지원)’을 받아서 지난해 목숨을 연명한 국내 부실기업들이 올해 한국경제의 뇌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정부가 보여주었던 각종 자금지원책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미봉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일단 국내 경제의 외관만 보면, 새해 들어 대한민국 경제의 양대 골칫거리인 하이닉스반도체와 대우자동차 문제가 곧 해결될 것 같은 희망이 보이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와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메모리부문 매각 및 비메모리부문 지분참여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GM의 대우차 인수도 곧 구체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우리 경제를 다시 위기 상태로 몰아넣었던 거대 재벌의 문제, 그토록 몇 년간 질질 끌면서 우리 경제의 회생에 먹구름을 드리우던 문제들이 이제라도 모두 해결될 듯한 기미다. 어찌보면 그나마 다행스러운 게 아닌가 하고 느낄 정도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부실기업 뇌관문제’가 다 해결된 것일까. 또한 하이닉스나 대우차 문제만 해결되면 이제 우리나라의 부실기업 뇌관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진 않을 것이다. 현재 하이닉스나 대우차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부실 대기업이 수두룩하다. 지난해 정부의 긴급수혈로 연명하고 있는 쌍용·고합·현대투신증권·대한생명을 비롯해서 굵직굵직한 워크아웃 기업들이 여기저기서 올 들어서도 계속 정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아 눈에 띄게 보이지는 않지만, 아직 한국경제엔 잠재부실 중견기업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이들의 잠재부실이 불거지면 올해 우리 경제는 다시 한 번 발목을 잡힐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실제 한국 기업들의 재무성적이 썩 좋은 것도 아니다. 한국은행의 기업경영분석에 의하면 우리나라 기업의 부채비율 등 재무구조는 확연히 개선되었기는 하나, 2001년 상반기 현재 제조업체 중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 수가 전체의 30%에 달하고 있다. 이들 기업의 차입금이 제조업체 전체 차입금의 50%에 달한다. 경기가 침체되기 전에도 그 비율이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 중 대부분은 최근의 경기침체로 인해서 영업실적이 나빠진 게 아니고, 또한 일시적으로 그런 부진한 성적을 보인 게 아니다. 부실경영이 고질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 중 대부분은 앞으로 국내 경기가 회복되어도 크게 나아질 전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제조업체 전체 차입금 중 절반가량은 앞으로 부실화할 우려가 농후한 부채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 부실화할 공룡재벌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 계열사간에 막대한 규모의 출자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계열사간 출자로 가공성 자본이 증가하여 부채비율 등 회계상 재무구조는 개선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내실이 취약한 재벌이 아직도 많이 잠재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부실 적자계열사에 대한 출자 규모가 급증하여 동반부실화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경제에 대한 적색 경고등’이라고 분명히 지적할 수 있다. 30대 재벌 중 일부 중하위 재벌의 경우 이미 위험수위에 다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들의 부실이 올해 표면화된다고 해도, 과거 대우·현대에 버금가는 충격을 국내 경제에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잔 매가 무섭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만약 다수의 중하위 재벌, 그리고 무수히 많은 군소기업의 부실화가 올 들어 불거진다면, 회생의 기로에 선 우리 경제는 엄청난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걸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기업실적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장사 못하는 부실기업의 문제가 올 들어서도 계속 야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부실기업 처리가 조속히 진행되었다면 올 들어 우리 경제는 과거를 씻고 재도약의 기회를 맞이했었을지도 모른다. 부실기업을 연명시키면서 추가로 든 비용도 절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국민부담도 경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왜 부실기업 처리가 이렇게 지연되었던 것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 개발계획 경제시대에도 우리나라에 대규모 부실기업 문제가 주기적으로 발생했었다. 그러나 그 처리방법은 어찌보면 간단했다. 하나 같이 해당 부실기업 또는 이를 인수한 기업에 정부가 막대한 직간접의 지원을 하면서 억지로 회생시키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험 때문인가. 관료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잘 이해하질 못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실기업을 과감히 정리하는 게 오히려 비용도 적게 들고 국민 경제적으로도 유리하다는 사실을. 더욱이 부실기업을 조속히 처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면, 관료들은 ‘부실기업들을 무조건 정리 퇴출시키자’는 것으로 인식하기도 했었다. 이는 부실기업 처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살 수 없는 기업은 빨리 죽이고 살 수 있는 기업은 확실히 살리자는 게 부실기업 처리의 원칙이다. 그렇게 해서 남아있는 기업들이 더 잘될 수 있는 여건을 조속히 조성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원칙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죽을 기업은 연명시키고, 살아남은 기업은 잘 되기 힘든 상황이 연출되었고, 이 덕분에 국민부담만 가중된 게 아닌가. 이런 악순환이 거듭된 데는, 관료들의 시장경제에 대한 무지도 한몫을 하였다. 무조건 방임만 하면 시장경제인 것으로 착각하는, 그러한 무지로 인해 정부가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장이 작동을 안 하면 시장이 작동하도록 정부가 확실한 원칙하에 개입을 해야 한다. 한데 정부가 할 일은 안 하고 뒤에서 슬금슬금 안 해야 할 일만 하니, 결국 시장경제는 회복되지 않고 관치만 무성해지는 결과가 야기되었다. 둘째, 우리나라의 고위 경제관료들 대부분은 자신의 짧은 재임기간 동안 아무 일 없이 끝내고자 하는 안이한 습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문제가 조만간 터질 것을 알면서도 이를 사전에 적극 대응하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곤 한다. 내 임기 중에만 문제가 터지지 않으면 된다는 안이한 태도인 것이다. 그러다 문제가 터진 연후에야 마치 자기가 해결사인양 임시 미봉책을 남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돈을 적절히 쓸 줄도 모른다는 지적이 많다. 예를 들어 조기에 수습하면 1조원이면 될 일도, 거액을 일시에 투입할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비판이 두려워, 2천억원, 1천억원, 3천억원 하는 식으로 국민의 눈을 속여가며 찔끔찔끔 사용한다. 그렇게 투입한 공적자금은 부실기업의 추가손실로 녹아나 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일이 더욱 악화되어, 언론 등을 통해 2조원, 3조원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된 다음에, 마치 “너희들이 필요하다고 하니 내가 나서서 ‘과감히’ 하겠노라” 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한다. 때문에 부실기업 처리는 지연되고 국민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과거 대우·현대·기아 등 부실재벌과 제일은행·서울은행 등 부실금융기관 처리과정에서 극명하게 보아왔다. 대표적인 고위 경제관료들의 모럴해저드 현상인 것이다. 불행히도 대한민국에는 국민의 비판을 무릅쓰고, 국민을 설득하면서, 국가 경제를 위해 할 일을 과감히 해나가는 ‘제대로 된’ 장관이 없는 것 같다. ‘멸종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멸종위기’가 아니라 아예 예전부터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셋째, 도산관련법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부실기업처리에 제도적 장애가 되고 있다. 부실뇌관을 안고 있는 하이닉스반도체를 예로 들어보자. 일단 정확한 실사를 한 연후에 만약 살릴 가치가 없어 빨리 정리하는 것이 채권단의 손실 최소화를 위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현행 도산법 체계상 ‘신속한 정리’가 쉽지 않다. 반대로 살릴 가치가 있다면 채권단이 과감한 채무의 탕감 및 출자전환을 통해 최소한 살 수 있을 만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 또한 제도적으로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 만약 하이닉스가 예상대로 회생한다면 기정하면 채권단은 전환출자된 주식을 매각하여 탕감과 출자전환 과정에서 감수한 손실을 최대한 회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려면 기존 주식의 대부분을 폐기처분하는 감자조치가 단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행법 체계상 이것도 또한 쉽지 않다. 따라서 손실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채권단이 지고(즉 국민이 지고), 이익은 부실기업의 기존주주에게 돌아가는 ‘이익의 사유화, 비용의 공유화’ 현상이 야기됐고, 이 같은 현상은 올 들어서도 계속될 전망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과감한 채무탕감과 출자전환을 통한 기업의 회생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 경제가 올해 위기를 확실히 벗어나고 성장의 모멘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억지로 연명된 부실기업 ‘뇌관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부실 대기업 문제를 조속히 완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규모로 존재하고 있는 군소 잠재부실기업, 부실화 위험이 높은 중하위 재벌에 대한 처리도 조속히 매듭지어야 한다. 이를 위해 책임있는 정책집행을 할 수 있는 소신 있는 장관을 임명하고, 투명한 원칙에 따라 정책을 집행토록 해야 한다. 그리고 부실기업 처리에 장애가 되는 제도적 요인도 조속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금감원 발표에 의하면, 은행권은 작년에 외환위기 후 처음 흑자를 보였고, 흑자 규모도 사상 최대인 5조 2천2백41억원에 달한다. 대손충당금 적립전 이익은 무려 14조8천2백74억원에 달한다. 대손충당금 규모가 줄어드는 금년에는 은행들이 천문학적인 규모의 이익을 낼 전망이다. 하지만 이익이 많이 난다고 좋아하며 해이해질 게 아니다. 대규모 영업이익을 바탕으로 과감한 구조조정을 다시 한 번 추진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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