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미래가치’보다 현재의 ‘영업실적’ 중시
장밋빛 ‘미래가치’보다 현재의 ‘영업실적’ 중시
한국의 벤처캐피털은 15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짧은 국내 산업화의 역사 중에서도 막내둥이에 해당하는 일천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일반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99년 말부터 시작된 이른바 ‘벤처 붐’ 혹은 ‘코스닥 붐’이 일고나서부터다. 혜성처럼 나타난 벤처의 동반자 혹은 조력자로 그 이름을 내밀게 된다. 이후 2000년 초반까지 벤처캐피털은 한마디로 ‘황금기’를 구가했다. 2000년 한 해에만 설립된 벤처캐피털은 50여개이고, 현재는 1백50여개에 이르고 있다. 국내 벤처캐피털이 2000년 한 해 동안 투자한 규모는 86년부터 99년까지 14년간 투자한 자금 1조6천9백70억원에 육박하는 1조5천9백41억원. ‘거품’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거품’의 수명은 오래 가지 못했다. 2000년 하반기부터 코스닥은 급랭, 50조원에 이르는 자금이 증발해 버렸다. ‘거품’ 후의 후유증은 투자규모의 급감으로 나타났다. 2000년 하반기부터 벤처투자 금액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코스닥행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벤처기업들은 코스닥의 붕괴로 인해 투자배수를 현저하게 낮춰야 했으며, 벤처붐의 선두주자였던 인터넷 기업들을 중심으로 투자받기가 ‘하늘의 별따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인터넷에 공모를 시작하자마자 10분에 9억9천만원의 투자금이 동나고, 10배·20배 펀딩이 ‘식은 죽 먹기’였던 벤처 투자 분위기는 혹독한 한파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따라 벤처캐피털 등록증을 자진 반납한 회사도 여럿 있었고, 실질적인 투자를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회사들도 늘어났다. 벤처캐피털에게 99년과 2000년은 벤처와 인터넷·코스닥의 거품이 만들어놓은 열매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맛본, 매우 중요한 해로서 투자 패턴 변화의 분수령이 되는 해이다. 2000년 하반기부터 ‘회수 난관’이라는 ‘쓴맛’을 본 벤처캐피털들의 투자 규모는 하락세로 돌아서게 된다. 지난해 3분기까지 벤처투자는 총 1천1백14개 업체에 8천8백90억원의 자금이 투입되었으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60% 수준에 불과했다. 1백50여개의 벤처캐피털 가운데 투자여력을 가진 회사는 3분의 1 수준인 50여개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회사들은 개점휴업 상태나 다름없었다. 투자배수는 현격하게 하향 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코스닥 붕괴 이후 기업가치의 급격한 하락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벤처 붐’이 일던 시기에 비해 4분의1 수준으로 떨어졌다. ‘Spray & Pray’, 즉 ‘뿌리고 기도하기’. 벤처경기가 한창일 때는 시장에 내놓기 무섭게 높은 배수로 팔려나가던 시절에 대한 자성이 벤처캐피털 내부에서 일기 시작했다. 기업가치에 대한 정밀한 평가 작업과 수익모델이 확실한 기업에의 투자를 선호하는 ‘투자의 과학화’가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경영인의 자질이나 경영실적·시장 규모나 성장성·경쟁상황·제품 및 기술력·평가(Valuation)와 전략(Exit)까지 세심하게 체크하기에 이른 것이다. ‘벤처 붐’에 편승한 무분별한 투자는 생존마저 위협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뼈아픈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다. 수익모델이 빈약한 닷컴기업들은 벤처캐피털 투자 회피 1순위가 되었으며, 비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비교적 회수가 빠르고 성공률이 높은 문화컨텐츠 분야에 대한 투자가 각광을 받았고, 바이오 분야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정보통신 분야의 침체로 인해 정상적인 투자와 회수가 어려워짐에 따라 단기간에 높은 이득을 올릴 수 있는 영화·게임·공연 분야가 새로운 투자처로 떠오른 것이다. 영화의 경우 지난해 제작비 중 50% 정도가 벤처캐피털 자금이 투입된 것으로 볼 정도다. 바이오 분야는 투자규모가 크고, 회수기간이 길다는 위험부담이 따르지만, 성공시에는 ‘대박’을 기대할 수 있는 분야로서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주고 있다. 투자회수에 어려움을 겪는 회사들이 많아지면서 비교적 회수가 빠른 기업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 초기 단계(Early Stage)의 투자비중이 여전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확장 단계(Expansion)의 투자 비중도 높은 편이며, 단기간에 투자수익을 회수할 수 있는 상장 직전의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비중은 점차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장미빛’ 미래가치보다는 ‘현재’의 영업실적이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벤처캐피털의 투자재원은 회사계정과 조합계정으로 나뉘는데, 조합계정의 투자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도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이다. 99년 조합계정 투자비율은 지난 99년의 경우 27%였으나, 2001년에는 46%로 늘어났다. 한국기술투자의 경우 ‘조합 중심의 투자 전문회사로 성장한다’는 장기비전을 설정하고, 2005년까지 조합의 비중을 69%로 높인다고 발표한 바 있으며, 다른 많은 벤처캐피털들도 조합 결성을 늘리고 있다. 벤처캐피털들이 조합 투자비중을 높이는 이유는 자기자본을 조합에 출자함으로써 많은 조합을 만들어 투자재원의 규모를 확대할 수 있고, 조합 운영 수수료를 통해 안정적인 수익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투자업체의 IPO를 통한 전통적인 회수방법으로는 코스닥 시장의 부침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수익 확보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점차 증가할 것으로 보이며, 해외 선진국의 벤처캐피털 투자행태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업계는 이같은 투자 행위 자체를 ‘벤처와 벤처캐피털 관계의 시작’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진정한 벤처캐피털은 투자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지원활동을 통해 그 벤처기업의 회사가치를 높여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벤처캐피털의 수가 늘어나면서 기투자업체에 대한 지원활동의 폭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재무·기술·법률·회계 등의 컨설팅에서 경영전략·마케팅·IPO·홍보·IR·해외진출 등 다방면에 걸쳐 지원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수익 모델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 다양한 분야로의 투자 확대, 조합 비중의 확대 등 최근 벤처캐피털에 일고 있는 투자 패턴의 변화는 긍정적인 신호임에 틀림없다. ‘버블’에서 ‘비리’로 얼룩지고 있는 벤처업계의 제자리 찾기는 벤처의 ‘옥석 가리기’부터 시작돼야 하며, 벤처의 자금줄인 벤처캐피털의 올바른 투자 행위 또한 중요하다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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